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5화 (321/930)

산 뒤편으로 팔콘 기사단의 타이탄이 뒤쫓아 들어가자, 여태껏 열심히 도망치기만 했던 오우거들이 갑자기 뒤로 돌아서며 공격을 가해 왔다. 오우거가 휘두르는 거대한 도끼와 철퇴, 그것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지만 타이탄의 방패를 꿰뚫지는 못했다. 그리고 웬만한 타격으로는 오우거가 두르고 있는 두터운 강철 갑옷을 뚫고 상처를 주기도 힘들었다. 그때부터 치열한 난타전이 전개되었다.

50대의 타이탄과 50여 마리의 오우거들. 처음에는 거의 80여 마리나 되었지만 도망치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죽어 나자빠지고 겨우 50여 마리가 남은 것이다. 팔콘 기사단의 오너들은 이제 곧 이것들을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무리 오우거의 힘이 대단하고, 또 두터운 강철 갑옷을 입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생명체였다. 이쪽처럼 통짜 쇠가 아닌 것이다.

바로 그때, 그들의 뒤쪽에 50여 대의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레스의 지원군이 온 모양입니다, 각하!”

‘몬스터(Monster)’라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인간에게 피해만 입혀온 족속들을 말하는 단어였다. 그렇기에 이 몬스터라는 존재는 모든 인간들의 공통된 적이었다. 그런 만큼 크라레스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들은 지원군이거나 아니면 크라레스 쪽에서 몬스터를 밀어붙이다가 이쪽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크라레스의 타이탄들은 두 종류였다. 크라레스 중앙 기사단의 문장인 히아신스를 흉갑에 그려 넣은 테세우스 30대와 아무런 문장도 그려져 있지 않은 금빛 나는 타이탄 17대였다. 미카엘과 팔시온, 그리고 미디아가 행방불명되었기에 3대의 타이탄이 빠진 것이었다.

어쨌건 알카사스의 기사들은 이 금빛 나는 타이탄을 본 적은 없었지만 치레아 기사단의 타이탄이 금색이라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또 테세우스는 지난번 전쟁에서 알카사스의 기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강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을 만나자 든든한 생각이 앞섰다. 강력한 적이 한순간에 동지가 된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하지만 저마다 검을 빼들고 돌진해 온 크라레스의 타이탄들은 오우거는 본체만체하고, 곧장 알카사스의 타이탄들을 향해 검을 날렸다.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한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십수 대의 타이탄들이 목 뒤쪽에 검이 푹 박힌 채 나뒹굴었다. 그곳은 타이탄의 관절 부분이었고 속에 기사가 탑승해야 하므로 두께가 비교적 얇았다. 그곳을 꿰뚫었으니 속에 타고 있는 기사가 멀쩡할 리 없었다.

곧이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지 눈치 챈 팔콘 기사단은 크라레스의 기사단들과 맹렬한 격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미 십수 대의 타이탄이 먼저 고철이 된 상태에서 그들보다 더 월등한 실력을 지닌 기사들을 상대로 살아남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산 뒤편에서 전개되는 전투도 마찬가지였다. 산 뒤편으로 도망쳤던 오우거 50여 마리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시작으로 전개된 몬스터들의 반격, 재생력이 강한 트롤과의 격전, 이 모든 것은 정말 피비린내 나는 악전고투일 수밖에 없었다.

산 뒤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쇳소리가 아군 타이탄의 생존을 알려 주고는 있었지만, 정작 그들이 이곳으로 달려오지 않는 바에야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커다란 쇠끼리 부딪치는 굉음이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알카사스의 군대는 몬스터들에게 쫓겨 후퇴하기 시작했다.

“흠, 이놈들이 내 부하라는 말인가?”

