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76/930)

레드 이글과 콘도르, 2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알카사스군은 천천히 크라레스의 중심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카사스군의 본대에는 여러 대의 마차들이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마차 안에는 마법 통신을 위한 설비와 함께 마법사들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방에 부챗살처럼 퍼져서 이동하는 정찰조들과 각 기사단에 다섯 명씩 배정되어 있는 용기사들에게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가 취합(聚合)되어 사령관과 작전관에게로 전달되는 것이다.

알카사스의 경우 와이번에 용기사 외에도 마법사를 태운다. 물론 빠른 연락을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된다. 아무리 와이번이 크다고 해도 그 위에 만들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좁았고, 거기에는 도저히 통신용 마법진을 그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와이번에 탑승하는 마법사는 수정구만 가지고도 통신이 가능한 실력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타국의 경우 우수한 마법사들을 그런 통신용으로 할당할 처지가 못 되기에, 마법사들을 와이번에 태우면 얼마나 유용한지를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 옆에서 말을 몰며 나란히 가고 있던 전령들 중의 한 명이 마차 안에서 건네지는 종이를 움켜쥔 후 급히 사령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다.

“제라린성으로 간 용기사에게서 연락입니다, 각하.”

미구엘 후작은 전령에게서 종이를 낚아챈 후 급히 읽었다. 하지만 정보는 그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적들의 방어 거점이 되어야 할 제라린성이 이토록 조용하다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왜 그러십니까? 각하.”

“제라린성 쪽은 아주 조용하다는군. 뚜렷한 전투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래도 크라레스의 방어 거점이 제라린성이 아니라 딴 곳이 아닐까?”

“제라린성이 확실합니다, 각하. 이곳 전선에서 패퇴한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거기 외에 더 적합한 곳은 없습니다. 그 정도 거리쯤 떨어져야 방어선을 새로이 구축할 만한 시간 여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유를 모르겠군.”

이때 두 번째 전령이 달려와서 쪽지를 전달했다.

“본국으로부터 긴급 정보입니다.”

“줘 보게.”

확 낚아채서 쪽지를 읽어 보던 미구엘 후작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 챈 라이넨 후작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십니까? 각하.”

“스바시에 기사단이 이쪽으로 왔다는 정보일세. 코린트 쪽에서 흘러 들어온 정보인데, 거의 정확할 것이라는 예측일세.”

“스바시에 기사단이라면, 그 쥬리앙 후작이 이끄는 기사단 말입니까?”

“그렇네. 본국의 정보로는 근위 기사단 다음 가는 정예 부대로 추정되고 있다네. 타이탄이 20대밖에 안 되는 소규모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야. 거기에다가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이라면 대단히 뛰어난 지략가야.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퇴하세.”

“예?”

“우리들은 이 일대 지리를 잘 몰라. 적들은 전투력이 뛰어난 소규모 기사단이다. 그렇다면 놈들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쓸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황에서 더욱 깊게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후퇴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습니까?”

“아니, 후퇴하는 것이 좋겠네. 괜히 무리해서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야. 어차피 녀석들은 이곳 전선에 스바시에 기사단 같은 강력한 전력을 오랜 시간 박아 둘 수 없는 처지야. 며칠 지나지 않아 코린트 쪽으로 이동해야만 하겠지. 안 그런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후퇴하기로 하세. 괜히 피를 흘려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네.”

“알겠습니다, 부하들에게 지시하겠습니다.”

인간의 대역을 맡은 골드 드래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미카엘의 물음에 다크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언제까지나 녀석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어제저녁, 다크는 아르티어스를 불러다가 자신의 대역을 부탁한 후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들인 팔시온, 미카엘, 미디아, 가스톤만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와 있는 상태였다. 아르티어스는 오랜 시간 다크와 함께 지냈기에, 다크의 습관이나 행동거지, 말투 따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다크의 대역을 하는 한 들통 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다크는 안심하고 대역을 맡기고는 이렇듯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에구구, 허리야. 오랜만에 말을 탔더니 허리가 쑤시는군. 승마를 오래 하는 것은 나같이 고귀한 분께는 조금 무리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주물러 대며 투덜거리는 미카엘을 보며 미디아가 곱지 못한 시선을 보냈다.

“헛소리하지 마. 눈은 안 그런데 입으로만 투덜거리고 있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건 그렇고 어디로 갈 거야?”

미디아의 물음에 다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코린트의 영내로 들어섰으니 그 뒤는 당연한 것 아니겠어?”

“어떻게?”

“일단 놈들의 집결지를 찾아낸 후 박살 내는 거야. 그만큼 당했으면 갚아 주는 것이 도리지.”

“겨우 우리들만으로?”

“그거야 붙어 보면 알겠지. ‘겨우’인지 ‘씩이나’인지…….”

상대의 대답에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미디아는 선결 조건부터 말했다. 다크의 말대로 붙어 보면 알겠지만, 어디 있는 줄 알아야 붙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디에 집결해 있는 줄 알고…….”

