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화 (267/930)

루빈스키 대공은 까미유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회의 도중에 갑자기 뛰어 들어온 마법사가 종이쪽지를 전하자, 그것을 받아 든 까미유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표정은 한껏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상대가 받아 든 종이쪽지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기에, 냉철했던 기사가 저렇듯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뭔가 코린트에 큰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게 뭘까 궁리해 보는 루빈스키 대공이었다. 황제가 죽었을까? 아니면 로체스터 공작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것도 아니면…….

루빈스키 대공의 상념은 곧이어 끊어졌다. 까미유가 갑자기 불타는 듯한 분노에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올렸던 것이다.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까미유는 이가 갈리는 듯한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귀하가 이렇게도 비열한 인간인 줄 몰랐소. 어떻게 평화 협상을 하면서 감히 본국에 대해 기습할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젠장!”

까미유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고, 그와 함께 루빈스키 대공의 뒤에 도열해 서 있던 기사들이 그에 대응하여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까미유를 수행해 왔던 기사들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세 동작은 순차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동작이었다.

하지만 루빈스키 대공은 상대가 왜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는지 도저히 짐작을 할 수 없었기에, 차분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그 꾸밈없는 눈동자를 보며 까미유는 자신의 분노를 억눌렀다. 아무래도 루빈스키 대공은 그 비열하기 그지없는 기습 작전에 관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그의 다음 행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머뭇거리고 있는 상관을 마법사가 급히 막았다. 마법사는 이제야 겨우 상관을 막아설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만큼 서로 간에 검을 뽑아 드는 속도가 빨랐다.

“후작 각하, 참으셔야 합니다. 일단 전하의 지시대로 수도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자신을 말리는 마법사를 뒤로 밀치며 까미유는 그 종이쪽지를 든 채로 조금 앞으로 나와서는 종이쪽지를 손바닥에 붙인 채 책상을 힘껏 내리찍었다. 까미유의 손바닥에 가격당했을 뿐이었는데도 책상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눈동자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을 향해 까미유는 내뱉듯이 말했다.

“전쟁터에서 보자, 비열한 자식들!”

까미유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거칠게 문을 열고는 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 홀로 남겨진 루빈스키 대공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종이쪽지를 집어 올렸다. 한순간 엄청난 힘으로 내리찍던 까미유의 손바닥과 탁자의 사이에 위치했는데도 종이는 아주 말짱했다. 곧이어 루빈스키 대공의 손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루빈스키 대공은 떨리는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외쳤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라.”

투르넨 공작이 도착했을 때, 이미 그곳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후였다. 사방에서 거대한 타이탄들이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 힘과 기술을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패배해서 땅바닥에 자빠져 있는 타이탄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도착한 투르넨 후작의 시선에 제일 먼저 잡힌 것이 자신의 부하들을 간단하게 제압하고 있는 거대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는 거대한 방패와 검을 들고 간단하게 자신의 부하들을 그야말로 ‘때려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자마자 투르넨 후작의 머릿속에는 6년 전 악몽 같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고 있던 그 거대한 타이탄. 그때 그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집단군의 타이탄들이 괴멸당했다.

그리고 자신이 치욕적일 만큼 지독한 패배를 당하게 만든 주 원인은 그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청색 타이탄이었다. 그놈이 있었기에 서로 간에 밀고 밀리던 그 균형은 삽시간에 박살 나 버렸던 것이다.

“후퇴하랏!”

투르넨 후작은 있는 힘껏 마나를 끌어올려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저놈을 상대로 여기서, 이 전력으로 싸운다는 것은 6년 전의 실패를 다시 한 번 더 되풀이하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투르넨 후작은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내어 전장의 한가운데로 달려 나가면서도 계속 후퇴하라는 외침을 쉬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상대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는 상태에서 부하들이 상관의 명령을 이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자신을 도망치도록 놔 주지를 않기 때문이다.

“스바시에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루빈스키 대공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치솟아 오르는 분노로 인해 상기되어 있었다.

“오오, 먼 길에 수고했네. 그래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반갑게 맞이하는 자신을 향해 분노에 얼룩진 시선을 보내오는 루빈스키를 보고 황제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루빈스키는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서 종이쪽지를 그에게 들이밀며, 노기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게 정녕 사실이옵니까?”

