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린트와 크라레스의 2차 협상도 와리스 후작과 발렌시아드 후작에 의해 주도되었다. 와리스 후작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임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후 그가 자리에 앉자 사안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오늘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뭘요, 내 일이니 별로 괘념치 마시오.”
“어제 폐하와 상의를 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귀국의 모든 제안을 수용하시겠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임스는 피식 미소를 지은 후 손을 들어 와리스 후작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아아, 어제 했던 그 제안은 이제 소용없게 되었소이다. 귀국이 너무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시효가 지났단 말이오.”
“예? 그렇다면…….”
“하루가 지난 만큼 더 많은 것이 추가되오. 청기사 외에도 귀국이 보유한 타이탄들 중에서 카프록시아 및 테세우스급은 전량 본국에게 양도하시오.”
“그, 그건 너무…….”
제임스는 손을 들어 와리스 후작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요. 그리고 귀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노획한 타이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 만큼 엑스시온에서 빼낸 황금은 엄청나겠지?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귀국이 이번 전쟁에 대한 배상금으로 250톤의 황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하라고 전하셨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은 아닐 거요. 탄벤스 공국의 전쟁에서 본국의 은십자 기사단을 전멸시킨 것만으로도 150톤은 건졌을 테니까 말이오. 그리고 철십자도 그대들이 전멸시켰지 않소? 그 외에도 귀국 타이탄들 중에서 파괴된 것을 수거한 것도 있을 거요. 그것을 모두 긁어모은다면 수월찮게 250톤을 모을 수 있을 거요.”
와리스 후작은 식은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물론 은십자를 전멸시키면서 그 정도의 노획물은 건졌다. 하지만 코린트 또한 기습 침공으로 3, 4전대를 전멸시켰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노획한 것은 모두 받아 내고, 저쪽은 저쪽대로 노획을 해 갔으니……. 이대로라면 크라레스의 군사력은 대폭적으로 감소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너무한 처사입니다, 각하.”
“별로 너무할 것도 없소. 또 스바시에를 알카사스 왕국에 넘기시오. 그리고 치레아의 미르시엔 열도를 아르곤에 넘기시오.”
“이건 억지입니다, 각하.”
“억지라고 볼 수 없소. 하겠소? 아니면 하지 않겠소? 그 결과를 말하시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폐하와 의논을…….”
“후후훗, 하루가 지났는데 얼마나 많은 조항들이 붙었는지 알았을 거요. 만약 오늘 해가 넘어간다면, 내일은 그 조항에 치레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들어갈 거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비웃음을 흘리며 제임스가 떠나고 난 후, 와리스 후작은 허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코린트와 다투며 경쟁을 하던 조국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주저앉을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와리스 후작의 보고를 들은 토지에르는 격분했다. 만약 그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크라레스는 완전히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뭣이라고? 이런 젠장, 놈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정면 승부밖에 없다. 이래도 국가가 망하고, 저래도 망할 거라면 코린트 놈들에게 본국의 저력을 보여 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어.”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렇게 전하겠사옵니다.”
와리스 후작과의 통신을 끊을 후, 토지에르는 한달음에 치레아 대공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이제 벌어질 본격적인 전쟁에 대해서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전하께서는 어디에 가셨느냐?”
“죄송하옵니다, 전하. 그건 저희들도 알 수가 없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아침에 출근하신 후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셨사옵니다.”
“뭣이라고? 그렇다면 전하께서 어디로 가셨다는 것이냐? 여봐라, 세린!”
토지에르가 서슬 시퍼렇게 고함을 질러 대자, 세린은 주눅이 들어서는 귀를 뒤로 착 붙인 채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부르셨사옵니까? 토지에르 전하.”
“그래,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
“그건 소녀도 잘 모르겠습니다요. 아침에 포도주를 달라고 하셔서 드렸습니다. 그런 후 나중에 포도주를 치우기 위해 갔을 때는 전하는 안 계셨습니다요.”
“경비병도 모르고 시녀도 모른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이냐?”
허공에 대고 괴성을 질러 댄 후, 토지에르는 세린을 노려보고 으르렁거렸다.
“너는 전하의 노예야. 갑자기 전하께서 사라진 이유를 너는 알고 있겠지?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이 없었느냐? 사실대로 말해 봐라. 몽둥이찜질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토지에르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가운데, 세린은 가련한 표정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저, 사실은 토지에르 전하……. 우리 전하께서 좀 이상하셨어요.”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이냐?”
