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를 찾기 힘든 전쟁
두두두두두…….
50여 명의 기병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고, 중요 부위는 두터운 철판으로 된 금속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병들이 지나가자 희뿌연 먼지와 함께 지축을 울리는 듯한 엄청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 안에 들어와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기에, 길거리를 지나가던 주민들은 그 서슬에 놀라서 길의 좌우로 황급히 비켜섰다.
기병들의 목적지는 마을의 위쪽에 있는 작은 요새였다. 그 요새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버니즈 백작은 요새를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에 가까운 광활한 대지의 관리를 황제로부터 위임받고 있었다. 영지가 넓은 만큼 버니즈 백작은 거의 4백여 명에 가까운 사병(私兵)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지금 마을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 달려오는 무리들도 백작의 사병들이었다.
요새 위에 서 있던 보초병은 달려오는 기병들이 몇 시간 전에 이 요새에서 출발한 잭슨 남작 일행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는 아래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잭슨 남작님께서 돌아오셨다. 문을 열어라!”
기병들이 요새의 정문에 도착할 때쯤에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기병들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갑옷, 그리고 기병들이 가지고 있는 긴 창날과 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만큼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모두들 쉬어라, 수고했다.”
잭슨 남작은 도착과 동시에 말의 고삐를 종자에게 넘겨 준 후 요새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영주인 버니즈 백작에게 갔던 일의 전말을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예, 영주님. 농노들이 봤다는 그 수상한 무리들은 피난민들이었습니다.”
“피난민이라고? 어디에서 왔다고 하던가?”
“예, 발크레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발크레라면 여기서 겨우 이틀거리인데……. 설마 거기에까지 적들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피난민들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요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적들은 곧이어 물러갔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어서 피난을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처리해 놓고 왔는가?”
“예, 일단 영지의 경계선에 검문검색을 강화하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피난민들을 설득해서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지시했지요.”
“잘 처리했군. 이 기회를 이용해서 농노들이 도망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영지 내의 농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주의하고 있습니다. 참, 딴 곳에서 흘러온 한 농노 가족을 붙잡았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농노를 붙잡는 일이 그렇게 희귀한 일은 아니었기에 버니즈 백작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늘 하던 대로 처리해.”
“예, 그런데 그 농노의 딸이 상당한 미인이던데요? 그냥 노예로 팔아 버리기는 아깝더군요.”
잭슨 남작은 슬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부하의 말투가 자신에게 달라는 듯 느껴졌는지, 버니즈 백작은 잭슨을 힐끗 바라 본 후 말을 이었다.
“뭐 좋다면 그 계집은 자네가 가지게. 대신 그 아버지는 교수형을 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로 팔아 버리는 것 잊지 말게.”
“감사합니다, 영주님.”
이때 갑자기 비상종 소리가 울려 펴졌다.
땡땡땡땡땡…….
하지만 그 소리는 급격히 잦아들더니 곧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버니즈 백작은 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비상종을 가지고 장난치는 못된 녀석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못된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비상종 밑에 쓰러져 있는 병사의 시체였다. 그것을 보고 버니즈 백작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적이다.”
버니즈 백작은 부하들을 지휘하기 위해서 아래로 달려 내려가려 했다. 하지만 곧이어 뒤따라온 잭슨에게 붙잡혔다. 잭슨은 버니즈 백작을 꼭 붙잡은 후 상관이 무모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설득했다.
“지금 사방에 돌아다니며 지방 영지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코린트의 기사단입니다. 기사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적들은 곧 있다가 철수할 겁니다. 그러니 몸을 잠시 감추십시오. 나중에 적들이 물러간 후에 이 영지를 관리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그렇군. 내가 죽으면 안 되겠지?”
“당연하지요. 지금 여러 곳에서 놈들이 활개를 치는 바람에 지방 행정이 붕괴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주님의 영지만이라도 보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황제 폐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부하의 말대로다. 놈들은 점령지의 확보가 목적이 아니었다. 크라레스의 지방 행정의 중심부들을 파괴하면서 크라레스가 망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는 잭슨 남작의 말대로 용감하게 적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비겁하게라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야 놈들이 떠난 후에 다시 이곳의 치안과 행정력을 복구할 수 있을 테니까. 버니즈 백작은 거기까지 생각하며 자신에게 충언을 해 준 잭슨 남작에게 감사를 보냈다.
“그렇군. 경의 현명한 조언에 감사하네.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있는 한 크라레스는 무궁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야. 내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네.”
영주의 말에 잭슨 남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주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또, 크라레스는 코린트군의 기습 작전으로 수많은 지방 영주들이 사망한 상태였다. 만약 버니즈 백작이 뒤를 밀어준다면 작은 지방의 영주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미소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건 그렇고 빨리 몸을 피하셔야만 합니다. 자, 이쪽으로…….”
버니즈 백작이 잭슨 남작의 안내를 받으며 달려간 곳은 요새 외곽으로 빠지는 비밀 통로가 있는 곳이었다. 잭슨 남작은 비밀 통로의 문을 연 후 다급한 어조로 외쳤다.
“빨리 들어가십시오, 영주님.”
하지만 버니즈 백작은 어둡고 습한 비밀 통로를 앞에 두고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놈들이 올지 모릅니다. 겨우 병사 몇백 명으로 기사들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 빨리…….”
자신을 채근하고 있는 잭슨 남작을 향해 버니즈 백작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비밀 통로의 앞에 도착해서 언제든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기에 버니즈 백작의 마음은 상당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참, 그러고 보니 가족들이……. 나만 이렇게 빠져나갈 수는 없지 않겠나?”
