“적들이 깃발을 꺾었습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은 자신도 눈으로 적의 기사가 깃발을 낚아챈 후 깃대를 꺾어 버리는 것을 봤으면서도 아직까지 못 본 척하고 있다가, 부하가 보고를 올리자 짐짓 허세를 부리면서 외쳤다.
“이런 천인공노할 녀석들. 이쪽에서 자비를 베푸는데도 그것을 못 알아듣다니. 여봐랏! 저 극악무도한 놈들에게 맛을 보여 줘라.”
공왕의 옆에 서 있던 노장군이 외쳤다.
“기사단 돌격하랏!”
코린트의 기사단은 트루비아의 기사단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을 알기에 탄벤스 공국의 타이탄이 돌격해 들어갈 때, 그들을 따라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코린트 쪽의 입장에서는 적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 준 후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그냥 놔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에서도 타이탄을 꺼내 놓기 시작하자 철십자 기사단장 가가린 후작은 경악했다. 삼두의 드래곤 문장을 달고 있는 크라레스의 타이탄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가가린 후작은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탄벤스 공국 군대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지원 나와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면 승부로 나온 것을 보면 진짜로 한판 해 볼 작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후퇴할 충분한 시간 여유를 줬음에도 아직까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 코린트군을 이길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정 봐주지 마라. 돌격!”
가가린 후작은 상대방과 격전을 벌이면서도 매우 찝찝했다. 상대방 타이탄은 분명히 크라레스군 중앙 기사단 소속의 7전대와 8전대가 분명했다. 적 타이탄에 그려져 있는 전대 문장(戰隊紋章)을 무시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트라노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5전대부터 8전대까지였다. 그리고 저 문장들은 7전대와 8전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가가린 후작의 머릿속은 급속도로 회전했다. 크라레스 기사단의 1개 전대는 타이탄이 30대였다. 그런데 저 앞에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은 40여 대. 그렇다면 최소한 20대 이상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적들은 이쪽에 코린트의 기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덤비는 이상,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포위 공격인가?’
가가린 후작은 뒤에 적의 타이탄이 나타날 가능성을 따져 보기 시작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겨우 34대밖에 안 되는 철십자 기사단을 둘로 나눈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정면의 적을 박살 내 버린 후 도주하는 적을 뒤쫓지 않고, 180도 반전하여 탄벤스군을 학살하는 크라레스의 별동대를 무찌르는 것뿐이었다.
‘젠장! 더럽게 걸렸군…….’
이제 가가린 후작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한 눈앞의 적이라도 박살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뒤로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로부터 지휘권을 하사받은 이 철십자 기사단이 오늘 전멸당할 가능성까지 있었던 것이다.
“돌격! 황제 폐하께 영광을!”
이어서 벌어진 대규모 타이탄 전투는 놀랍게도 코린트 기사단의 압승이었다. 트루비아 연합군 쪽의 주력 부대인 크라레스 기사단은 대충하고 끝내려고 든 것에 반해서, 위기를 느낀 코린트의 기사단은 대충할 생각은 아예 때려치우고 총력전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수십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구는 가운데 가가린 후작은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추격하지 않고, 곧장 반전하여 공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적의 별동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알지 못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만약 가가린 후작이 뒤의 적을 생각하지 않고, 패퇴하는 크라레스 기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감행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가가린 후작은 크라레스군의 퇴로를 지키고 있었던 라테민 백작의 별동대와 패주(敗走)하던 쟈므란 백작의 양쪽 부대에게 협공을 당해서 되려 전멸당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렇듯 전쟁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를 차지하는 것은 전략도, 전술도 아니고 운(運)이었다. 그렇기에 예로부터 가장 뛰어난 장수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운이 들어가는 것이다.
크라레스 파견군이 대패(大敗)했다는 보고는 재빨리 각국에 보고 되었다. 루빈스키 폰 스바시에 대공은 그 급보를 받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마시고 있던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와 황제가 2개 전대를 트루비아에 파견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트루비아의 체면을 살려 주는 것이었을 뿐, 승리도 패배도 원하지 않았다. 적당한 수준에서 트루비아와 탄벤스 공국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 은근슬쩍 ‘후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견군을 내보내 놨더니 그가 가장 원하지 않던 행위, 즉 ‘정면 대결’을 펼쳐서는 결국은 대패를 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라고? 추가적인 파병이 필요하다고?”
“예, 폐하. 원래는 적당한 수준에서 후퇴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사옵니다. 본국이 대패를 한 이상, 동맹국들이 본국의 능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옵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여 흔들리는 본국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하옵니다. 그렇게 큰 승리는 필요 없지만, 어느 정도 ‘우세한 상황’으로 전세를 몰고 가야만 하옵니다.”
