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8화 (264/930)

“대패를 했다고 하옵니다.”

베르딘 후작 대신에 로체스터 공작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는 붉게 충혈되어 있는 로체스터 공작의 분노에 타오르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뿌드드득’하는 이빨 갈리는 소리와 함께 ‘우지끈’하는 로체스터 공작이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무의식적인 그의 손아귀 힘에 의해 부서져 나가는 소리까지 함께 들려오자, 마치 자신이 대패를 당하고 보고하는 당사자가 된 듯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새파랗게 질려있는 마법사를 향해 드디어 노성을 터뜨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 그냥 싸우는 척하다가 슬쩍 후퇴하는 것도 못 한단 말이냐? 그 녀석의 목을 당장 잘라 버렷!”

베르딘은 기사단이 대패했다는 그 보고를 접하면 로체스터가 발광 할 것이 분명했기에 슬그머니 부하에게 팔밀이를 했고, 보고서를 대신 들고 온 마법사가 경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듯 화를 내는 로체스터 공작을 바라보며 그 옆에 서 있던 까미유가 말했다.

“전하, 이렇듯 이성을 잃으시면 될 일도 아니 되옵니다. 고정하시옵소서.”

로체스터 공작은 그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까미유 쪽으로 돌렸다. 마법사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로체스터 공작의 이 붉게 충혈된 눈은 분노 때문이 아니라 격심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이놈의 전쟁이 벌어진 후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책 회의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것이다. 잠을 못 잔 탓에 로체스터 공작의 심기는 그런 보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폭발하기 일보 직전에 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기름을 붓고는 불을 당겼으니 로체스터 공작이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내가 고정하게 됐어? 탄벤스 공국을 도와주라고 보내면서 꼭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어려운 주문을 한 것도 아니잖아? 상대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 슬쩍 후퇴하는 그것도 못 한다는 말이야? 그러면서 탄벤스 공국의 공왕까지 전사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본국의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병신 같은 놈들은 나를 탄핵해 올 것이 분명한데?”

“한 번 실수를 했다고 해서 뛰어난 부하를 죽일 수는 없사옵니다. 일단 사령관 직책의 해임과 동시에 본국으로 소환하시옵소서. 그런 다음 투옥해 놓고 나서 천천히 그의 처리를 궁리해 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최대한 억눌렀다. 까미유의 말대로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잘못을 가지고 부하를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좋아, 경의 의견대로 처리하기로 하지.”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래, 승리한 후 적의 동태는 어떤가?”

“그것이 이상하게 그 여세를 이용해서 몰아붙일 생각을 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퇴각했다고 하옵니다.”

“승리한 후에 국경을 넘어 퇴각했다고? 이런 괘씸한 놈들! 자기들만 대승을 거두고 후퇴하면 끝인 줄 알아? 당장 국경을 넘어 추격하여 놈들을 박살 내 버렷!”

“전하,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옵니다. 어제도 밤을 새우셨지 않사옵니까? 조금 쉬신 후에 다시금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붉게 충혈된 피로한 눈을 들어 까미유를 바라봤다.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탄벤스 공국에서 전쟁이 벌어진 후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국내외의 사정도 어려운 데다가 정적(政敵)들의 모략도 막아야 했고, 또 그들의 모략에 대응할 수단까지 짜내다 보니 무지막지하게 피로와 짜증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고 보냈던 부하가 자신의 믿음을 완전히 배신한 꼴을 연출했으니 그가 이성을 잃은 것도 당연했다.

“경의 말대로 조금 쉬는 것이 좋겠군. 두 시간만 자고 올 테니까 대응할 작전을 구상해 보게.”

“옛, 전하.”

방문을 나서면서 로체스터 공작은 투덜거렸다.

“젠장, 키에리가 존경스럽군. 어떻게 예전에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정적들까지 억눌렀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두 시간 후 로체스터 공작이 아직도 충혈된 눈으로 나타났을 때, 까미유는 결정된 사항을 보고했다.

“일단 기사단을 추가로 파병하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지금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적을 막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아마도 은십자 기사단에서 타이탄을 30대 정도 빼내서 보내 준다면 괜찮겠지요. 그리고 이쯤에서 크라레스와 협상을 통해서 서로 간에 끝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쓸데없이 변방에서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이유는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협상이라…….”