“그러니까 보통 즐겨 드시던 브랜디도 안 드시고 포도주만 드셨구요.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지도 않으셨구요……. 원래 말은 좀 거칠게 하시지만 속마음은 참 따뜻한 분이셨거든요. 그런데, 요 근래에는 전혀 그런 것을 찾아 볼 수가…….”
“그래? 좀 이상하군…….”
토지에르는 세린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수상한 점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경비병들을 향해 질책했다.
“너희들은 요 근래에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느냐?”
세린의 말을 들었던 경비병들은 서로를 슬쩍 보며 눈을 한번 맞추더니, 그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사건이 있었사옵니다, 전하.”
“무슨 일이냐?”
“예, 며칠 전에 프로이엔 폰 론가르트 백작께서 집무실로 들어간 후 쿠당하는 큰 소리가 들리기에 안으로 달려 들어갔었사옵니다. 아무래도 안에서 뭔가 싸움이라도 벌어진 듯했거든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론가르트 경이 검을 쥔 채 한쪽 구석에 쓰러져 계셨사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장난을 친 거라고 하시며 나가라고 하셨기에…….”
“그래? 그렇다면 너는 지금 당장 가서 론가르트 단장을 불러와라.”
“옛!”
경비병을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론가르트 백작이 달려 들어왔다. 론가르트 백작은 세련된 동작으로 토지에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르셨사옵니까? 전하.”
“그래, 자네가 며칠 전에 치레아 대공 전하와 한바탕했었다지?”
“예? 누가 그런 말을…….”
둘러대면서 경비병들을 노려보는 론가르트를 제지하며, 토지에르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경비병들에게 다 들었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탓하고자 경을 부른 것이 아니야. 지금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행방불명이 되셨는데, 자네는 혹시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해서 부른 것이네.”
“행방…불명이시라고요?”
“그렇네. 세린의 증언으로도 뭔가 석연찮은 것이 있고 말이야.”
“너희들은 나가 있거라.”
론가르트는 세린과 경비병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아주 낮은 어조로 보고를 올렸다.
“여기 계셨던 분은 전하가 아니라 아르티어스 님이었습니다.”
그 말에 토지에르의 눈은 한껏 커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뭣이? 그렇다면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셨단 말이냐?”
“코린트 놈들이 본국을 제집 드나들 듯하면서 설쳐 대니 가만히 앉아 계시지 못하셨겠죠. 아마도 한판 하러 가신 듯합니다.”
“크! 어떻게 그럴 수가……. 어쩐지 조용히 가만히 계신다 했더니 그렇게 된 것이었군. 그렇다면 아르티어스 님은 또 어디로 가신 거냐?”
“글쎄요…….”
토지에르와 마찬가지로 론가르트도 그 점만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때 토지에르의 몸이 휘청했다. 재빨리 그것을 눈치 챈 론가르트가 토지에르를 부축했다.
“괜찮으시옵니까? 전하.”
“아아, 괜찮아. 잠시 현기증이 났다네.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
론가르트는 토지에르가 거듭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를 부축하여 의자가 있는 곳까지 이끌어 그곳에 앉혔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사옵니다. 잠시 심신을 편안히 하시고 노여움을 가라앉히소서. 지금 모두들 자리를 떠나시고 전하 혼자만 남아 계시옵니다. 그런 지금 전하까지 쓰러지신다면 제국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토지에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했다.
“이제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는데, 내가 어찌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여태껏 얼마나 많은 세월을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바쳤는데, 어떻게 이렇듯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단 말인가? 여태껏, 여태껏 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흑흑.”
급기야 토지에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젊었을 때, 그때 조국은 패망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코린트 제국의 침입과 곧이어 연결된 황제의 치욕적인 죽음. 그리고 지금의 황제를 옹위하여 부흥의 깃발을 내걸고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의 인생…….
하지만 그 40여 년에 걸친 맹목적이었던 삶의 결실이 이런 식으로 다가온 것이다. 수많은 충신들의 목숨과 노력을 삼키고도 말이다.
론가르트가 그런 토지에르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조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온 충신의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론가르트는 감히 토지에르 공작을 위로할 엄두를 못 내고 옆에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와 토지에르의 사이에는 바다만큼이나 넓은 신분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시선을 딴 곳에 두어 토지에르가 오열하고 있는 장면을 짐짓 모르는 체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