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로 들어서는 미네르바를 향해 이블리스가 치하를 보냈다.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고마워, 이블리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마법사 녀석이 잔꾀를 부리는 덕분에 놈들이 다 도망쳐 버렸어. 제2근위대를 전부 투입했는데도 놓치다니……. 으이그!”
“어두워서 그럴 것이옵니다. 하지만 마법사가 없으니 멀리 도망치지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날이 밝은 후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하면 곧 잡아들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2근위대만으로 충분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쟉센에 나가 있는 제네리아 기사단을 불러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마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들까지 동원한다면 좀 더 빨리 잡아들일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좋아, 그렇게 하게.”
“옛!”
“그리고 날이 밝는 대로 용기사들을 출동시키도록!”
“옛, 전하. 용기사들에게 지시해 두겠사옵니다.”
“참,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의 양아버지가 찾아올지도 몰라. 그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다크의 양아버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블리스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예? 크라레스가 감히 이곳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겠사옵니까? 설혹 조사하기 위해 온다고 해도 대충 변명을 둘러대어 내쫓든지, 아니면 감옥에 집어넣으면 될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의외의 대답에 이블리스는 당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설마 그녀의 양아버지도 엄청난 실력의 기사이옵니까?”
“아니, 드래곤이다. 그것도 에인션트급에 가까운 골드 드래곤이지. 도대체 어떻게 부자간이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미네르바의 말에 이블리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드래곤이 양아버지라면……. 결코 드래곤은 자신의 아들이 행방불명된 사실을 묵과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계획을 좀 수정해야 하옵니다. 드래곤이 가만히 있을 턱이 없으니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이번 사실을 알고 있는 병사들의 입단속부터 해야지요. 그렇다고 그들을 없애 버릴 수는 없사옵니다. 황궁의 병사들의 상당수가 행방불명된다면 그들의 가족들을 통해서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것을 드래곤이 들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이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려다가 마법으로 기억을 지워야 하옵니다.”
“음…, 기억을 지운다고? 그런 마법도 있었나?”
“예, 있사옵니다. 마리나 지오그네 경에게 지시하면 될 것이옵니다.”
“좋아, 그다음은?”
“최대한 빨리 도망친 녀석들을 체포해 와야겠지요. 그런 후 그 작전에 동원된 인물들의 기억도 지워 버려야 하옵니다. 드래곤은 매우 영리하옵니다. 그리고 집요한 몬스터지요. 조금이라도 빈틈을 만들었다가는 큰일이 나옵니다.”
“알겠다. 지오그네에게 지시하도록 하지. 그럼 새벽에 시작될 수색 작전에 대해 만전을 기해 두도록 해라.”
“옛, 전하.”
미네르바는 마리나 지오그네가 기다리고 있을 지하 감옥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드래곤의 아들을 건드린 결과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집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어제 아침, 타이탄을 수거해 가라는 연락을 끝으로 아들 녀석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서로 간에 정기 연락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고, 또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연락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들 녀석이 돌아다니고 있는 곳은 전쟁터였다. 마법사 가스톤까지 데려갔으면 하다못해 예의상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자신이 잘 있다는 연락을 보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쁜 녀석! 내 이럴 줄 알았어. 최소한 어디서 뭘 하는지는 가르쳐 줘야 걱정을 안 하지. 이봐, 세린!”
세린은 즉시 대기실에서 달려 나왔다. 그녀는 일부러 시선을 조금 낮춰서 아르티어스와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예, 전하.”
“포도주 좀 가져와라.”
“예.”
세린은 뭔가 말을 할 듯하다가 돌아서서는 포도주를 가져다줬다. 다크는 언제나 손님들을 위해 포도주 몇 병 정도는 준비해 두라고 일렀었기에, 포도주는 금세 아르티어스 앞에 놓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다크와 생활하며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세린은 거의 본능적으로 눈앞의 인물이 다크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다크라면 브랜디 같은 독한 술이 떨어지지 않는 한 포도주는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린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상대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근한 힘을 그녀는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밀고를 한 것이 드러난다면 상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또 그녀는 오랜 노예 생활을 통해,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따라 향을 슬쩍 음미하면서 자꾸 고개를 쳐드는 불안감을 가라 앉혔다. 사실 자신의 아들은 웬만한 드래곤이라도 때려잡을 만큼 강했다.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르티어스의 이 불안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자신의 아들은 아직도 가녀린 소녀에 불과했다.
“젠장, 정말 신경 쓰이는군.”
투덜거리면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아르티어스에게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들 녀석과 마지막 통신을 주고받으면서 미란의 일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 녀석은 미란으로 갔을 가능성이 컸다.
아르티어스는 즉시 큰 소리로 외쳤다.
“세린!”
“예, 전하.”
세린은 주눅이 든 어조로 무심결에 ‘전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진짜 다크에게는 ‘주인님’이라고 불렀지 결코 ‘전하’라는 호칭을 쓴 적이 없는 세린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드래곤인 만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간단히 알아챘겠지만, 지금 아르티어스는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가서 카슬레이 백작을 불러와라, 당장!”
“예, 전하.”
잠시 후 카슬레이 백작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로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어제 미란에 갔을 때 말이야. 그러니까…, 나에게 연락을 했었던가?”
만약 다크가 카슬레이와 연락을 했다면, 즉 다크로 변장하고 있는 아르티어스가 했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조금 궁리를 하다가 짐짓 그때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예? 어제 탈출 준비를 하고 있는 제게 연락을 주셨잖습니까.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기에 대답을 해 드렸었지요.”