루빈스키 대공의 말을 다 들은 황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구려. 그렇다면 얼마나 파병을 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꼭 파병을 더 한다고 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승리를 거두도록 해야지요. 아르곤 국경에 주둔 중인 제1전대를 투입하겠사옵니다. 제1전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지난번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던 만큼, 충분히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라면 루빈스키 대공의 먼 친척이었다. 루빈스키는 크로아 후작이 젊었을 때 검술을 가르쳐 준 적도 있었기에, 그의 차분한 성품이라든지 꼼꼼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실력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6년 전에 벌어졌던 제국 전쟁에서 크로아 후작은 미란에 파견되었던 살라만더 기사단 부단장의 직분을 훌륭하게 완수해 냈고, 또 그에 뒤이어 벌어진 코린트와의 전쟁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지금은 후작으로 작위가 한 단계 상승한 상태였다.
크라레스의 군 지휘부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코린트와 ‘잠재적인 위험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아르곤의 국경에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들로 구성된 전대들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코린트는 그렇다고 해도, 크로노스교가 통치를 시작한 이래로 여태껏 타국을 침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르곤이 왜 ‘잠재적인 위험 지역’으로 잡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아르곤의 군사력이 대단히 강력하고, 또 그 국력 또한 대단하기에 그렇게 설정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6년 전 전쟁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크로아 후작이 지휘하는 제1전대와 역시 뛰어난 무훈을 통해 올라온 린넨 후작이 지휘하는 제2전대. 이들은 만약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안전한 아르곤 국경’을 부담 없이 이탈하여 그곳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군적인 성격이 짙었다. 물론 이렇게 아르곤을 위험 지역으로 선포해 두면 속사정을 잘 모르는 적들은 1, 2전대가 아르곤 국경에 꼭 매달려 있어야만 하는 줄 알고 이쪽의 유동 전력에 대해 오판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1, 2전대에는 그 예비군적인 성격 외에도 한 가지 임무가 더 있었다. 말토리오 산맥 끝자락에는 아르곤과 치레아로 갈 수 있는 산악 도로가 위치하고 있었다. 바로 그 최고의 교통의 요지에 요새를 건설하고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크라레스 제국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토리오를 넘어 진격해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치레아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 2전대가 주둔하고 있는 말도른 요새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스바시에 공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란군이 말토리오 산맥을 곧바로 넘지 않고 스바시에 공국 쪽으로 진격한다면 그곳에는 스바시에 기사단과 제5전대가 주둔하고 있으므로 본국에서 증원군을 파병할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듯, 제1, 2전대는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의 최고 정예였고 그 목적에 맞는 위치에 주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제1전대를 전장으로 보낸다면 충분히 그 지닌 실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처리하라.”
“옛, 폐하.”
이렇게 해서 탄벤스 공국을 무대로 거대 강대국들의 제2차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탄벤스 공국에서 벌어진 제2차 전투는 순전히 크라레스의 자존심과 국제적 지위 하락을 염려해서 벌어진 전투였다.
그에 비해 코린트의 로체스터 공작은 가가린 후작으로부터 대승의 보고를 접하자마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전해진다. 이번 전쟁을 대충 끝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둬 버린 한심한 부하 때문에 쏟아져 나온 가슴 아픈 한숨이었다. 이렇게 되면 크라레스가 가만히 물러날 가능성은 더욱 없어지기에 로체스터 공작은 추가로 30대의 타이탄을 파병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명령을 어기고 승리를 거둬 버린 멍청한 가가린 후작을 사령관직에서 박탈하고 대신 은십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이 탄벤스 전선의 사령관으로 즉위하게 된다.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6년 전에 벌어졌던 전쟁에서 전사한 리사 드 크로데인 후작 부인을 배출한, 코린트의 유명한 3대 무가 중의 하나인 크로데인 가문의 기사로서 대단히 실력이 뛰어났다. 크로데인 후작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로체스터 공작에게 불려가서 한 시간 동안이나 잔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그 잔소리의 요지를 간단하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적당한 수준에서 놈들에게 승리를 맛보게 해 주게나. 본국의 체면이 있으니 패배는 절대로 안 돼. 일단 치고받다가 적당한 순간에 슬쩍 전략적 후퇴를 하란 말이야. 그래야 이놈의 망할 신경전을 끝낼 수 있다구. 알겠나?”
다시 불붙은 제국 전쟁
이제 바야흐로 탄벤스 공국에서의 전쟁은 당사국인 탄벤스 공국과 트루비아 왕국을 뒷전으로 해 두고, 코린트와 크라레스의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로 흘러가고 있었다.
증원 부대와 함께 도착한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은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다. 대패라고는 하지만 타이탄 전투 직후 적들은 패주하는 쟈므란 백작의 기사단에 대해 추격전을 펼치지 않았기에, 타이탄 부대의 피해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다. 대신 후퇴하는 타이탄 부대를 뒤따라 재빨리 전장을 이탈하지 못한 트루비아 정규군이 입은 피해가 막심했던 것이다.
“시드미안 경.”
“예?”
“귀국 군대는 30킬로미터 뒤쪽으로 좀 빼 주십시오. 이제부터 벌어지게 될 전쟁은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를 상대로 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병이나 기병들은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또, 전쟁 중에 그들까지 신경 쓰면서 싸울 수는 없지요. 이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라테민 백작.”