루빈스키가 내미는 쪽지에는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탄벤스 공국에 주둔 중이던 파견 기사단에 대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는 보고가 적혀 있었다. 힐끗 그것을 본 후, 황제는 시선을 루빈스키의 눈동자로 다시 돌렸다.

“사실이라네. 코린트가 일거에 트루비아를 쓸어버리기 위해 기사단과 함께 군대를 탄벤스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후에 내린 결정이었지.”

루빈스키는 황제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는 없었기에 정말 사력을 다해 노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기습을 가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만약 적이 기습을 가해 온 후에 되받아 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집결시킨 병력이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어. 90대가 넘는 적의 기사단을 기습이 아니라면 어떻게 막을 건가? 코린트도 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꿍꿍이가 있기에 이쪽을 그렇게 탓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놈들도 이번에 본국의 힘이 어떤지를 느꼈을 테니, 이쪽에서 선후를 차근차근 따져서 교섭을 청한다면 응해 올 테지.”

“기습은 성공했사옵니까?”

“대승을 거뒀다는 보고를 들었네.”

“누가 지휘했사옵니까?”

“자네가 없었기에 치레아 대공에게 부탁했었네.”

황제의 말에 루빈스키는 골이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크를 보냈다면, 모르면 몰라도 상대방은 거의 치명타를 당했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어느 정도 타격을 당했다면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멸을 시켜놨다면 그 이후의 사태는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

키에리,

코린트는 자네가 필요하네

로체스터 공작은 깨어난 베르딘으로부터 제스터가 뒤늦게 정보를 줬다는 것과, 상대방의 기습 작전이 매우 갑자기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기랄…….”

베르딘이 건넨 특급 기밀 서류를 보고서야 로체스터 공작은 이번 기습 부대를 인솔한 놈이 ‘고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양이는 치레아 대공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그녀에게 벼룩처럼 달라붙어 감시하고 있는 제스터가 올린 보고이니 그건 확실했다.

“또다시 그녀가 전면에 나서서 지휘한다면 승산이 없어. 젠장!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로체스터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는 오른손 손가락으로 팔걸이의 윗면을 톡톡 두들기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보며 베르딘 등의 부하들은 그의 결정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제 전개가 어떻게 되느냐는 오직 상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주 지루하게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로체스터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들기는 톡톡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로체스터는 뭔가 결심을 한 듯 외쳤다.

“전 군에 전투 준비령을 내려라. 그리고 모든 기사단장들은 각자 자신의 부대를 점고하고 출전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드디어 로체스터 공작이 단안을 내렸기에 그의 방에 모여 있던 기사들과 장군들은 열기 가득한 표정으로 힘 있게 답했다.

“옛, 전하.”

“자, 모두들 빨리빨리 행동해.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누가 먼저 행동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로젠! 자네들은 나 좀 보세나.”

모두들 각자의 위치로 달려가고 나자 공작의 집무실에는 제임스와 그의 형인 로젠, 그리고 로체스터, 로체스터의 부관인 레티안만이 남았다.

“이제부터 자네들에게 어려운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 제임스!”

“옛, 전하.”

“경과 까미유 만큼 치레아 대공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거야. 그녀가 앞장서서 기사단을 지휘해서 공격해 온다면 도저히 당할 수가 없어. 이번 기습 공격도 그녀가 직접 지휘해서 쳐들어왔다. 아직 전투 결과에 대한 보고가 접수되지는 않았지만, 아예 연락이 불통인 것을 보면 상황은 안 봐도 뻔하다고 봐야겠지. 이번 상황을 보면 크라레스는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강공을 펼쳐 올 것이 틀림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본국은 어쩌면 멸망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공작이 크라레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점을 느낀 로젠이 끼어들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적기사까지 대량으로 보유한 코린트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했다. 그런데 왜 겨우 크라레스 따위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하, 그것은…….”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로젠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채고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아, 로젠! 자네는 그녀에 대해 잘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지만, 이건 사실이야. 도저히 코린트 혼자만의 힘으로 그녀를 이길 길은 없다.”

로체스터 공작의 말에 힌트를 얻은 제임스가 끼어들었다.

“전하, 하오면?”

“동맹국들을 불러 모아야 해. 하지만 지금 본국의 동맹국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국가들을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니 제임스 자네가 알카사스에 가 주겠나?”

