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오랜만이군. 요즘 크루마에서는 귀한 손님을 이따위로 접대하나?”
새파란 꼬마 숙녀에게서 나오는 말투치고는 매우 고약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꾹꾹 참으며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지금 아주 바빠서 말이지. 그러니까 제발 좀 기다려 주면 안 될까?”
“언제까지?”
“오래 기다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급한 일만 대충 처리하고 바로 만나면 되잖아. 너도 멀리서 왔으니 좀 쉬어야 할 거고 말이야.”
미네르바는 다크와 그 일행들을 슬며시 관찰한 후 다크가 데려온 부하들의 옷에 상당량의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일단 휴식부터 좀 취하고 있으라구.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 한결 기분이 좋아지지 않겠어?”
“이봐, 나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걸 물었어.”
미네르바는 끝까지 뻑뻑하게 나오는 상대를 향해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다시금 미소를 보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함께 대화를 나누기로 하지. 어때? 식사도 하고, 그러면서 함께 대화도 나누면 좋잖아? 지금 나로서는 그게 최선의 대답이야. 지금 나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구.”
“좋아, 그렇게 바쁘다니 기다려 주지.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까지만이야.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알았어?”
“분명히 약속은 지킬게. 자, 뮤토 백작이 안내해 줄 거야. 샤워나 하면서 피로를 풀라구.”
미네르바는 다크를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서 보내는 데 성공했다. 다크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미네르바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다크 일행은 뮤토 백작의 안내로 황궁의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근사한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외국의 사신들이 왔을 때 묵는 곳이었기에 방들은 대단히 호화롭기는 했으나 감시하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건물 자체가 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건물 주위에는 경비병들의 막사들이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아마도 사신들이 안전하게 체류하다가 돌아갈 수 있도록 경호하는 것과 함께, 그들이 몰래 첩보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다크 일행은 오늘 새벽에 크라레인시를 떠난 후 전투를 세 번이나 겪었기에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리고 있었으므로 숙소로 안내되자마자 서둘러 목욕부터 했다. 뜨끈한 물로 간단하게 씻으면서 그들은 눈치 빠른 크루마 측의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그들이 욕실에서 나오자 하녀들이 신선한 과일들과 주스, 차 따위를 가져왔다. 미카엘은 차 맛을 살짝 본 후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좋은 차로군. 맛도 좋지만 향이 정말 근사해. 확실히 여행은 신분이 높은 사람하고 같이 다녀야 해. 대접이 다르거든.”
미카엘이야 폼 잰다고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여태껏 변두리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데 익숙했던 털털한 팔시온은 차가 영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찻잔을 내려놓고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시녀에게 물었다.
“시원한 맥주는 없소?”
맥주는 서민들이 마시는 대중적인 음료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런 천박한 음료를 마시지 않았기에, 황궁에는 그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이 촌놈이라고 광고하는 상대의 모습에 시녀는 얼굴에 떠오르는 비웃음을 최대한 감추려고 노력하면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맥주는 드시는 분이 안 계셔서요. 대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릴까요? 밖에 사람을 보내어 맥주를 사 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말입니다.”
“그럼 포도주를 가져다주시오. 그리고 독한 술이 있으면 한 병 가져다줬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이때 다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봐, 이런 거 말고 술은 없어?”
다크의 말에 시녀는 공손히 대답했다. 시녀는 바로 이 눈앞에 오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녀가 가장 극진히 모셔야 할 높은 분이라는 귀띔을 이미 받았던 것이다.
“저기 시원한 포도주가 있사옵니다, 전하. 혹시 백포도주를 원하시옵니까?”
“그런 거 말고 맥주는 없어? 뜨끈하게 목욕한 후에는 맥주가 최곤데 말이야.”
투덜거리는 소녀의 말에 시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고귀해 보이는 소녀가 맥주 같은 천민들이나 마시는 술을 달라고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죄송하옵니다, 전하. 곧 사람을 보내어 준비해 올리겠사옵니다.”
“빨리 가져와. 여기 맥주 맛은 어떤지 궁금하군.”
“예, 전하.”
시녀가 나가고 나자 팔시온이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 시간까지는 꼼짝없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로군.”
“어쩔 수 없지. 미네르바가 바쁘다니까 말이야. 일단 이쪽에서 부탁을 하러 왔으니 그 정도 기다려 주는 예의는 지켜 줘야지.”
모든 것을 간단히 넘겨 버리는 다크였다.
다크 일행이 저녁 회담을 기다리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미네르바는 여러 가지 일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네르바에게는 지금 일분일초가 모자라는 실정이었다.
“그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옛, 쟉센 방면에 나가 있던 마법사들과 근위 기사단이 방금 도착했사옵니다.”
“좋아, 제법 서둘러서 왔군. 그리고 조사해 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지?”
