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뚱뚱이와 뻔뻔이는 다시금 만나게 되었다. 둘 다 이 방면에는 닳고 닳은 인물들이라서 그런지 그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에 가려져 있는 자그마한 눈으로 가레신 후작을 훔쳐보며 넉살 좋게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셨습니까? 가레신 후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가레신 후작은 상대의 말을 점잔은 어조로 받았지만, 그의 말은 상당히 꼬여 있었다.
“나야 언제나 그렇지요. 그건 그렇고 요즘 귀국의 형편이 좀 안 좋은 모양이군요. 전에 만났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소이다.”
상대방의 비꼬는 말을 와리스 후작은 아주 넉살좋게 넘겼다.
“허허헛! 살이 너무 찐 것 같아서 요즘 살을 좀 뺀다고 노력 중이지요. 아무래도 그 노력의 결실이 드러나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각하.”
‘너구리같은 놈!’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가레신 후작은 슬쩍 화제를 바꿨다. 일단 미네르바가 알아 보라고 지시한 것을 슬쩍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알아내야 하니까.
“그건 그렇고, 요즘 치레아 대공께서는 안녕하신가? 6년 전에 몇 번 뵈었는데, 좀 더 성숙해지셨는지 궁금하군요. 그때도 대단하셨지만 지금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셨는지 모두들 궁금해하고 있소.”
갑자기 상대가 왜 치레아 대공을 거론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기에, 와리스 후작은 약간 떨떠름한 어조로 답했다.
“글쎄요, 대공 전하께서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시지요. 아예 세월이 그분을 비껴가는 듯 느껴지니까 말입니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오셨소이까?”
“예, 귀국과 좀 더 관계를 친근하게 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관계를 친근하게라……. 사실 6년 전에 본국과 귀국은 코린트를 상대로 싸운 혈맹이 아니었소?”
“그랬었지요.”
“그런데 왜 지금에 이르러서 이 모양이 된 것이오? 그건 다 귀국에서 미란을 끼고 돌면서 본국과의 긴장 상태를 조성해 나갔기 때문이 아니요? 이 모든 것이 다 귀국의 책임인데, 지금에 이르러서 갑자기 관계를 정상화하자니 그게 말이 된다고 하는 거요?”
상대방의 통렬한 공격에 와리스 후작은 먼저 웃음부터 터뜨리면서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노력했다. 전과 달리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저 뻔뻔이 쪽이었으니까 말이다.
“허허헛, 가레신 각하, 그건 귀국의 오해입니다. 6년 전에 코린트를 상대로 전쟁을 했던 것은 귀국과 본국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미란도 본국의 맹방이었지 않습니까? 그들이 부탁을 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국의 입장도 좀 이해를 해 주셔야지요.”
“으음, 그렇다면 본국은 귀국의 맹방이 아니었소? 미란만 끼고 돌면서 이쪽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 정당하다고 지금 주장하고 있는 거요?”
“허허헛, 그게 다 오해라니까 그러시네요. 사실 본국이 귀국에게 뭐 못 할 짓을 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귀국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귀국의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을 핍박한 적도 없었구요.”
“내가 말하는 것이 결코 밖으로 드러난 그런 자질구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러는군요. 좋소. 그래, 관계를 정상화하고 싶다고 하는데 귀하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소?”
와리스 후작은 상대가 그런 질문을 하는 목적을 알지 못했기에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의 수중에는 토지에르 공작이 써 준 위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지에르가 쓰기는 했지만, 그 위임장에는 황제의 옥새가 찍혀 있었기에 완벽한 것이었다.
“허헛, 제가 그런 권한도 없이 이 자리에 나타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말에 가레신 후작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와 있는 치레아 대공은 또 뭐란 말인가?
“아무리 귀하가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귀국과 본국의 악화된 관계를 감안했을 때 귀국의 공작급이 와서 회담을 하는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옳지 않소?”
“허허헛, 그것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본국은 전쟁 중이기에 공작님들은 이런 외교 협상을 하실 만한 시간을 내시기가 어렵지요.”