거드름을 떠는 듯한 용병대장의 말에, 그를 이곳에 안내해 온 기사의 눈초리가 썩 곱지 않게 바뀌었다. 어디 감히 용병 기사 따위가 대 코린트 제국의 기사에게 이따위 반말 짓거리를 내뱉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 기사는 괜히 상대와 말다툼을 벌이는 대신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런 다음 로체스터 전하의 명령서를 전해 주었다.

“내일 즉시 출발하라는 전하의 명령서다.”

기사는 더 이상 용병대장의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은 듯 서둘러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40여 개의 눈동자들이 이 해골 가면을 쓴 인간을 나름대로 품평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 중의 한 명이 앞으로 쓱 나섰다. 구레나룻을 아주 풍성하게 기른 털보 사내였다.

“당신이 우리들의 대장이오?”

용병대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여 답하자 그 털보 사내는 요란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만나서 반갑소. 여태껏 이름만 들어왔기에 어떤 빌어먹을 녀석이 우리 대장인 줄 알 수가 있어야지. 먼저 대장을 처음 만난 만큼 신고식을 해야 하지 않겠소?”

여태껏 용병 생활이라고는 해 보지도 않았던 키에리는 그게 무슨 소린가 해서 되물었다.

“신고식이라니?”

“용병에게 있어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밑천은 이 알몸뚱이 아니겠소?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왔지만,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서 감히 내 실력을 알고 싶다는 거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대가 어느 집구석에서 검술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일단 이름을 알려 줘야 당신을 알 것 아니오? 또 사실 이름을 알려 준다고 해도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기에 그걸 믿기도 힘들고 말이오. 우리들은 당신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는 만큼 당신의 실력을 알고 싶소.”

털보 사내는 동료들이 빙 둘러서 있는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용병대장에게 손짓을 했다. 거기에서 한판 하면서 자신을 꺾는다면 실력을 인정해 주겠다는 몸짓이었다. 용병대장은 가소로운 듯 미소 지으며 털보를 따라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로 이때, 한 용병이 자신의 옆을 통과하려는 용병대장의 발을 슬쩍 걸었다. 그놈은 용병대장이 자빠지기를 기대하고 건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조금 예상과 달랐다. 용병대장의 발이 슬쩍 들리더니 그대로 내리찍어 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비명을 질러 대며 자신의 발등을 주무르고 있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용병대장은 털보에게로 다가갔다. 털보는 슬쩍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검 주위로 살벌하게 요동치는 마나의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한판 해서 서로 간의 상하 관계를 확실하게 해 보자는 몸짓이었다.

그 순간 용병대장의 몸이 거의 3미터의 거리가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난 속도로 털보에게 파고들었다.

“헉!”

털보가 기겁을 하며 놀랐을 때, 그때 이미 그의 멱줄은 용병대장의 우악스런 손에 꽉 잡힌 상태였다. 용병대장은 멈추지 않고 상대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주먹을 휘둘러 털보의 복부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주먹을 몇 방 먹였다.

퍽퍽퍽!

몇 번의 타격음이 연이어 들려오고 나서 털보는 눈이 반쯤 돌아간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음식 찌꺼기가 섞여 있는 거품을 말이다. 멱줄이 꽉 막혀 있으니만큼 위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토사물이 밖으로 힘차게 배출될 길을 찾지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용병대장은 털보의 목을 꽉 움켜쥔 상태에서 높이 들어 올렸다. 털보는 이미 기절해 버렸는지 얼굴색까지 거무죽죽하게 변한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용병대장은 매서운 눈매로 주위를 삥 둘러보며 으르렁거렸다.

“또 누가 내 실력을 시험해 볼 텐가?”

용병들은 털보가 손 한 번 써 보지 못한 채 무지막지하게 박살 나는 것에 간담이 서늘했는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용병대장은 차디찬 시선으로 용병 기사들을 쓱 훑어본 후 털보를 옆으로 내던진 다음 자신에게 배정된 천막으로 걸어갔다.

“저 털보 놈이 깨어나면 나한테 보내. 그리고 여태껏 서로 실력은 다 재봤을 테니 제일 윗줄 세 명도 털보와 함께 오면 될 거야.”