잭슨 남작은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고 있었다. 사실 적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성내의 경비병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요새 안까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속도가 빠른 기사들은 다수의 병사들과 싸울 때 가능한 한 운신의 폭이 좁은 실내에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움직인다면 영주의 가족들을 구출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도 아니고, 겨우 영주의 가족을 구한다고 목숨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 이 상태로 가족들을 구하러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영주님, 빨리 나가셔야만 합니다. 일단 영주님께서는 살아남으셔야 하지 않습니까? 놈들이 언제 실내로 진입할지 알 수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버니즈 백작은 몸을 뒤로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요새 내의 연병장 위에서는 지금 그야말로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적들을 향해, 겁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도망이라도 치는 놈들은 그래도 용감한 녀석들이었다. 아예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떨며 그냥 서 있거나, 아예 오줌까지 지리고 있는 놈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은 밖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처치한 후 실내로 진입해 들어올 것이다.
“알겠네. 그렇다면 자네가 가서 내 가족들을 이리 데려다 주지 않겠나?”
“예?”
적들이 언제 실내로 진입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영주의 가족들을 구한답시고 왔다 갔다 하다가 적에게 걸리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니즈 백작은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 쓰며 말했다. 얼마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놈들이 실내로 진입해 들어와서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놈들은 아직 요새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지 못했어. 지금 움직인다면 가능할 거야. 부탁…….”
버니즈 백작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잭슨 남작이 뒤에서 단검으로 그의 등을 찔러 버렸기 때문이다.
“으윽! 네… 네놈이 이럴, 이럴 수가 있느냐?”
비틀거리면서 검을 뽑아 들려고 애쓰고 있는 상관을 보며, 잭슨 남작은 단검을 옆으로 던지고 허리에 꽂혀 있는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잭슨은 한껏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네놈이나 가서 죽어. 나는 살아야겠어. 겨우 네 녀석 가족 따위 구한다고 창창한 내 목숨을 걸 수는 없다구! 알아?”
잭슨 남작의 검은 비틀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버니즈 백작의 옆구리를 베어 들어갔다. 잭슨 남작은 우람한 근육질의 소유자였지만 그의 검은 버니즈 백작의 몸통을 완전히 반으로 가르지는 못했다. 반쯤 잘라 버리다가 힘이 부족해 그만 멈춰 버렸던 것이다.
잭슨 남작은 이제 시체가 되어 버린 버니즈 백작의 몸통을 발로 차서 뒤로 넘어뜨리고는 자신의 검을 뽑아냈다. 그런 다음 피 묻은 검을 든 채로 황급히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어찌 되었건 이 망할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영주건 뭐건 직책을 받아서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어쨌든 코린트 기사단의 크라레스 공격은 엄청난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각 지방의 행정과 치안, 그리고 세금의 징수를 담당하는 지방 영주들이 그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전투 방법은 여태껏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 행렬……. 소나 말이 끄는 수레에 짐과 아이들을 태우고, 어른들은 그 고삐를 잡고 앞장서서 터덜터덜 걷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등과 한쪽 손에 짐을 잔뜩 들고 남은 한쪽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꼭 쥐고 걷는 사람들.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해 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피난 행렬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이번에 아르곤에 점령된 거의 대부분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인구의 대 이동이었다.
국가끼리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피난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듯 대규모의 피난민이 이동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의 경우 거주지를 이동할 자유가 있었지만, 영지에 소속되어 있는 농노들의 경우 주거지를 이동할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옆 마을에서 격전이 벌어져도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거주지를 이탈하여 탈주한 농노라는 것이 밝혀지면 노예로 팔려가거나 아니면 교수형에 처해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후 새로운 주인이 영주가 되어 나타나면, 그들은 또다시 농사를 지어 그 영주에게 바치는 생활이 지속되게 된다. 평민이나 귀족들이야 적군이 쳐들어오면 엄청난 생활의 변화가 오겠지만, 농노들의 경우는 바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농노의 생활을 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다는 것은 농노들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피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피난민들이 이동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의 수는 30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두터운 갑옷과 검과 창으로 무장을 갖추고 있는 진짜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피난민을 보자 그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서라,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라, 더 이상 앞으로 갈 수는 없다.”
병사들이 막아서자 피난민들의 대열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철없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들 병사들의 모습을 보자 허탈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정들었던 집과 생활을 보장해 주던 토지를 버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들에게는 집과 토지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목숨이었다. 아무리 호화로운 집과 많은 소출을 내는 토지라도 목숨이 없다면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을 보내 주시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쳐 봤지만, 병사들에게 그런 부탁은 통하지도 않았다. 병사들은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검을 뽑아 들고 피난민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들로서도 상관으로부터 받은 명령이 있기에 불쌍하긴 하지만 이들을 그냥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자신들을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느끼자 피난민 행렬은 잠시 멈칫 하더니 여태까지의 체념이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에게는 갈 데가 없었다. 돌아가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죽으나 돌아가서 화형당하나 똑같은 것이다. 아르곤의 종교 재판에 걸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피난민들은 저마다 지팡이로 쓰던 나무 막대나 수레에서 꺼내든 농기구를 들고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피난민들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자 병사들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간 맞아죽을 테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방에 피보라가 일기 시작했고, 피난민들은 더욱 흥분했다.
죽기 살기로 덤벼 오는 피난민들의 몽둥이에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허접한 무장을 갖춘 시민들이라고 해도 숫자는 이쪽의 몇 배나 된다. 부하들의 절반 이상이 광기 어린 시민들에게 죽음을 당하자 병사들의 우두머리도 어쩔 수 없었는지 퇴각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평소에 교육받은 대로 열심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동료들의 시체들을 뒤로하고 말이다. 그리고 피난민들도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이 없어지자 또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십 명이 넘는 이웃이나 친지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어느 쪽이나 뒤끝이 깨끗하지 못한 허무한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