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위 기사단장인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후, 얼마 있지 않아 기사 한 명이 급히 와서는 시급한 일이라며, 점잔을 빼고 앉아 있는 아르티어스 옹에게 보고를 했다.
“알카사스에서 사신이 도착했다고?”
“옛, 전하. 비밀리에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래에? 좋아, 이리로 오라고 일러라.”
“옛, 전하.”
잠시 후 알카사스의 사신이 도착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협상을 할 상대가 너무나도 어린 여자 아이라는 것에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상대는 나이나 생김새야 어떻든 간에 ‘전하’라고 불리는 적국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권한 또한 지니고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 상대가 만만하게 보인다는 것이 그에게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협상할 때 상대가 노련한 인물인 것이 더 문제지.
“안녕하십니까, 전하. 저는 에리카 트로이아라고 합니다. 크라레스 제국의 뛰어난 기사이신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상대가 입에 발린 칭찬을 해 대기 시작하자 아르티어스는 손을 휘저어 그것을 막은 후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본관을 찾아 온 이유는 뭔가?”
‘급하기도 하군.’
트로이아는 눈앞의 이 풋내 나는 소녀를 속으로 비웃으면서 천천히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원래가 노련한 외교관일수록 능구렁이가 다 되어서 자신의 뱃속은 감추면서 급할 것 없다는 듯 천천히 이끌어 가는 것이 상식이었기에, 트로이아는 이제 더욱 상대를 얕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코린트와 크라레스는 쌍코피가 터지게 싸울 것이다. 물론 알카사스도 거기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알카사스의 원로원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크라레스가 제공해 줄 마음이 있다면 이 전쟁에서 손을 떼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다. 어제의 전쟁에서 크라레스가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타이탄이야 어떻게 수리하거나 재생산하면 되겠지만, 전사한 기사들을 되살릴 길은 없었다. 기사의 수가 적은 알카사스로서는 가급적이면 이번 전쟁에서 피해를 줄이기를 원했다.
상업 국가인 알카사스의 상인 기질도 아주 크게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파견된 트로이아는 만만해 보이는 소녀를 슬며시 바라보며 이번 협상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예, 우선 본론을 말하기에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소녀의 표정을 한번 주의 깊게 살핀 후 말을 이었다.
“귀국은 지금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코린트가 대병을 앞세우고 압력을 가해 오고 있지요. 정보에 따르면 벌써 귀국의 2개 전대가 전멸을 당했고, 수도까지 적이 난입해 들어와서 곤경을 치르셨다고 하니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리고 동쪽에서는 막강한 아르곤 제국이 침공해 들어와서 매우 곤란을 겪고 계시고요. 또 서쪽에는…….”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항복하라는 것이냐?”
상대를 깔보는 듯한, 어떻게 보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소녀가 퉁명스레 말을 끊어 오자 트로이아는 상대의 무례함에 혓바닥을 찰 뻔했다.
물론 외교관들끼리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말을 가로막는 경우는 허다했다. 하지만 이렇듯 노골적으로 대화를 끊어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거기에다가 지금은 크라레스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이런데도 이렇듯 고자세를 유지하다니. 도대체가 저 계집애는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닙니다. 본국이 귀국을 침공한 것은 코린트의 압력도 있었지만 한 가지 오랜 숙원(宿願)을 해결하려는 것도 있지요. 본국은 저 머나먼 서쪽의 건조한 초원에서부터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 왔습니다. 동쪽의 그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는 도중에 본국은 마법을 이용하여 기후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전 영토가 비옥하고 풍요롭게 변화했습니다. 그렇기에 본국이 영토를 확장해 오던 첫 번째 목표는 이제 사라졌다고 봐도 상관이 없죠. 그러던 와중에 두 번째 목표가 생겼습니다.”
트로이아는 소녀가 지겨운지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 말을 잠시 끊었다.
“본국은 상업 국가라고 불릴 만큼 예로부터 상업을 장려해 왔습니다. 물론 국토가 비옥하지 못해서 생산력이 떨어지다 보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만약 개국 초부터 상업에 의존해서 국력을 키워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마도 왕국으로 발전하기도 전에 본국은 멸망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마법을 이용해서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어 토지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높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본국에 있어서 상업이 가지는 그 중요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본국에서 남아도는 엄청난 잉여 생산물들을 타국에 수출하고, 또 본국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들을 수입하며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력을 더욱 더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로를 통해 대량의 화물을 옮기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다는 것이지요. 또 거기에 귀국과 같이 중개 무역을 하는 나라가 끼어들기라도 한다면 본국의 몫이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트로이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대의 속셈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지겨운 말을 듣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구가 필요하다는 말이로군. 대량의 화물을 취급할 수 있는 커다란 항구가 말이야. 장황한 자네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스바시에 서쪽 귀퉁이의 항구가 포함된 땅덩어리를 떼어 준다면, 귀국의 군대를 철수시키겠다. 이거겠지?”
“그, 그건…….”
소녀가 너무나도 정확하게 이쪽의 속셈을 짚어 내어 말했기에 트로이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에 소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놀고 있군. 그따위 협박을 한다고 해서 이쪽에서 ‘그러십니까?’하고 땅덩이를 떼어 줄 거라 생각했냐?”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이쪽에서도 생각이 있습니다.”
트로이아는 성질이 발끈 치미는 것을 느껴야 했지만, 일단은 노련한 외교관답게 상대에게 이쪽의 제안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약간의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소녀의 반응은 트로이아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으헤헤헷, 좋아, 좋아. 당연히 이렇게 나오는 것이 재미있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상대의 의외의 반응에 트로이아는 기가 막혔지만 이왕에 갈 데까지 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불리한 것은 알카사스가 아니라 강력한 세 개의 제국과 고독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크라레스였으니까 조금 위협을 하면 통할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1개 기사단을 더 투입하여 우리 쪽에서 원하는 것을 뺏어 내면 되겠지요.”