그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크가 말했다.

“헤헤헷, 그거야 다 알아내는 수가 있지. 어젯밤에 열심히 궁리해서 방법을 다 생각해 뒀어.”

“어떻게?”

미디아의 물음에 다크는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신의 의견이 곧 진리라도 되는 듯 말이다.

“내가 찾아낼 수 없으면 놈들이 나를 찾아오게 하라. 그게 그 방법이지.”

“그렇다면…….”

“근처에 어디 큼직한 요새나 성이 있으면 그걸 박살 내는 거야. 그러면 놈들이 상부에 지원을 요청할 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 아니겠어?”

다크의 말이 지니고 있는 허점을 생각하며 팔시온이 눈이 둥그레져가지고 외쳤다.

“억수로 많이 몰려오면 어쩔 거야? 우리는 겨우 네 명밖에 안 되는데.”

“언제는 그런 거 생각하면서 싸웠냐? 자, 가자구.”

태평스레 말을 마친 후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는 다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시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미치겠군. 이런 식이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야.”

매우 튼튼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문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경비병은 근위 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이 나타나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론가르트는 즉시 그 인사를 받아 준 후 그들의 앞에 섰다. 그는 통과해서 지나갈 생각이 아니라, 이 방 안에 있는 사람과 만나려고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전하께 만나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게.”

“옛!”

경비병은 낮게 대답한 후, 즉시 문 뒤쪽에서도 충분히 들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전하, 근위 기사단장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라고 해라.”

“옛.”

문 앞에 서 있던 두 명의 경비병들은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두터운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이곳은 며칠 전만 해도 이름만 있을 뿐, 경비병 한 명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빈 방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 있어야 할 부총사령관은 루빈스키 대공과 달리 황궁보다는 자신의 공국을 더 좋아했기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 앉게나. 지금 한잔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차 한잔하겠나?”

“영광이옵니다, 전하.”

그렇게 크지 않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론가르트가 자리에 앉자, 다크는 시선을 집무실의 한쪽 구석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문 쪽으로 돌리며 외쳤다.

“세린! 차를 가져와라.”

“예, 주인님.”

문 안쪽에서 가녀린 음성이 대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끓여진 차를 가지고 묘인족 소녀가 나타났다. 론가르트는 그 묘인족 소녀가 치레아 대공의 전속 하녀인 세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녀와 안면도 좀 있었기에 탁자에 찻잔을 조심스런 손길로 올려놓고 있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보내 줬다.

세린이 돌아간 후 론가르트는 그녀가 올려놓은 차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를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론가르트는 뭔가 이상함을 직감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낌과 동시에 찻잔을 잡은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었다. 오른손은 찻잔을 잡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왼손으로 잔을 들어 차를 조금씩 마시면서, 그의 오른손은 조금씩 조금씩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허리에 매여 있는 검을 향해 슬그머니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론가르트 단장, 경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의논할 것이 있기 때문이야.”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며 상대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론가르트가 알고 있는 한 다크 폰 치레아 공작은 선머슴 그 자체였다. 론가르트가 근위 기사단장이었기에 부총사령관인 그녀와는 차를 마실 기회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 마시는 예의는 거의 낙제점 수준이었다. 그렇던 그녀가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오랜 시간 몸에 밴 것 같은 우아한 동작을 몸에 지니게 될 가능성은 갑자기 토끼 머리에 뿔이 솟아오를 가능성보다도 훨씬 어렵다는 것은 뻔한 사실.

하지만 그녀가 몇 달 정도 보지 못한 사이 예의를 몸에 익혔을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기는 했지만 조금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말투라든지 뭐 그런 것은 매우 다크와 유사했다. 그렇기에 론가르트는 짧은 시간이지만 심도 있게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진짜 치레아 대공 전하라면 소드 마스터를 넘어선 경지. 자신의 공격을 분명히 피해 낼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짜라면 자신의 검에 여지없이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자 론가르트의 오른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슉!”

론가르트의 검이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의 검은 상대의 목을 꿰뚫지 못했다. 뭔가 벽에 부딪친 듯 시퍼런 불꽃만을 뿜어내며 튕겨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론가르트의 몸은 뭔가 엄청난 힘에 의해 뒤로 튕겨 나갔다. 콰당 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벽에 금이 갈 정도로 부딪친 후 바닥에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나뒹굴기는 했지만, 론가르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검을 꼭 쥔 상태였다.

‘진짜인가?’

만약 상관이 재미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친 것이라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론가르트로서는 정말 가까스로 비명을 참고 있을 정도로 온몸이 쑤셔 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집무실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경비병들이 뛰어 들어왔다. 찻잔이 박살 난 채 뒹굴고 있고, 면회하러 들어갔던 론가르트 백작은 검을 뽑아 든 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한쪽에서 뒹굴고 있었다. 경비병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는 창가로 달려갔다. 그들로서는 론가르트가 공작을 시해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창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고는 다크를 향해 공손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전하.”