“예, 역시 세 명은 기사였고, 한 명은 마법사였사옵니다. 루크란의 말로는 마법사를 제외하고 기사들의 경우 모두들 꽤 실력이 좋다고 하더군요. 마법사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야 4사이클급 정도로 실력이 떨어졌사옵니다. 그리고 그녀의 경우는 아무런 것도 알아낼 수 없었사옵니다. 루크란은 아마도 그녀가 마법이나 뭐 그런 것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건가?”
“옛! 루크란에게서 제가 직접 들은 것이니만큼 착오는 없을 것이옵니다.”
마법사는 신체 내에 포함되어 있는 절대적인 마나의 양을 조사하는 뷰 마나 포스와 마법을 포착하는 뷰 매직 포스라는 마법을 쓸 수 있었기에 상대방의 실력을 조사하는 데는 적격이었다. 부관의 보고를 들은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렇다면 드래곤이 오지 않은 게 확실하군.”
“예? 드래곤이라니요?”
“아니, 아니다. 자네가 지휘해서 근위 기사단원들을 사방에 배치하고, 마법사들 또한 원거리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옛.”
“그래, 치레아 대공 일행은 지금 뭐 하고 있다고 하던가?”
“예, 시녀들의 보고로는 모두들 한 방에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전했으니까 아마 그때까지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생각인 모양이지요.”
“좋아. 계속 감시하고, 뭔가 특이한 일이 있으면 지체 없이 나에게 보고하도록 해라.”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무슨 일이냐?”
문이 살짝 열리고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부동자세로 보고했다.
“뮤토 백작님이 전령을 보내오셨사옵니다.”
뮤토 백작은 눈이 퍼렇게 멍든 꼴사나운 모습을 지극히 높은 상관에게 보이기가 싫었기에 전령을 보내온 것이었다. 경비병은 전령에게서 전달받은 서류를 미네르바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미네르바는 그 보고서를 급히 읽어 본 후 중얼거렸다.
“알 수가 없군.”
“예?”
미네르바는 그 서류를 이블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거기에는 지금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이 전권 대사의 자격을 가지고 도착했다고 쓰여 있었다.
“좀 이상하군요. 치레아 대공이 여기 와 있는데, 왜 와리스 후작이 왔을까요? 그것도 전권 대사의 책무를 띠고 말입니다. 혹시, 그녀 독단으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와리스 후작도 여기에 따로 온 것이구요. 앞뒤가 맞지 않사옵니까?”
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그것만큼 앞뒤가 잘 맞는 가정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짐작만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지.”
미네르바는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그녀의 부름에 즉각 경비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옛, 전하.”
“가서 가레신 후작을 불러와라.”
“옛!”
잠시 후 가레신 후작이 들어왔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크라레스에서 와리스 후작이 도착했는데, 경이 좀 만나 줘야겠어.”
“예, 전하. 그런데, 뭐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일단 시간을 끌어야 해. 지금 치레아 대공도 협상을 하러 와 있는데 그쪽의 말도 들어 봐야 할 것 같거든.”
“예? 그렇다면 정식으로 협상하러 온 사람은 누군가요?”
“그게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야. 그러니까 경은 시간을 끌면서 치레아 대공이 왜 여기에 왔는지를 조사해 봐.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말이야……. 혹시 와리스 후작은 그녀가 이리로 온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지. 무슨 소린지 알겠나?”
가레신 후작은 음흉스레 미소를 지었다.
“예, 이쪽은 최대한 숨기면서, 저쪽의 정보만을 긁어내서 보고 올리겠사옵니다.”
“부탁하네.”
“옛, 전하.”
가레신 후작이 회담장으로 향한 후, 밖에서 경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샤트란 페르 백작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라고 일러라.”
“옛!”
곧이어 샤트란이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다. 샤트란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검을 풀어서 앞에다가 놓은 후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비장(悲壯)한 어조로 말했다.
“전하께서 지시하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료와 많은 부하들까지 잃었사옵니다. 그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상대가 치레아 대공이라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옛, 전하.”
“그녀가 상대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처음부터 그녀가 상대가 될 줄 예상했다면 너희들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일은 크라레스가 간섭해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나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다. 일어서거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많은 부하들을 잃은 것은 명백한 저의 지휘 미숙이옵니다. 처벌해 주시옵소서.”
“그게 아니라는데도 그러는군. 썩 일어서지 못할까!”
“예.”
“너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본대에 합류하여 포위망을 굳건히 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라.”
“예? 무슨 포위망 말씀이옵니까?”
“치레아 대공이 지금 부하들과 이곳에 와 있다. 아무래도 너희들과 싸운 후 곧장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만약 협상이 결렬된다면, 그때는 뭔가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경은 딴생각하지 말고 임무에 충실해라.”
“예, 전하. 그럼 이만 물러나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