“겨우 1개 기사단만으로 될까? 기왕에 하는 김에 모두 다 투입하는 것은 어때? 듣기에 알카사스는 5개의 기사단을 가지고 있다면서? 합계 250대면 꽤 재미있는 한판 승부가 되지 않을까?”
“정말 말이 안 통하시는군요!”
“그걸 이제 알았냐? 멍청한 자식! 여봐랏!”
아르티어스의 부름에 밖에서 중무장한 경비병 두 명이 들어오며 외쳤다.
“옛, 전하.”
갑자기 경비병들을 불러들이는 소녀 때문에 트로이아의 안색은 새파랗게 굳어졌다. 그런 트로이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무자비하게 말했다.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도록!”
“옛, 전하.”
트로이아는 경비병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면서 악을 썼다.
“전하, 외교 사절에게 이러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흐헤헤헤헷, 헛소리하고 있군. 내가 된다면 되는 거야. 사신을 죽이지만 않으면 별 탈 없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상식이라구.”
“놀랍게도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그런가? 트로이아 경은 어디 가고 자네가 왔는가?”
“예, 지금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치료? 무슨 일이 있었나?”
“예, 아주 잘 다져서 보냈더군요.”
“다져?”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의장을 향해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사죄를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의장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했다.
“죄송합니다. 흠씬 두들겨 팼다는 말입니다. 후작의 호위병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설 힘도 없을 정도로 늘어져 있는 그를 부축해서 마법진을 통해 돌아왔으니까 말입니다. 사신을 그렇게 대하다니……. 정말 상식과 교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뢰배들입니다.”
“흐음, 크라레스의 반응이 이상하군. 본격적으로 본국과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는 그냥 항구 하나 양보하고 끝내는 것이 좋을 텐데 말이야. 3국에서 크라레스에 전쟁을 건 이상 크라레스로서도 이쪽에서 손떼 준다면 땅덩어리 하나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훨씬 더 이익이 아닐까? 거기에다가 이쪽의 사신을 그 모양으로 만들면서 우리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보면, 뭔가 믿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안 그런가?”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현재 코린트의 행동을 봤을 때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린트의 기사단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군대는 아직도 국경을 넘지 않고 있습니다. 점령지를 확보하려면 군대를 투입해야만 하는데도 말이지요. 이건 흡사 기동력이 좋은 기사단만을 사용하여 크라레스의 군대나 기사단에 조금씩의 타격을 주고 뒤로 빠지는 게릴라전을 감행하는 듯이 보이고 있어요. 이건 대단히 강력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써먹는 전법이 아닙니까?”
“글쎄,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미리 짐작하여 설전을 벌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코린트에서는 군대를 언제 투입할 것인지 알아 보게.”
“예, 의장님.”
“그리고 코린트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오늘 새벽 크라레스는 스바시에 기사단을 6전대와 합류시켰다고 한다. 이로서 크라레스 서부전선 사령관은 아그리오스 후작이 되겠지. 아마도 힘든 싸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오늘 새벽에 콘도르 기사단을 그쪽에 보낸 것이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군요.”
“나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저쪽은 모두 합쳐서 60대도 안 돼. 이쪽은 1백 대나 되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인가?”
“그래도… 옛날부터 크라레스 기사들의 용맹성은 소문이 난 것이기에 약간은 우려가 되는군요.”
“아,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크라레스의 최고 정예 기사단은 근위 기사단과 치레아, 스바시에 기사단이야.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이 크라레스의 수도에까지 진입해 들어가서 격전을 벌였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놈들은 스바시에 기사단을 그렇게 오랫동안 이쪽 전선에 놔둘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만 잘 버티면 되는 거야.”
“예, 의장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의장님의 뜻을 클레멘스 후작에게 전하겠습니다. 가장 노련한 지휘관이니만큼 잘해 낼 것입니다.”
“그래야 하겠지.”
벼룩의 보고에 따르면…
“저기로 하자.”
여기저기를 한참 돌아다니다가 다크가 지목한 곳은 3킬로미터 정도나 떨어져 있는데도 엄청난 덩치로 압박해 오는 거대한 성이었다.
그 덕분에 다크의 손을 따라가던 팔시온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지고야 말았다.
“뭐, 뭐……. 저 큰 성을 공격하자고? 타이탄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겨우 네 명이서?”
팔시온의 의견에 미카엘도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맞아, 저건 너무 커. 딴 거로 고르자구. 여태까지 지나오면서 요새를 두 개 정도 봤잖아? 그 정도가 알맞다구.”
“한 번 정했으면 그걸로 밀어붙이는 거야. 척 봐도 많이들 있을 것 같잖아.”
찬란한 황금빛을 뿜어내며 드라쿤이 공간을 가르고 튀어나오는 것을 힐끗 보고 다크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타이탄은 집어넣어. 여기서 타이탄을 꺼내면 놈들은 결코 안온다구.”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어쩌기는……. 이렇게 하지.”
다크는 자신의 짧은 검을 쭉 뽑아 들었다. 황금빛이 나는 검신의 끝이 성을 향하게 되었을 때 다크는 짤막하게 외쳤다.
“헬 파이어(Hell Fire)!”
그와 동시에 검에서 진홍색의 거대한 화염 덩어리가 무시무시한 열기를 토해 내며 성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 열기가 성에 부딪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성의 태반이 박살 나 버렸다. 만약에 방어 마법진이 쳐져 있었다면 그 정도까지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테지만, 변방에 있는 성 하나하나에까지 강력한 방어 마법진을 설치하고 있을 정도로 코린트의 마법사들이 할 일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