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는 부하들을 불러서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를 전달한 후, 덧붙여서 금십자 기사단까지 불러들여서 수도의 경계를 더욱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다음 그 자신은 궁전 내외부를 샅샅이 뒤지면서 적이 침입해 들어올 가능성이 있을 만한 곳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 첩자가 와서 황제가 살해당했는데도 상대가 어떻게 침입했는지, 또 상대가 어떻게 유유히 빠져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은 제임스의 자존심을 엄청나게 긁어 놨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병사들과 함께 걸어가는 수녀를 발견했다. 수녀의 표정이 원체 자연스러웠기에 제임스는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병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런 한밤중에 수녀가 병사들과 함께 걸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
병사는 근위 기사단의 복장을 한 기사가 질문을 던져왔기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행동이 수상해서 연행해 가는 중입니다, 기사님.”
“뭐? 연행하는 중이었다고?”
“예.”
제임스는 수녀를 향해 의혹에 찬 눈길로 쳐다봤다. 연행당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수녀의 표정이 너무나도 담담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예, 밤에 산책을 하다가 이분들이 수상하다며 가자고 해서 따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제임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 이 한밤중에 따라오라고 한다고 해서 따라갑니까? 그리고 달밤에 무슨 산책을 하시고 계셨던 거지요? 썩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도 아닌데 말입니다.”
“잠을 자다가 좀 이상한 꿈을 꿨거든요. 뭔가 시커먼 것이… 이곳 황궁을 덮기에 놀라서 잠에서 깼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별로 뚜렷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꿈속에서는 무서웠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잠을 청해 봤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진정이 안 되기에 기분 전환 겸 잠시 밖에 나와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왜 여기를 서성거리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산책 중이라고 대답했구요. 가자고 하기에 따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저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제임스는 꿈 얘기를 들으면서 상대의 표정을 세밀히 관찰했다. 하지만 수녀는 제임스의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종 담담한 어조로 말을 끝마쳤다.
사실 그녀 말대로 죄가 없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황제가 암살당한 이때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잡혀 들어가면, 필히 고문을 동반한 생사람 잡기가 뒤따를 것이다. 결국에는 무죄가 입증될지는 몰라도 묵사발 난 후 아무리 실수였다고 하며 죄송하다는 사과를 들어 봐야 이미 늦은 것이다.
제임스는 잠시 수상쩍은 듯한 시선으로 수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수녀를 전문적인 암살자, 그것도 늙기는 했지만 그래듀에이트급의 기사를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암살자라고 의심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리가 있었다. 수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로브는 언제나 그러하듯 주름 하나 가 있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갑옷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겠는가?
또 만약에 백보 양보해서 그녀가 시커먼 암살자의 복장을 하고 황제를 죽였다고 하더라도,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옷까지 갈아입고 이 달밤에 산책을 한단 말인가? 그건 ‘나를 의심해 주세요’하는 꼴밖에 안 되지 않는가.
제임스는 수녀가 아데나 신전의 무녀인 만큼, 뭔가 황제 암살을 예고하는 예지몽(豫知夢)을 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제임스는 어떻게 보면 무모하고, 또 어떻게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는 이 수녀를 향해 미소를 보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산책하기에는 너무 날씨가 싸늘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별로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기에, 이 숙소 밖을 서성거리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만 가 보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그 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대화를 해 보고 싶군요.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수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한 후 자신에게 배정된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사들은 제임스의 지시를 받고 또 다른 수상한 자를 잡기 위해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의 세상
크라레스가 몬스터를 끌어들여 엄청난 국력 팽창을 하고 있을 때, 코린트는 황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한 권력 쟁탈전이 극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코린트의 경우 황위가 아들에게로 승계되는 것이 아니라, 혈족 내의 그래듀에이트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에게 승계되도록 법으로 정해 놨기에 누가 황위를 이어받을 것인가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만약 코린트에서 크라레스가 아직도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황위 쟁탈전에 그토록 많은 정력을 소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적이 나타나 있을 때는 군부의 입김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판단했을 때 크라레스는 완전히 재기불능이었고, 알카사스와 아르곤은 제2차 제국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점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크라레스의 뒤를 이어 코린트의 가장 강력한 가상 적국으로 발돋움한 크루마는 새로이 영토에 편입된 미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국내외적으로 봤을 때 적을 찾기 힘든 코린트로서는 군부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기세가 오른 귀족들과의 한판 승부가 없을 수 없었다.
