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병원의 암운
드래곤이 떠나고 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집무실로 돌아온 즉시 레티안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사옵니까? 공작 전하.”
레티안이 들어오자 공작은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자고 불렀네. 자네도 들었겠지? 드래곤이 와서 난리를 친 것 말일세.”
“예, 공작 전하. 별궁이 박살 났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보고는 들었사옵니다.”
로체스터는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드래곤은 그녀를 찾아온 것 같아. 만약 그녀를 죽여 버렸다면 큰일 날 뻔했어. 미네르바가 재빨리 이쪽에 그녀를 넘겨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말이야.”
레티안은 로체스터 공작의 말을 수긍했다.
“예, 미네르바 공작은 우리 쪽에다가 드래곤의 분노를 떠넘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옵니다. 저렇게 악착같이 찾아 댄다면 언젠가는 들통이 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녀를 죽였다는 사실을 미네르바가 이용할 수도 있지요. 그것을 드래곤에게 고자질할 수도 있다는 것이옵니다. 그녀를 지하 감옥에 수감해 둔 것은 매우 잘하신 결정이옵니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든 크루마의 입장에서 코린트는 넘기 힘든 장벽일 테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고 그녀를 드래곤에게 넘겨주는 것은 어떨까? 용병대장은 그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던데 말이야.”
레티안은 잠시 생각해 본 후 냉정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했다.
“그녀를 지금 드래곤에게 넘겨주는 것은 좋지 않사옵니다.”
“왜?”
“크루마에서 사용한 정신계 마법에 따른 부작용으로 약간 상태가 안 좋사옵니다. 그런 그녀를 드래곤에게 넘긴다면 드래곤이 가만히 있겠사옵니까? 거기에다가 크루마 쪽에서는 우리가 강압적으로 요구했기에 그렇게 했다고 대답한다면 최종적으로 드래곤의 분노를 받을 나라는 본국이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답변이었다.
“그렇겠지.”
“그런 만큼, 그녀를 없애는 것보다는 회유하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일단 그녀가 우리 쪽의 손을 들어 준다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을 것이옵니다. 그녀야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하지만, 그녀의 뒤를 돌봐 주는 드래곤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사옵니까? 또 드래곤이 직접 나선다면 정신계 마법의 부작용쯤은 아주 간단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요.”
로체스터는 구미가 당기는지 입맛을 다셨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그 고생을 했겠는가?
“회유라……. 하지만 그것이 쉬울까?”
“일단 그녀를 지하 감옥에서 꺼내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런 후 귀빈으로서 대접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시간을 들여서 회유한다면 어쩌면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사실 그녀와 크게 원수질 일을 한 적은 없지 않사옵니까? 또, 지금 그녀의 몸 사정은 좋지 못하옵니다. 사람은 몸과 정신이 피곤할 때, 그때가 회유하기 좋지 않사옵니까?”
“그럴까?”
“그렇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존재는 뭔가에 약점이 있기 마련이옵니다. 돈, 재물, 뭐 그런 것들 말이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소용이 있을까? 그녀는 크라레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인데 말이야.”
“그렇다면 크라레스 황제를 인질로 잡는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크라레스는 이미 끝장 난 국가인데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그렇군.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어.”
“하지만 전하, 회유는 급할 것이 없겠지만 지금 당장 해 둬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게 급한 일이 뭔가?”
“회유하기 전에 드래곤이 이곳을 찾아낸다면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시옵소서.”
“쯧,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드래곤은 코앞까지 왔었지만, 그녀의 기척을 찾아내지 못했어.”
“물론 드래곤이 마법을 이용해서 그녀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옵니다. 미네르바가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것을 이미 봤으니까요. 하지만 정령 마법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옵니다.”
“정령 마법이라고?”
“예, 전하. 만약 드래곤이 정령왕을 불러내어 그에게 뒤질 것을 부탁한다면 당장 발각될 것이옵니다. 그녀를 찾아왔던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력을 가진다는 골드 드래곤. 바람의 정령왕에게 부탁한다면 당장 찾아낼 것이옵니다. 전 세계에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있을 수 없으니까 말이옵니다.”
“큰일이로군. 뭔가 대책이 없겠는가?”
로체스터의 걱정스런 물음에 레티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즉시 대답했다. 이미 그것에 대한 궁리를 해 뒀던 것이다.
“당연히 대책이 있으니까 전하께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정령 마법을 막을 수 있는 마법진을 쳐 두는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그녀가 있는 곳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것을 만들려면 아무래도 돈이 좀 많이 들 것이옵니다.”
“돈은 아무리 많이 들어도 상관없네. 즉시 시행하게.”
“옛, 전하.”
레티안은 우아하게 인사를 올린 후 급히 밖으로 나갔다. 고위급 마법사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환자들은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잠자면서 보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잠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식사를 했다. 수녀는 소화가 잘 되도록 특별히 만들어진 영양가 높은 수프를 조금씩 떠먹여 줬다.
병상에 오랜 시간 누워 있었던 탓인지 수척해진 환자는 그것을 다 받아먹은 후 감사의 인사를 건네 왔다. 이 환자는 수녀가 배당받은 세 명의 환자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상당히 쾌활하면서도 넉살이 좋았다. 명패에 붙어 있는 그의 이름은 ‘찰스’였다.
“고맙소. 힘이 없어서 밥도 내 손으로 못 떠먹다니……. 내 신세야.”
“찰스 씨,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열심히 드시고, 빨리 회복하셔야지요.”
위로하는 수녀를 향해 찰스는 언제 신세 한탄을 했냐는 듯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이봐요, 수녀님. 남자 친구 있소?”
“예?”
의외의 물음에 수녀가 경악했지만 찰스는 그런 것쯤이야 상관 안 한다는 듯 넉살 좋게 말했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소. 재수 없게 사고를 당한 것이었지만, 조만간에 회복될 거요.”
수녀가 빙그레 미소 짓자 찰스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미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상당히 수척하긴 했지만 아마도 살이 좀 더 붙는다면 꽤나 잘생겼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녀는 미소를 지으며 응해 줬다.
“예, 세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찰스 씨는 아주 미남이시지요.”
“헤헤헤, 으아아암”
웃음을 터뜨리다가 찰스는 크게 하품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요즘은 완전히 돼지가 되어 가는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수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어쩔 수 없지 않은가요? 빨리 건강해지셔야죠.”
“그런데, 수녀님. 혹시 전에 만난 적이 없던가요? 아무래도 낯이 익은 것 같아서…….”
“글쎄요. 수행을 하기 위해 3년간 코린트 전역을 떠돌았으니 뵌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지난 6년간 황궁 밖을 나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오. 어디선가 만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찰스는 침대에 누운 채 한참 궁리를 하는 듯하더니 어느덧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