“예? 알카사스에 말이옵니까?”

“그래, 자네는 그녀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그러니 그들을 열심히 설득한다면 어쩌면 좋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거야. 알카사스에 가면 국왕보다도 먼저 원로원부터 설득해라. 예로부터 알카사스의 모든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원로원이야.”

“예, 전하. 명심하겠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제임스에게 할 말을 다 했는지 시선을 로젠에게로 돌렸다.

“로젠 경.”

“옛, 전하.”

“경은 크루마로 가서 미네르바를 설득해라.”

“예? 하지만 크루마는 경쟁국이옵니다. 그들이 우리들을 도와줄 리가 없지 않사옵니까?”

“경은 치레아 경을 잘 모르지만, 미네르바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서로가 힘을 합쳐서 싸웠으니까 그건 당연하겠지. 경은 있는 사실만을 그녀에게 전해라. 크라레스는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해서 강공을 펼쳐 왔고, 그 결과 본국의 은십자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은 괴멸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3개 기사단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는 본국과 힘을 합쳐 저 새파란 신흥 강국을 때려잡을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코린트가 망한 후 홀로 남아 나중에 멸망할 것인지 그것만 물어봐. 그러면 나머지는 미네르바가 결정하겠지.”

“예, 전하.”

“그리고 나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제임스 경은 잠시 남아 있다가 까미유 경이 돌아오면 그에게 아르곤의 교황을 설득하라고 전하게. 알겠나?”

“예, 전하.”

“이만 가 보게나.”

로젠과 제임스가 밖으로 나간 후 로체스터는 레티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로체스터의 전속 마법사이자 부관이었고, 또 그의 친구들이 하나 둘 없어져 버린 지금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담자였다.

“레티안.”

“예, 전하.”

“그곳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해라.”

레티안은 공작의 지시에 약간 창백해진 표정으로 상관을 잠시 바라봤다. 그녀는 로체스터가 한 번씩 다녀오곤 하는 ‘그곳’이 어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 로체스터가 가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레티안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로체스터를 안내한 곳은 코린트 서부의 변방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법진을 이용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그 시골 마을의 가장 외곽에 외로이 서 있는 초라한 농가였다.

농가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작은 우리 속에는 아직 살이 오르지 않은 새끼 돼지 두 마리가 먹이통에 코를 박고 있었고, 농가의 옆에 있는 작은 밭에는 옥수수들이 푸르른 잎사귀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은 한 시골 장정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쪼개고 있는 것을 발견한 후 서슴없이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골 장정의 벗어부친 구릿빛 상체의 크고 작은 흉터들이 도끼질을 할 때마다 춤을 추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잠시만 기다리게. 얼마 남지 않았어.”

시골 장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 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도끼질 한 번에 장작이 어김없이 반듯하게 두 토막이 되어 쪼개져 나갔다. 그 시골 장정은 절대로 헛손질을 하는 법이 없었다. 한 번에 하나씩, 너무나도 규칙적인 몸놀림이었다. 이윽고 모든 장작을 다 쪼개 버린 그는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는 바로 6년 전에 모습을 감춰 버렸던 키에리 드 발렌시아드였다.

“죠드는?”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갔지. 아침 일찍 갔으니 아마도 두세 시간 후에는 돌아올 거야. 죠드에게 볼일이 있나?”

“아니, 자네한테 볼일이 있지.”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를 잠시 바라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힘이 필요해.”

공작의 말에 레티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공작이 지금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이 키에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전쟁터일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키에리는 타이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가 가지고 있는 헬 프로네는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 있는 타이탄이었기에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당장에 모두가 눈치 채게 될 것이 분명했다.

“껄껄…, 이제 코린트가 망하든 황제가 죽어 나자빠지든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늙은이를 놀리면 못쓴다네. 들어가지.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게.”

“크라레스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네. 크라레스는 초전부터 그 소녀를 전장에 투입했어. 그녀가 있는 한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제발 코린트를 위해 한 번만 더 검을 들어 주지 않겠나?”

“훗, 검을 놓은 지 벌써 6년이 흘렀어. 이제 검술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지 오래지. 내가 가도 도움이 안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이게 뭔 줄 아나?”

키에리는 선반 위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라페르야. 옛날 우리들이 여행하면서 즐겨 마셨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맛은 변함이 없더군.”