로체스터를 비롯한 군부는 승하한 지그문트 드 아그립파 4세 황제의 아들이자 싹수가 노랗게 방탕한 행동을 일삼고 있던 카스피아 드 아그립파 황자보다는 승하한 황제의 조금 먼 혈족인 비스마 드 아그립파 후작을 지지했다. 비스마는 조금 먼 혈족인 자신이 제위를 이어받는다는 꿈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군부에 진출하여 금십자 기사단의 기사로서 근무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대단히 뛰어난 검객은 아니었기에, 금십자 기사단의 정찰조들 중 하나의 지휘관으로 있었다. 하지만 그도 그래듀에이트였기에 황제로서의 기본 조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는 셈이었다.
그에 비했을 때, 34세에 즉위하여 95세에 승하할 때까지 무려 61년간을 통치한 황제를 아버지로 둔 카스피아 드 아그립파 황자는 우수한 혈통 덕분에 간신히 그래듀에이트의 시험에 통과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 수행에 전념하기는커녕 황제인 아버지를 믿고 별의별 못된 짓을 다 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행동이 아그립파 황제의 아들 25명 중에서 특별히 더 악했던 것도 아니었고, 웬만한 귀족 자제들은 다 하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방탕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던 로체스터 공작에게는 일찌감치 눈 밖에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상당수의 귀족들은 카스피아를 다음의 황제로 점찍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제의 자식들 중에서 그래듀에이트는 카스피아 혼자였기에, 다음에 황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것을 잘 아는 귀족들은 미리 연줄을 대놓기 위해 자신의 딸을 가져다가 바친 놈도 있었고, 먼 친척 여식을 양녀로 삼은 후 바친 놈은 더 많았다. 궁핍한 천민이나 농노의 반반한 자식을 돈 주고 양녀로 삼은 후 바친 놈은 더더욱 많았고, 자신의 영지에서 살고 있는 미녀를 잡아다가 바친 놈들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았다. 그 외에 각종 귀금속이나 골동품 등 별의별 값진 것들을 다 가져다가 바쳤고,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사냥이나 무도회 등을 열어 주빈으로 모시면서 아부와 아첨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의를 돈독히 쌓아 놓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봉을 황위에 앉히기 위해서 발악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로체스터 또한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위인이 아니었다. 친구였던 키에리가 권력의 핵에서 밀려난 것도, 또 가깝게는 자신도 그 망할 귀족들 때문에 골치를 썩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기에, 로체스터가 이끄는 군부와 귀족들은 거의 10일 가까이 입씨름을 벌였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젠장할! 자신들의 권력에만 눈이 먼 미친놈들 같으니라구!”
궁정 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온 로체스터 공작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황제가 승하한 후, 그는 언제나 궁정 회의에 참석한 뒤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왔기에 레티안에게 그것은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현상이었다.
“무슨 일이시옵니까? 전하.”
그녀는 언제나 판에 박힌 대화가 오간 것을 예상하면서 예의상 던진 질문이었는데, 오늘은 로체스터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이 달랐다. 상대방에 대한 욕을 잔뜩 늘어놓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차기 황제가 누가 될지 결정이 안 된다며, 그 개새끼들이 의회를 소집하여 투표에 의해 황제를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어.”