“옛, 녀석들도 이번에 대승을 챙겼으니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옵니다. 놈들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 중일 테니까요.”

“좋아, 그렇게 하지. 참, 기사단을 이용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협상을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전면 전쟁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놈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양보해 올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30대가 아니라 은십자 기사단 전부를 다 집어넣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무력시위는 규모가 클수록 효과 또한 크지 않겠사옵니까?”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좋아, 그건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지. 자네가 협상을 해 주겠나? 자네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군.”

“옛, 전하.”

“고맙네. 자네라면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까미유는 고개를 수그렸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 한 가지 일이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또 다른 일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탄벤스 공국은 들인 공에 비했을 때 정말 얻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뭔가를 확보해야만 했다. 탄벤스에서 잃어버린 타이탄의 보상은 받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만약 전쟁이 끝난다면 탄벤스 공국은 이제 주인 없는 나라가 되겠지? 공왕도 전사했고, 막대한 수의 군대와 뛰어난 장군들도 많이 죽어 버렸어. 이 기회에 본국이 탄벤스에 더욱 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향력을 확실하게 행사하시려면 다음 공왕을 우리 쪽 인물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전하.”

까미유의 의견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좋겠지. 다음 공왕은 누가 될 예정이지?”

로체스터 공작이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려서 질문을 하자, 레티안은 잠시 생각을 한 후 답했다.

“예, 여태껏 탄벤스 공국에서 공왕이 선출되었던 전례를 따져 본다면 다음 차례는 아크레니아 가문에서 공왕이 나올 것이옵니다.”

“으음…, 하지만 정식적으로 공왕이 선출된다면 이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가 힘들어. 탄벤스 공국의 경우 공왕이 되기 위해서는 30세가 넘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지 않던가? 그 정도 나이라면 자신의 주관이 벌써 정립되어 있는 나이니까 조종하기 힘들지. 어떻게 한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로체스터는 의자의 손잡이를 탁하고 치면서 말했다.

“참, 이번에 전사한 라미네르 그론티어 공왕에게는 혈족이 없나? 그놈을 왕위에 올린다면 명분도 설 것이고, 이용해 먹기도 편할 텐데 말이야.”

두 번째 질문에도 레티안은 곧이어 대답을 했다. 정말 엄청난 암기력이었다.

“예, 있사옵니다.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사온데, 그 장자(長子)의 나이는 이제 열세 살이 된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열세 살이라……. 이용하기에 꼭 좋은 나이로군. 안 그런가, 까미유?”

“그렇사옵니다, 전하.”

까미유도 찬성하는 것을 보며, 레티안은 방금 떠오른 계략을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전쟁 때문에 탄벤스 공국의 뛰어난 중신들도 많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탄벤스 공국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이번 전쟁에서 탄벤스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사옵니다. 이것을 기회로 탄벤스를 돕는다는 명목 하에 군대를 한 5개 사단쯤 파병하여 완전히 틀어쥐는 것이옵니다. 그런 다음 꼭두각시 왕을 한 명 세운 후 귀족들을 차례로 숙청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본국의 속국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레티안의 조언에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군. 그런 다음 그 어린 왕까지 없애 버린 후 아예 본국의 공국(公國)으로 편입시키면 아주 재미있어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다른 나라들의 비난을 사지 않을까? 동맹국을 집어삼켰다고 말이지.”

“그것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전하. 어린 왕을 세우고, 충신들을 차례차례 없애 나간다면 탄벤스는 머지않아 완전히 무법 지대가 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가 나중에 일거에 그들을 쓸어버리면서 전면에 나서는 것이옵니다. 그러면서 어린 공왕은 폐위시키고 누구 한 사람에게 권해서 두 번째 꼭두각시 공왕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 후 그 공왕을 협박해서 ‘짐은 혼자서 왕위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코린트의 품 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노라’하고 선언하게 만들면 되옵니다. 그놈에게 대공의 작위를 내린다면 그다음부터 탄벤스는 본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좋겠군. 그게 좋겠어. 탄벤스를 본국의 영토로 흡수할 수 있다면 이번의 실패를 만회하기에 충분하겠지. 입만 살아 있는 그놈들도 군소리를 하지는 못할 거야. 안 그런가?”

“그럴 것이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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