일단 카슬레이 백작과 연락을 했었다는 사실에 아르티어스는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이제야 그때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아, 그랬었지. 참, 그때 경이 뭐라고 보고했었지? 그게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말이야. 폐하께 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잘 생각이 안 나서 그러니 다시 좀 설명해 보게.”
“예, 저희들은 가므 의장과 국외 탈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마로니카시에 먼저 갔사옵니다. 하지만 이미 가므는 크루마에 점령당한 후였지요. 그래서 지하 감옥에 혹시 가므 의장이 잡혀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지하 감옥으로 쳐들어갔사옵니다. 하지만 가므 의장은 벌써 크루마로 압송된 후였기에, 감옥 안에 갇혀 있던 요인들만을 구출하여 서둘러 탈출 준비를 했사옵니다.
하지만 그때 타이탄 50여 대로 이루어진 적의 대 부대가 도착했사옵니다. 그들과 싸우다가 적들이 웬일인지 병력을 뒤로 뺐을 때, 그들을 물리치고 재빨리 후퇴한 것이지요. 일단 시간이 없었기에 마로니카시에서 남쪽으로 약 15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점으로 공간 이동을 했고, 거기에서 장거리 마법진으로 돌아왔사옵니다. 전하께서 치레아 기사단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셨을 때 저희들은 장거리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사옵니다.”
“오, 그래! 그랬었지. 이제야 생각이 나는군. 그래, 그랬었어. 좋아, 이만 가 보게나.”
“옛, 전하.”
아르티어스는 카슬레이 백작을 보낸 후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일단은 아들 녀석이 미란으로 간 것은 확실했다. 아마도 치레아 기사단이 우세한 적에게 꼬리를 잡혔는데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녀석이 그곳에 간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그것 외에는 적들이 다 잡은 치레아 기사단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이 녀석이 어디로 갔을까?
‘만약 내가 그 녀석이라면…….’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씩 미소를 지었다. 필시 아들 녀석은 카슬레이에게서 보고를 들은 후 크루마로 갔을 것이다. 부하가 하지 못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이제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적이 안심하며 본격적으로 포도주의 그윽한 향과 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크루마의 황궁에는 이미 아들과 한 번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었고, 또 자신의 레어에서 미네르바라는 여기사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미네르바라는 그 공작은 결코 아들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드래곤의 아들을 건드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잘 알 것이므로…….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덩치를 이리저리 뒤틀며 지루함을 참고 있었다. 9시에 회담을 재개한다고 해 놓고는 벌써 10시가 넘었는데도 얄미운 가레신 후작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점점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와리스 후작의 머릿속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을 박대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크루마는 동맹을 체결할 의사가 없는 듯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레신 후작 각하께서 드십니다.”
회의장의 앞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이 문을 열면서 와리스 후작에게 통보했다. 드디어 가레신 후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레신 후작은 짐짓 점잔을 빼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어 들어와서는 와리스 후작의 정면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와리스 후작. 생각보다 회의가 오래 계속되어서 말이오.”
“아닙니다.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안하오. 나는 귀국과 동맹했을 때 어떤 이점이 있는지를 상층부 인사들에게 설명했지만, 기각되고 말았소.”
“하,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본국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국이 망한 후에는 귀국의 차례일 텐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더 재고해 보실 수는 없습니까?”
“미안하오. 나도 귀하와 같은 논리로 설명을 했었소. 하지만 그 멍청한 녀석들은 코린트가 귀국을 점령한 후에는 본국의 차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이 말이오.”
“그, 그럴 리가…….”
“내가 귀하를 믿기에 하는 말이지만…, 지금 본국의 상층부는 코린트와의 화친을 모색하고 있소. 그들은 귀국이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을 텐데요?”
“물론이요. 그 돌머리들은 지시만 내리면 끝인 줄 아니까 말이오. 실무자인 나는 코린트와 화친을 맺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나는 상층부의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하급 관리에 불과하오. 나도 최선을 다했지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구려.”
물론 와리스 후작은 가레신 후작의 공치사가 순전히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바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제 자신이 크루마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마도 크루마는 코린트에 붙을 것을 결의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와리스는 자위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는 오늘 후작 각하께서 본국을 대변해서 최선을 다해 주신 사실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야 하겠군요.”
“일이 이렇게 끝나게 되어 정말 미안하오. 자 갑시다. 내가 마법진까지 바래다 드리지.”
와레신 후작은 이번 회담의 결과가 다크의 실종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다크가 크라레스의 황궁에 계속 버티고 있었기에 그것은 짐작조차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예, 전하. 마법진을 이용해서 떠나는 것을 배웅해 주고 왔사옵니다.”
“훗! 치레아 대공이 없는 크라레스 따위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지. 그건 그렇고, 가레신 경.”
“옛, 전하.”
“경은 지금 코린트로 가라.”
“예, 가서 어떻게 하면 되겠사옵니까?”
“그들은 아직 치레아 대공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점을 십분 활용해야 하는 것이야. 상호 불가침 협정을 맺어 주지 않는다면 동맹도, 동맹군의 파병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주지시켜라. 놈들은 지금 치레아 대공이 무서워서 기동력이 좋은 기사단만으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어. 그런 만큼 우리들을 참전하게 만들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양보해 줄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때 옆에서 이블리스가 끼어들었다.
“전하, 그 외에도 본국의 미란 병합을 코린트가 인정한다는 각서도 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미란은 제국 전쟁 후 코린트와도 관계를 개선해 왔기에 아무래도 코린트가 그 점을 들어 압력을 행사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군. 그것도 함께 시행해라.”
“옛, 전하.”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