코린트는 황제의 말 한마디가 법인 상태였기에, 귀족이 주축을 이루는 상원과 평민들로 이뤄진 하원으로 구성되는 코린트의 의회는 사실상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그런데도 의회가 존속하고 있었던 이유는, 평민들과 귀족들이 모여 각종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토의하고 결론을 도출해 내서는 황제께 보고를 올리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도출해 낸 사항을 황제가 허락을 하건 말건 그건 황제만의 권리였지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을 때는 그것의 시행을 허락했기에 평민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또 귀족들에게도 중요한 기관이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귀족들에게 있어서도 의회는 자신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기관도 되는 것이다. 거기에 뽑혀 나온 평민 놈들만 주무르면 모든 일이 순탄하게 돌아가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의회는 군부보다는 귀족들의 입김이 매우 센 곳이었다.
“의회라구요?”
“그래. 나하고 싸워서 결론이 안 나니까 의회를 끌어들인 거야. 젠장! 의회에서 이 일을 처리한다면 보나마나 그놈들이 이길 테지. 그놈들이 그런 자신감이 없다면 왜 의회를 끌어들였겠어?”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요량이시옵니까? 전하.”
“글쎄, 어떻게 대응할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는 비스마가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의회의 그 멍청한 평민 놈들이 그걸 이해할까? 황족이나 귀족들의 감추어진 추잡한 사건들에 대해 그놈들은 잘 모르잖아.”
“하원의 의원들을 설득하시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글쎄, 귀족 놈들도 하원을 설득하고 있을 테니 그건 효과가 없을 거야. 또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카스피아를 민다면 하원에서 비스마를 전폭적으로 밀어 줘도 답이 없잖아. 안 그래?”
상원 1백 명과 하원 1백 명으로 구성된 코린트 의회는 각 의원당 한 표씩의 권한을 행사한다. 그렇기에 상원 쪽에서 모두 다 반대한다면 하원 쪽에서 무슨 짓을 해도 가결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레티안이 난처한 듯 얼버무리자, 로체스터는 더 이상 쓸모없는 궁리를 하고 싶지 않은지 목 뒤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아… 피곤해. 신경을 썼더니 뒷골이 뻐근하구먼. 자네는 그만 퇴근하게. 나는 부하들을 몇 명 불러서 술이나 한잔해야겠어.”
“예,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그날 밤 제1근위대장인 제임스와 금십자 기사단장인 프레드 드 알파레인 후작을 불러들였다. 술이나 한잔하자는 제의를 받고 온 그들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로체스터 공작의 저택을 방문한 것이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술을 얻어먹기는 힘들어 보였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집에 들어온 기사들을 향해 로체스터 공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경들은 나를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옛, 전하.”
“그렇다면 지금부터 명령을 내리겠네. 지금 즉시 복귀하여 기사단을 출동시키게.”
갑작스런 출동 지시에 둘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적이 침공해 들어왔다는 그 어떤 보고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예? 목표는 어디이옵니까?”
“목표? 궁정 회의에 참가할 자격을 가지고 있는 모든 귀족들과 의회의 상원 의원들을 잡아들이고, 황궁 및 의회를 점거해라. 그 외에 불온분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은 원천적으로 차단하면 일차적으로 일은 끝날 것이다.”
“옛, 전하.”
“지금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지만, 이건 반란이 아니다. 귀족들이 원하는 썩어빠진 놈이 아닌 제대로 된 황제를 세우자는 것이다. 알파레인 경.”
로체스터는 금십자 기사단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옛, 전하.”
“귀 기사단에 근무하는 비스마 드 아그립파 후작을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하게. 다음 황제 폐하가 되실 분이니까 말이야.”
“옛, 전하. 맡겨만 주시옵소서!”
알파레인은 고개를 팍 숙이며 호쾌하게 대답했다. 만약 로체스터 공작이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든지 뭐 그딴 소리를 했다면 아마도 지금 자신부터 검을 뽑아 들었을지 모른다. 알파레인도 로체스터 공작의 부하이기 이전에 황실에 대해 충성을 맹세한 기사였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가 죽어 버렸기에 얼마나 쓸 만한 후계자를 내세우느냐 하는 것은 황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스르지 않은 상태에서 개입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스마는 군부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황제였다. 군대 내에서 다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가 부하들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유능한 군인이라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