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8화 (294/930)

다크의 위기

“정신을 차리십시오.”

다크는 누군가가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서서히 눈을 떴다. 어찌 된 노릇인지 근육이 있는 대로 풀어져서 눈을 뜨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힘겹게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희미한 잔상뿐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기에 그냥 눈만 껌뻑이고 있을 때 상대방의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데요. 약이 너무 과했던 것 아닐까요?”

이번에는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그럼 키에리도 죽인 위험인물에게 적당량의 약을 쓴단 말이냐?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가진 기사들은 웬만큼 약물을 투입해도 견디는데, 도대체 어디에 기준을 두고 적당량을 잡는다는 말이야? 실험을 해 볼 대상도 없는데…….”

“그럼 도대체 약을 얼마나 쓰신 겁니까? 48시간이나 흘렀는데…….”

“뭐, 코끼리 한 마리는 충분히 뻗을 정도로 넣었지.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해. 내 예상으로는 아마도 일주일은 혼수상태에 있을 테니 헛수고하지 말고 그냥 놔두라구.”

“그렇게 많이 넣으셨다는 말이십니까.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구요.”

“죽으면 그때 가서 대비책을 생각해 봐야지. 그건 그렇고 나는 전하를 만나 뵈러 갈 테니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그리고 저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해. 불쌍해 보인다고 채워 놓은 구속 장비를 풀어 주지 말라는 말이다. 알겠느냐?”

“옛, 명심하겠습니다.”

그다음 나직한 발자국 소리가 또각또각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다크는 또다시 심해와도 같이 깊고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넓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숙적인 미네르바를 마주하고 앉은 로체스터 공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이곳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귀하가 여기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소. 그래, 무슨 일이시오?”

로체스터를 향해 미네르바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로체스터 공작.”

“마찬가지요.”

“한 가지 상의 드릴 것이 있어서 왔지요.”

“그래 뭔가요?”

“귀국과 본국과의 상호 불가침 및 미란 병합의 인증, 그리고 쟉센 평원에 대한 본국의 완전한 귀속에 대한 약속을 부탁해요.”

그 말에 로체스터는 과장되게 감탄사를 터뜨리며 비꼬았다.

“후아……. 대단히 많은 것을 원하는구려.”

“이쪽의 조건을 들어 보면 그 정도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실 거예요.”

“그래, 뭐요? 도대체 뭘 가지고 왔기에 그렇게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는지 궁금하오.”

“치레아 대공이에요. 이번에 귀국은 아주 수월하게 전쟁을 치르셨더군요. 그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치레아 대공을 본국에서 구속하고 있어요.”

“뭣이, 그게 사실이오?”

로체스터 공작의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미네르바는 그가 놀라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상대의 반응으로 보아, 이번 회담은 필히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왔지요. 방금 제시했던 그 조건을 들어준다면 치레아 대공을 넘겨드리죠.”

“만약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죠. 부하가 과잉 충성으로 그 짓을 했다고 그녀에게 깨끗이 사과하고 동맹을 맺은 후 귀국을 칠 수밖에 없어요. 그녀의 무서움은 귀하도 잘 알겠죠? 약 때문에 한 번 곤욕을 치렀으니, 더 이상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을 거예요. 자, 어때요?”

“으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시오.”

“좋아요.”

로체스터 공작은 이제야 크라레스가 왜 조용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초반에 치레아 대공이 설치면서 상당한 피해가 생겼었지만, 나중에는 조용했던 건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치레아 대공은 정말 상대하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코린트 제국의 힘을 집중하기만 한다면 그녀쯤이야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드래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지 않은가?

한참을 궁리하던 로체스터 공작은 낮은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비밀의 유지는 어떻소?”

이게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만약 드래곤이 이 비밀 거래를 눈치 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뻔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이 사실을 모른다면 그 뒤는 아주 손쉽게 처리된다. 그녀를 죽이건 말건 로체스터 공작 마음대로 되는 것이다.

“완벽해요. 드래곤은 절대로 눈치 채지 못할 거예요.”

미네르바의 확답에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장 골치 아픈 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크라레스 제국도 완전히 지도 상에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좋소, 그렇게 해 드리리다.”

“좋아요, 일단 서류로 작성해 주시죠. 그녀는 제가 돌아간 후에 곧장 보내 드리죠.”

잠시 생각한 후 로체스터 공작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좋소. 하지만 이것이 만약 속임수라면 그따위 서류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거요.”

미네르바는 그 정도 위협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대에게 생긋 미소를 보내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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