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게 다 거치적거리는군
다음 날 새벽, 총사령관인 루빈스키 공작의 부재로 인해 작전 회의는 부총사령관인 다크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시에 의해 급히 소집된 고위급 기사들과 장군들을 쭉 훑어본 후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들을 소집한 것은 작전 따위나 의논하자고 부른 것이 아니다.”
거의 본 적도 없는 새파란 소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기에,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인물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아무도 나무랄 수 없었던 것은 사실상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감히 그녀를 향해 얼굴만 찌푸릴 뿐,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지닌 ‘공작’이라는 어마어마한 작위와 ‘부총사령관’이라는 직위 때문이었다.
“아그리오스 후작!”
“예, 전하.”
아그리오스 후작은 키메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크루마 제국에 파견 나가 있었지만, 그 배후가 크루마로 밝혀진 데다가 갑작스레 전쟁까지 벌어졌기에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을 포기하고 귀국해 있었다. 그는 전쟁이 벌어지면 자신에게 주어진 스바시에 기사단을 이끌고 싸워야 하는 최우선적인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은 기사단을 거느리고 알카사스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제6전대와 합류하라. 이후로 서쪽 국경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경에게 일임하겠다.”
“옛, 전하.”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출발하도록!”
“옛,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아그리오스 후작은 시원스럽게 대답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걸걸한 목소리로 답을 한 후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다시 자리에 앉는 아그리오스 후작을 빤히 바라보던 다크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경은 지금 뭘 기다리고 있나?”
“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출발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냥 앉아 있는 거야?”
“아닙니다, 전하.”
얼굴을 붉히며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는 아그리오스 후작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다크는 “멍청한 녀석!”이라고 중얼거린 후에 다시 시선을 젊은 기사들 쪽으로 돌렸다.
“쟈므란 경!”
“옛, 전하.”
“경은 기사단을 이끌고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을 도와라. 이후로 동쪽 국경에서 벌어지는 모든 작전에 대한 지휘권은 크로아 후작에게 위임한다.”
다크의 명령에 쟈므란 백작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전하, 하지만…….”
“뭐냐?”
“제 휘하의 기사단은 전쟁 초기부터 접전을 거쳤기에 많이 소모된 상태이옵니다. 그 점을 참고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쟈므란의 말에 다크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무표정하게 표정 관리를 한 다음 재빨리 주위를 훑어봤다. 주위에 앉아 있는 장군이나 기사들은 부총사령관인 그녀가 그런 기초적인 것들도 모르고 있다는 것에 한심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크는 될 수 있으면 표정을 변화하지 않고 다시 쟈므란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런가? 지금 타이탄은 몇 대나 남아 있나?”
“옛, 여덟 대이옵니다.”
“음, 그런가? 그렇지, 피해를 당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군. 론가르트 단장!”
다크의 호명에 근위 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는 즉시 답했다.
“옛, 전하.”
“현재 본국의 전력에 대해 그대가 간단하게 설명해 주게.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장군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다크의 말에 장군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작 자신이 몰라서 물어보는 주제에 남에게 덮어씌우는 그 철면피한을 비웃는 것이었다.
“옛, 제1, 2전대는 아르곤의 침략군을 상대로 분전 중입니다. 그리고 제6전대는 알카사스의 침략군을 상대로 싸우는 중입니다. 양쪽 다 힘든 전투를 치르고 있기에 원군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린트의 국경에 주둔 중이던 제3, 4전대는 코린트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습니다. 또 제7, 8전대의 경우 전쟁 초기 탄벤스 작전 때 상당히 소모된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본국이 보유한 여유 전력은 제5전대, 근위 기사단, 스바시에 기사단, 치레아 기사단이 전부인 실정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기로 하지. 제3, 4전대의 잔여 세력과 제7, 8전대를 합치는 것이 좋겠군. 그것을 제7전대로 이름 붙이고 쟈므란 경이 맡아 주게. 그리고 라테민 경은 부전대장의 직책을 주겠네. 서로 잘해 보도록!”
그녀의 말에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옛, 전하.”
“쟈므란 경은 제7전대를 거느리고 크로아 후작에게 신고하라. 이후, 그의 지휘를 받으면 될 것이다.”
“옛, 전하.”
“지금 즉시 출발하도록!”
상관의 단 한마디 명령에 둘 다 전대장이었다가 한 명은 전대장, 또 한 명은 부전대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일단 상관이 확정적으로 내린 명령이었기에 그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쟈므란 백작과 라테민 백작은 즉시 일어서며 주위에 인사를 보낸 후 서둘러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한 늙은 장군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전하, 안 그래도 본국의 기사단 전력은 매우 약화된 상태이옵니다. 그런데 또다시 수도에 남아 있는 기사단을 분산시킨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모험이옵니다. 거기에다가 오늘 아침에 크루마가 본국의 동맹국인 미란을 기습했다고 하옵니다. 그에 대한 대비도…….”
다크는 그 노장군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 줄 만한 값어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간단하게 말을 끊어 버리며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하라. 내가 처음에도 말했듯이 경들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 아니다. 알겠는가?”
다크는 불만이 가득한 장군들의 얼굴을 쭉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론가르트 단장!”