하지만 다크는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잠시 장난을 친 것뿐이다. 나가 보도록!”

“옛, 전하.”

상관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그들은 재빨리 밖으로 나가 버렸다. 경비병들이 나가고 나자 소녀는 그 귀여운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흐흐흐, 눈치가 아주 빠른 녀석이로군.”

억지로 몸을 추스르며 일어서고 있던 론가르트는 상대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자신의 처음 짐작이 정확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상대는 자신이 기습 공격을 가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실력자였다. 론가르트는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래도 자신은 황제 폐하께 실력을 인정받아 근위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는 신분이었다. 그런 자신이 적국의 자객 따위에게 설혹 곧장 목숨이 날아간다고 해도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리가 조금 전의 충격 때문에 후들거리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부러 침착하게 가장하며, 자신이 낼 수 있는 한 최대한 당당하게 상대에게 외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떨리고 있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나? 나는 누구일까? 아주 재미있는 문제 아닌가?”

비장하기까지 한 론가르트의 질문에 상대는 장난기 어린 대답을 해 왔다. 비웃듯 미소를 지으면서 여유롭게 말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자신 따위는 아예 신경 쓸 만한 가치조차도 없다는 것 같았다.

‘나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가? 하기야 내 기습을 막아 낸 것만 봐도 보통 실력은 아니야. 아마도 마법사인 것 같은데……. 나에게 아직도 일격을 가하지 않고 시간을 주는 것을 보면, 내가 아무리 소란을 떨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근처에는 어느새 소리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도록 뭔가 마법이라도 걸어 놨다는 것이겠지.’

론가르트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느라 아무런 말이 없자 상대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걸 알려 주려고 불러 들였는데, 벌써 눈치 채고 검을 뽑아 들다니……. 아들 녀석은 생각 외로 좋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군.”

“예? 그, 그렇다면…….”

그 순간 상대는 몸은 그대로 유지한 채, 머리만 슬쩍 아르티어스의 것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것을 보고 론가르트는 등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괴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매우 괴기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들어 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르티어스라고 하지. 아들 녀석의 부탁 때문에 잠시 대역을 하고 있는 중이야. 자, 일어서서 여기에 앉게나. 나였으니까 망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아들 녀석이 세워 놓은 소중한 대역의 목이 떨어질 뻔했어.”

상대의 말에 론가르트는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가공할 만한 실력을 지닌 상대는 적국의 자객이 아니라 아군이었던 것이다. 론가르트는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여, 검을 검집에 꽂아 넣은 후 뒤집어져 있는 의자를 바로하고 앉았다. 이제야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다크 같은 강자를 누가 감히 흔적도 없이 해치우고 대역을 할 수 있겠는가? 또 황제나 토지에르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아버지는 골드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그 드래곤은 강력한 마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어떤 형태로든 변화시킬 수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르티어스 님.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르티어스라면 공작 전하의 아버지였기에 론가르트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아니, 실례한 것은 아니야. 자네의 그 빠른 눈치에 감탄했을 뿐이지. 그건 그렇고 용건을 말하겠다. 나는 아들 녀석의 대역은 할 수 있지만 전쟁터에서까지 대역을 할 생각은 없어. 또 그것을 아들도 잘 알고 있고 말이지. 그래서 전쟁터에서의 대역은 자네가 대신 해 줘야겠어.”

“예?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나는 타이탄을 조종해 본 적도 없고, 또 내 타이탄도 없어. 그러니까 자네의 타이탄에다가 아들 녀석 타이탄의 문장을 그리란 말이야. 그리고 치레아 대공이 타이탄을 써야 할 때가 되면 나 대신 자네가 나가면 되는 거야.”

“하, 하지만 전하와 저는 실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면서 론가르트가 항변했지만, 아르티어스는 매우 느긋하게 대답했다. 벌써 그것까지 다 생각해 뒀던 것이다.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자네가 타이탄을 타고 나가서는 슬쩍 허세만 부려도 적들은 꼬리가 빠지게 도망칠 테니까 말이야. 아들 녀석 말로는 상대국의 윗녀석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력을 다 알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당연히 허세가 먹혀 들어갈 거라구.”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의견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있었다. 다행히 적들이 겁먹고 도망친다면 모르지만, 단 한 명이라도 덤벼든다면 론가르트의 실력이 그대로 들통 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싸우면 되지, 당연한 걸 가지고 왜 물어? 내가 대신 싸워 주리?”

마법으로 도와주겠다든지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적이 덤비면 너 혼자 싸우다가 죽어 버리라는 이 아르티어스 옹의 기가 막힌 대답. 어찌 보면 무책임하기까지도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 옹에게 있어서 이따위 제국이 망하든 흥하든 그건 아무런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더더욱 론가르트의 생사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양아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아들의 일만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속편한 소리만 하는 아르티어스 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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