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들이 공격을 시작한 그날 새벽, 크라레스의 모든 고위급 기사들은 명령을 받고 황궁에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는 스바시에 기사단장인 아그리오스 후작과 치레아 기사단장인 카슬레이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크라레스의 모든 기사단들은 토지에르의 반란 이후 모두 다 수도에 집결해 있었기에 그들을 모두 다 소집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토지에르는 그들을 쓱 훑어본 후 자리에 앉았다.
“이른 시간에 모두들 모이느라 수고했다. 이제부터 폐하의 말씀을 전하겠다.”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황제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은 토지에르로 국한되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토지에르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중계자로서 나섰고, 황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기사들은 토지에르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새벽, 선발대가 아르곤과 알카사스의 국경을 넘었다.”
토지에르의 말에 기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항복 선언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상대국의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감행한다는 말인가? 모든 기사단장들을 대표하여 아그리오스 후작이 항의했다. 총사령관인 루빈스키 공작이 없는 지금 그가 여기 모인 기사단장들 중에서는 가장 계급이 높았기 때문이다.
“선발대가 국경선을 넘다니요? 저희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떻게 그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리고 그 선발대의 지휘관은 또 누구이옵니까?”
“몬스터들일세. 몬스터들은 폐하께 동맹의 우의를 피로써 맹약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들이 본국을 돕겠다고 발 벗고 나선 것이지.”
모두들 벌집을 건드려 놓은 듯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토지에르는 오른손을 슬쩍 들어 조용히 시킨 후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모든 공격은 몬스터들이 한다. 대신 몬스터들이 적의 기사단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기에 그대들을 소집한 것이다. 제2차 제국 전쟁에서 본국을 파멸의 궁지로 몰아넣었던 각국들은, 지금 서로 간의 이권을 놓고 다투고 있다. 본국이 파멸 직전에 놓여 있다고 적들이 자만하고 있는 이때, 바로 지금이 본국에게 남아 있는 최후의 기회임을 경들은 명심하라.”
“옛, 전하.”
“우리의 숙적은 코린트지만, 그들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르곤과 알카사스가 코린트가 쓰러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적 군사력이 약한 알카사스와 아르곤을 먼저 친다면, 코린트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돕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린트는 전번 전쟁에서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 코린트가 적국이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다고 귀중한 전력을 투입할 가능성은 없다. 코린트가 몬스터의 배후에 크라레스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린트가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그때를 이용하여 양 대국을 우선적으로 괴멸시킨다. 그런 후 코린트에게 지금까지 받았던 수모와 원한을 돌려줄 것이다.”
“우와아아!”
토지에르는 손을 번쩍 들어 기사단장들의 환호성을 가라앉게 했다. 그런 후 아그리오스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호명했다.
“아그리오스 후작.”
토지에르의 호명에 스바시에 기사단장인 쥬리앙 폰 아그리오스 후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예, 전하.”
“그대의 기사단은 본국 최고 정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은 휘하 기사단과 함께 제2전대를 거느리고 알카사스 전선을 책임지도록 하라.”
“예, 폐하의 뜻이라면 책임지겠나이다.”
“크로아 후작.”
토지에르의 호명에 중앙 기사단 제1전대장인 발칸 폰 크로아 후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크로아 후작은 아그리오스 후작 다음으로 계급이 높은 인물이었고, 그 실력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예, 전하.”
“경은 치레아 기사단과 함께 아르곤 전선을 맡아라.”
“예, 전하.”
토지에르는 일단 크로아 후작에게 명령을 내린 후, 카슬레이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스바시에 기사단의 경우 중앙 기사단의 한 패거리로 취급되고 있었지만, 치레아 기사단은 조금 얘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카슬레이 백작.”
“예, 전하.”
“경이 맡고 있는 기사단이 치레아 대공 전하의 휘하에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지금 대공께서 안 계시니 그분의 허락을 구할 수가 없군. 황제 폐하의 칙명이니만큼 경이 좀 도와줘야겠어.”