“옛, 전하.”
“치레아 기사단을 제외한 수도에 남아 있는 모든 전력을 경에게 주겠다. 경은 그들을 이용하여 수도 방어에 만전을 기하라. 소소한 일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으니 사소한 것은 경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치레아 기사단을 제외한다면 남은 타이탄 전력은 근위 기사단과 제5전대뿐이었지만, 상관이 이렇게 말하고 보니 꽤 많은 병력이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프로이엔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옛, 전하.”
“치레아 기사단에는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도록 일러 놨다. 이제 본국의 기사단 전력이 존재하는 곳은 세 곳으로 한정되었다. 동쪽이나 서쪽에서 지원 요청이 온다면 내가 직접 치레아 기사단을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갈 생각이다. 그러니 요청이 오는 즉시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마법사들은 준비 태세를 유지해 주기 바란다.”
여기까지 말한 다크는 장군들을 쭉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장군들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기사단들을 도와줄 것을 명한다. 하지만 적의 군대와의 접전은 가능한 한 피하도록 하라.”
“예.”
장군들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배여 있었지만 다크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마쳤다.
“토지에르 경이 부재중이기에 힘들겠지만, 마법사들은 타이탄의 재생산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그리고 본국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적들에 비해서 매우 소규모다. 그 적은 병력으로 세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우세한 적들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은 공간 이동 마법을 십분 활용한 기사단의 운용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니 마법사들은 기사단의 요청이 있을 때 그것을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유지하도록 하라.”
다크의 말에 긴 탁자의 뒤편에 앉아 있던 네 명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역시 전쟁은 기사가 하는 것이지만, 마법사가 없다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부총사령관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예, 전하.”
“자자, 모두들 돌아가서 맡은 바 임무를 처리하라.”
이제 대충하고 회의를 끝낼 생각이었는지 다크는 그렇게 말했지만, 회의 도중에 말을 건넸던 그 장군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다시 따지고 들었다.
“전하, 미란의 처리에 대해서도 하명을 해 주시옵소서. 지금…….”
“경은 본국에 미란을 도울 여력이 있다고 나에게 말하는 것인가?”
“예? 하지만 미란은 과거 본국에 많은 원군을 파병해 주었사옵니다. 그런 그들을 외면한다는 것은…….”
“젠장, 별게 다 거치적거리는군. 좋다, 본국에는 여분의 기사단이라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야. 경이라면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나?”
“예, 전하의 말씀대로이옵니다. 미란을 향해 정면 침공을 개시하고 있는 크루마의 군세를 막아 내려면 기사단 한두 개 정도 파병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또 본국에 그 정도의 여유 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씀이옵니다. 제 의견은 미란에 기사단을 파병해서 크루마를 물리치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적이 원체 강한 만큼 사방에서 압박한다면 미란의 왕족 및 그 측근들조차도 국외로 탈출하기 힘들 것이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니, 본국에서는 그들이 탈출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준다면 미란에 대한 의리는 지키는 것이 될 것이옵니다. 또 그 정도를 시행하는 데는 1개 기사단이면 충분하옵니다.”
“좋아, 그건 별로 어렵지 않겠군. 파견했던 기사단이 장시간 미란에 묶이는 것도 아니고, 또 적들과 정면 대결을 할 필요도 없겠군. 안 그런가?”
“예, 하지만 일단 파병하실 결심이시라면 최대한 빨리 보내야 할 것이옵니다. 크루마의 기사단을 막기에 미란의 기사단은 턱도 없이 약하니까 말이옵니다. 빨리 기사단을 파병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좋아, 가만있어라……. 지금 당장 보낼 수 있는 기사단이라면 맞아, 그게 있었지. 카슬레이 경!”
“옛, 전하.”
다크가 카슬레이 백작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제의 실패로 인해 열 받아 있던 다크의 명령으로 치레아 기사단은 그때부터 계속 출동 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적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함과 동시에 다크가 그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만 하면 바로 목적지로 공간 이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가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기사단들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출동을 하기 위한 아무런 준비도 갖춰 놓지 않았기에, 인원을 점검하고 보급품을 갖추고 마법사를 할당받고 하다 보면 보통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경은 기사단을 이끌고 미란의 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라. 준비는 갖춰져 있을 테니 지금 당장 출발하라.”
“옛, 전하.”
카슬레이 백작이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간 후 다크는 아름다운 금발을 단정하게 기르고 있는 젊은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제5전대장이었다.
“래리츠 경.”
“옛, 전하.”
“치레아 기사단이 돌아올 때까지 경의 기사단이 그 대역을 해 줘야겠어. 경의 기사단이 출동 대기 태세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지?”
래리츠 백작은 잠시 생각해 본 후 신중하게 대답했다. 일단 자신들의 부하들을 끌어 모아야 하고, 또 단독 작전을 위해서 식량 따위의 보급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과 병행하여 마법사들에게 이동 마법진 구축도 지시해 두어야 한다.
“옛, 30분은 걸리옵니다. 딴 것은 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마법진에 소요되는 시간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30분 동안은 발이 묶이게 되는군. 좋아, 될 수 있다면 빨리 준비를 끝마치도록 하게.”
“옛,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