“예.”
같은 전대장급이라고 해도 그 연륜이나 지위로 봤을 때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나 아르곤이나 코린트의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는 1, 2, 3, 4전대장들은 6년 전 제국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매우 노련하면서도 우수한 실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에 비해 스바시에나 크로나사 서부, 혹은 수도에 주둔하고 있는 5, 6, 7, 8전대는 제국 전쟁 후에 새로 창설되어 배치된 부대들인 만큼 그 지휘관들은 새로이 지휘관으로 임명된 신출내기들이었다. 물론 그들도 제국 전쟁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독립 부대의 지휘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전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는 어떻소?”
“예, 26대를 잃었습니다. 각하.”
“26대라……. 어려운 전투가 되겠군.”
한참 고심하고 있던 크로아 후작은 시드미안을 향해 말했다.
“시드미안 경,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어쩌면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보유하고 계신 타이탄 전력만으로 군대를 보호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 아직도 10여 대가 남아 있으니 그런대로 충분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경은 기사단과 함께 트루비아군을 보호하는 데 치중하십시오.”
크로아 후작은 노련한 인물답게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적들은 천천히 이동해 오면서 이쪽을 압박해 오고 있었기에 기습 공격을 가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천천히 이동해 오는 적의 주력 부대를 라테민 백작과 쟈므란 백작이 각각 지휘하는 좌, 우익 부대가 적의 서쪽과 동쪽을 맡고, 크로아 후작이 거느리는 주력 부대가 남쪽을 맡는다. 상대는 매우 천천히 이동해 오고 있으니 기습전(奇襲戰)에 있어서 서로 간의 시간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크로아 후작이 북쪽에 대해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적들이 일단 치고받다가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배려였다.
다음 날 오후, 새롭게 코린트 파견군의 사령관이 된 알프레드 드 크로데인 후작은 정찰조로부터 적의 주력 부대가 30킬로미터 전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 전에 트루비아군이 대패를 했던 전투와 같이 트루비아군이 먼저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가 10킬로미터쯤 접근해 들어가서 밤을 지새운 다음, 다음 날 아침 무렵에 상호 간에 진형을 갖춰 격전을 치르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확실히 서로의 체면이 걸린 싸움이라서 그런지 매우 신사적으로 싸운단 말씀이야. 전번 전쟁에서는 정규전은 거의 없고, 계속 게릴라전만 펼쳤었는데…….”
“후작 각하.”
탄벤스 공국의 전령이 급히 말을 달려오며 크로데인 후작을 찾았다. 그것을 보고 후작의 경호 기사 한 명이 그쪽으로 달려가 그를 후작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무슨 일인가?”
“예, 공왕 전하께옵서 이쯤에서 식사를 하고 다시 진격을 하자고 말씀하셨사옵니다.”
크로데인 후작은 태양을 살짝 바라봤다. 이제 겨우 정오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오늘 저녁에 야영하기로 정한 목적지까지 겨우 17킬로미터 남짓 남았으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행군을 해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을 듯이 생각되었다. 또 내일 아침에 있을 전투를 생각한다면 병사들에게 충분한 식사와 휴식이 필요할 것은 분명했다.
“알겠다. 공왕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따르겠다고 말씀드려라.”
“옛, 각하.”
탄벤스 군대는 상관의 명령대로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나 저녁 식사의 경우 든든한 방어진이 설치되기에 그래도 격식을 갖춘 식사가 장만되어 배급된다. 하지만 이렇듯 휴식을 겸한 점심때의 식사는 빵과 고기포, 그리고 물만으로 간단히 넘어가게 된다.
적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이 절호의 순간을 놓칠 리 없는 노련한 크로아 후작의 군대는 그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가했다. 서로 간에 진형을 짜고 흰 깃발을 들고 상대를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기 위한 전령 따위를 보내야 하는 정식 전투가 아닌 기습 공격인 만큼, 크라레스의 64대나 되는 타이탄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뛰쳐나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적진을 향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젠장! 모두들 타이탄을 꺼내랏! 적 타이탄을 막아라. 탄벤스 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 줘랏!”
크로데인 후작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기사단뿐이었다면 재빨리 적이 공격해 오지 않는 북쪽으로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와 함께 이동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이 도망치면 탄벤스 공국의 군대는 전멸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 공왕이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파견되었던 코린트 기사단과 그 형편없는 기사단을 동맹국에 파견해 준 코린트의 명성은 땅바닥에 패대기쳐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공왕 전하를 피신시켯!”
삼면에서 육박해 들어오는 적 타이탄들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주력 부대는 기병과 보병들이 섞여 우왕좌왕하는 혼란의 극치를 이뤘다. 이 전투에서 크로데인 후작이 지휘하던 코린트의 타이탄 부대는 탄벤스 공국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지원해 주기 위해 크라레스군과 본의 아니게 사생결단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코린트 파견군에게 남은 것은 전력의 반 이상이나 상실한 참패, 그리고 그 혼란의 극치를 이뤘던 전장의 어느 구석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공왕이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