라페르는 코린트 서부와 발렌시아드 공국에서 생산되는 서민들을 위한 싸구려 술이었다. 풍요로운 스웨인 평야에서 재배되는 옥수수와 밀, 그리고 감자를 이용해서 생산되는 이 술은, 강렬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잔에 가득 부어 권하는 키에리를 바라보며 로체스터는 언제나 그러했듯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근심 없는 얼굴을 보았을 때 ‘어쩌면 키에리를 위해 이게 더 좋지 않을까’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우리 모두가 이룩했던 것이 이제 산산이 부서져 내리려고 하고 있네. 자네와 나, 그리고 리사와 그라세리안이 이룩했던 그 모든 것들이 말일세. 리사도 그라세리안도 자신이 이룩했던 것들이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그들이 이곳에서 살았던 그 작은 흔적이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가 아닐까?”

“훗, 자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자네가 뭐라고 해도 나는 여기에 있을 거야.”

“타이탄 때문에 그러나? 자네 정도의 인물이라면 헬 프로네 보고 1년만 기다려 달라고 청할 수도 있을 거야. 타이탄을 교체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헬 프로네를 버리게. 내가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자네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타이탄을 주겠어. 적기사급의 엑스시온을 넣었으니 헬 프로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내가 보증하지.”

로체스터는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비밀리에 제작한 초강력의 타이탄이 있었다. 그것은 일부러 적기사와 다른 형태로 만들어 놓았는데, 모든 이들이 그것이 코린트의 타이탄이 아니라고 생각하도록 코린트의 타이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들을 제거했다. 이것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단 한 대만이 만들어졌다. 그 타이탄은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며 발렌시아드 공국의 궁전 지하실에 잠들어 있었다.

키에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이탄 따위가 걸리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뭔가?”

“나는 여기서 6년을 보내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네. 권력의 덧없음과 허무함도 알 수 있었고, 돼지우리 같은 집 안에서 벼룩들과 함께 우글우글 부대끼며 살고 있는 농노들의 모습에서 자그마한 행복과 만족을 보았지. 내 나이가 어느덧 1백 세를 넘은 지가 오래야. 마누라도 오래전에 죽어 버렸고, 아들들은 그 나름대로 장성해서 자신들만의 이름을 쌓아 올리고 있지.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있겠나? 더 이상 세상사에 눈길을 돌린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야.”

“그래도…….”

“아닐세.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만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있으면서 깨달았지. 그제야 그라세리안이 우리들 곁을 떠난 것을 이해할 수 있겠더군. 그는 그때 벌써 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던 거야. 망할 녀석! 나한테도 좀 가르쳐 주고 떠날 일이지…….”

“설마…, 그라세리안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인가?”

고개를 끄덕이는 키에리를 보며, 로체스터는 뭔가 배신감 같기도 한 서운함을 느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자신에게는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았다니…….

로체스터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레티안은 진짜 배신감으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법사인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대마법사 그라세리안 드 코타스 공작이었을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가 국가의 중대사를 앞두고 자기 혼자 편하자고 은둔을 해 버리다니…….

“나한테까지 그런 것을 숨기다니 너무하는군.”

따지고 드는 로체스터를 향해 키에리는 어설픈 미소와 함께 변명을 늘어놨다.

“꼭 자네에게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네. 중간에 나도 한 번 찾아갔었어.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지. 그런 일로 한참 일하고 있는 자네에게 알려서 마음을 심란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 딴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내가 말하는 것은 자네가 새롭게 권력을 잡으라는 것은 아닐세. 조용히 이름을 숨기고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이야. 그런 후 전쟁이 종료되면 다시 떠나게나. 아마도 다시는 내가 자네에게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거야. 이번 한 번만 나를 도와주게.”

“쯧, 미련이 많은 놈이로군. 내가 그렇게 세상사에 미련이 없다고 말했건만…….”

“황제가 아닌 나를 도와 달라는 것일세. 자네의 오랜 친구에게 그런 작은 것도 못 들어주겠나? 넉넉잡고 세 달도 걸리지 않을 거야.”

한참 궁리하던 키에리는 이윽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좋아, 이번 한 번만이야.”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의 손을 굳게 잡았다.

“고맙네.”

진심 어린 친구의 태도에 키에리는 밝은 미소로만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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