“충심으로 받들겠사옵니다.”
“좋아.”
“론가르트 단장!”
“예, 전하.”
“경은 남은 기사단들을 모두 책임지게. 그중 1개 기사단은 항시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네. 그러다가 각 전선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즉각 출동하도록 하게.”
“예, 전하.”
각 기사단장들에게 지시를 내린 토지에르는 다시금 모두를 둘러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경들은 최선을 다하여 폐하와 제국과 국민들을 위하여 적들을 물리쳐라. 이번 전쟁이 본국에게 남은 최후의 기회임을 명심하라. 자, 가라! 폐하와 제국과 국민들을 위하여!”
“옛, 전하.”
기사들은 모두들 서둘러서 전장으로 떠났다. 폐하와 조국을 위하여 또다시 검을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폐하가 무슨 이유로 전쟁을 재개하려고 하는지 그런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 순간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폐하와 조국을 위하여 뭔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러한 기회라도 주어진 것만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기사들이 조국과 황제를 위한 뜨거운 충성심에 이끌려 저마다 달려 나간 후, 토지에르는 비웃음 어린 어조로 비꼬았다.
“역시 벌레 같은 것들은 이용해 먹기도 편하군. 크하하핫! 황제의 이름만 들고 나오면 못하는 짓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때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지에르는 다시금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며 장중한 어조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예, 전하. 치레아에서 드워프가 도착했사옵니다.”
“그래? 들라고 해라.”
“예, 전하.”
곧이어 땅딸막한 드워프와 함께 두 명의 사내가 도착했다. 토지에르는 품속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서 드워프에게 건네주면서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먼 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네. 이걸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특별히 자네를 불렀지.”
드워프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종잇조각을 펼쳐들며 퉁명스레 물었다. 그는 드래곤이 무서워서 치레아에 잡혀 있는 것이지, 이딴 인간들이 무서워서 잡혀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상대의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게 뭐요?”
퉁명스런 어조에 토지에르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는 곧이어 표정을 다시금 온화하게 유지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갑옷의 설계도일세. 그 뒤에 주렁주렁 늘어지는 쇠사슬들은 모두 마디를 만들어서 저마다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지.”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되게 거추장스러울 텐데…….”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드워프는 도저히 이상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말했다.
“혹시 이 안에다가 엑스시온을 넣을 작정이시오?”
“아닐세. 설계도를 보면 알겠지만, 엑스시온을 넣을 자리는 없지 않은가?”
“이상하군. 그렇다면 이딴 쇠장식이 무슨 필요가 있소? 엑스시온의 마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걸리적거리기만 할 뿐이지.”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가 아닐세. 자네는 그것을 튼튼하게, 아주 튼튼하게만 만들어 주면 돼.”
“좋소. 뭐 요즘 할 일도 없으니 수락하리다. 그건 그렇고 재료는?”
토지에르는 드워프와 함께 온 두 명을 가리켰다.
“저 두 사람이 필요한 재료는 뭐든지 마련해 줄 거야.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나?”
“적어도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거요. 급한 거요?”
“아주 급한 걸세. 누군가의 생명이 달려 있을 정도로.”
토지에르는 깝죽거리는 이 드워프의 생명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드워프는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든지, 아니면 토지에르의 생명이 걸려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 해석했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좋소. 2주일 이내로 만들어 주리다. 설계도를 보아하니 멋은 있을지 모르지만 별로 쓸모는 없을 거요.”
“좋아. 기대하겠네.”
드워프가 나가고 난 후 토지에르는 또다시 지하 감옥 쪽으로 이동했다. 그에게는 지금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세계를 정복할 만한 마계의 부하들도 소환해야 했고, 멍청한 인간들을 속이기도 해야 했고, 흑마법사들을 이리저리 보내어 몬스터들을 규합해야 했다. 또 이 모든 것을 매끄럽게 전개하기 위한 잔머리도 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