가레신 후작은 와리스 후작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완전히 드러난 것이다. 와리스 후작은 치레아 대공이 크루마에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와리스 후작이 전권 위임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와리스 후작을 이곳으로 파견한 크라레스의 상층부 권력자들도 치레아 대공이 이곳으로 온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치레아 대공은 완전히 단독 행동으로 이곳에 온 것이 분명히 입증된 것이다.
가레신 후작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같은 얘기를 몇 차례나 돌린 후, 와리스 후작에게 내일 다시 회담을 진행하자고 하고는 숙소로 돌려보냈다. 그런 후 곧바로 미네르바에게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다면 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안 그런가? 이블리스.”
“그렇사옵니다, 전하. 치레아 대공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뭐? 그래도 괜찮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내친김에 왔다면 충분히 그래도 상관없사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손쉬운 상대가 아닌데? 또 그녀를 없애려면 이쪽의 피해도 엄청날 거야. 그녀는 누가 뭐래도 최고의 고수라는 인정을 받고 있는 실력자니까 말이야.”
“아니지요. 꼭 그렇게 근위 기사단을 투입해서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없애는 방법은 그런 직선적인 것 외에도 많은 추가적인 방법들이 있으니까요.”
“그래?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암습을 하는 마법이라든지, 약물 같은 것이 많다고 들었사옵니다. 역사상 많은 위대한 무인들이 암습에 의해 세상을 뜨지 않았사옵니까? 조용히 처리하는 데는 역시……. 흐흐흐”
“그것도 그렇군. 여봐랏! 마리나 지오그네를 불러와라.”
잠시 후 세련된 용모의 여마법사가 들어왔다. 미네르바는 그녀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어서 오게나.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어.”
“무슨 일이시옵니까?”
“아주 실력 좋은 기사 한 사람을 제압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서론이 원체 황당한 것이었기에 지오그네는 의문을 감추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예? 미네르바 님이시라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간단히 하실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것을 저에게 물으시옵니까?”
“내 실력으로도 힘든 녀석이 있으니까 그렇지.”
미네르바의 말에 지오그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봤다. 미네르바의 실력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나 강한 인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어떤 방법이 있겠나?”
“그, 글쎄요……. 상대가 기사입니까? 아니면 마법사?”
“기사라네.”
“예, 그렇다면 마법이나 약물 종류를 쓰는 것이 좋겠지요. 원래 기사들의 경우 마법사의 기습 공격에 조금 취약한 면이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법보다는 약이…….”
미네르바는 살짝 눈을 빛내며 말을 받았다.
“마법보다는 약이 효과적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물론 상대가 대비를 안 하고 있다면 마법도 효과적이옵니다만, 상대를 제압하기만 하는 마법은 슬립(Sleep) 등 소수로 제한되기에 대비책을 세우기도 쉽사옵니다. 그런 마법들의 경우 대부분 불시에 적을 기습하기 위해 아주 빨리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지요. 그만큼 파워는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좀 괜찮은 실력자 정도만 되어도 그런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기에 그런 상대라면 대비하기 힘든 약 종류가 효과적이지요. 상대를 죽이는 독약부터 시작해서 잠을 재우거나 몽롱하게 만드는 마취제까지 별의별 것이 다 있지요. 그 종류도 수백 종이 넘기에 일일이 대비책을 세우기도 어렵고 말이옵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아주 어려운 상대가 한 명 와 있는데 말이야.”
“예? 누군데 말씀이시옵니까?”
“전에 경도 만나 봤겠지? 다크 폰 치레아 대공 말이야. 그녀가 여기에 와 있어. 경도 알다시피 그녀는 검호 키에리를 격패시켰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지. 그녀를 제압할 약물이 있을까? 상대는 매우 눈치 빠르고 괴팍한 녀석이라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아주 효과가 뛰어나면서도 비밀스런 것이 좋겠지.”
물론 지오그네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6년 전의 전쟁에 참가한 사람이라면 크라레스 파견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그녀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전세가 어려웠을 때, 움직이지 않고 있는 크라레스군을 중앙 쪽으로 돌리기 위해 살라만더 기사단에 찾아가서 당했던 그 수모를 그녀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감히 대 크루마 제국의 궁정 마법사인 자신을, 공작도 아닌 가짜가……. 이제 그때의 수모를 돌려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오그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