용병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용병들은 그가 천막 안으로 들어간 후에 털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털보는 기절한 채 입으로는 구토물을 꾸역꾸역 쏟아 내고 있었다.

용병대장은 안으로 들어서는 털보와 그 일행들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용병이란 것들은 아무리 돈에 팔려 왔다고는 하지만 일단 살아야 뭔가를 해먹을 수 있기에 각자 자신의 안위를 엄청나게 따지며, 자유분방한 족속들이기에 처음부터 기를 죽여 놔야 편히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상부의 명령을 전달하겠다. 몬스터들이 각국에서 날뛰는 만큼 우리들은 그곳에 가서 놈들의 규모와 세력, 그리고 어떤 놈이 감히 몬스터들을 규합한 것인지 밝혀내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몬스터들이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세력을 응집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용병들은 조용히 서 있었다. 집단행동을 하는 몬스터라고 해 봐야 오크나 고블린 정도였고, 그런 놈 몇 백 마리 정도 때려잡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울 것은 없다고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 네 놈이 네 명씩을 맡아서 1개조를 편성한다. 여기는 군대나 기사단처럼 상하 관계가 확실하지 않으니 그렇게 확실하게 선을 그어 놓는 것이 좋겠다. 너희들이 조장이라는 책임을 맡는 대신 월급을 10골드 더 올려 주마. 이의는 없겠지?”

사납게 노려보며 윽박지르는 것을 보면, 이의를 들어줄 마음은 처음부터 없음이 확실했기에 용병 넷은 일제히 대답했다.

“예.”

“조금 있다가 황궁에서 마법사 두 명이 올 것이다.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첩자들이 재미있는 정보를 보내 왔사옵니다.”

“뭔데 그러느냐?”

“예, 몬스터들이 집단적으로 난동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옵니다.”

“그래? 겨우 몬스터들 따위가 난동을 부려 봤자 별수 있겠느냐? 겨우 그것을 가지고 재미있는 정보라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니다. 이번 난동은 오크 몇 개 부족이 연합해서 일으킨 그런 작은 규모가 아니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며 미네르바가 자신을 향해 시선을 올리자 이블리스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말토리오 산맥과 쟈코니아 산맥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모여 들었사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거의 10만에 가까운 숫자이옵니다.”

“뭣이?”

“예, 이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옵니다만, 전에 렉손 요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시옵니까?”

미네르바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본국 타이탄 2대가 파괴되었지 않았사옵니까? 단독 행동이었다면 몰라도 2대가 함께 나가서 몬스터들에게 파괴된 적은 단 한차례도 없었는데 말이옵니다. 그것을 보면 그때 오우거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래서?”

“그들은 계속 산맥을 타고 남하하여 이번 난동에 참여하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아르곤의 2개 용병 기사단이 하룻밤에 전멸한 것을 보면 오우거 같은 초대형 몬스터들이 함께하고 있다고 봐야 하겠습지요.”

“뭣이? 기사단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건가?”

“예,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하여 판단하건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몬스터들은 남쪽에서 세력을 집결하여 난동을 부리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본국은 또 다른 중흥기를 맞이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타국들이 몬스터들의 등살에 시달리고 있을 때 말이옵니다.”

미네르바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이블리스의 예상이 정확하다면 이것은 또 다른 기회를 그녀에게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의 말도 일리가 있군. 몬스터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해 보게. 그리고 산맥에 접해 있는 요새들의 경비를 강화시키고 말이야. 그런 다음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자구. 본국에게까지 불똥이 튀지만 않는다면 몬스터들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익이 아니겠는가?”

“예, 그렇사옵니다.”

“이것으로 코린트의 힘이 좀 약화될까? 아니면 아르곤의 힘은?”

“코린트는 몰라도 아르곤은 상당히 고생을 할 것으로 추정되옵니다. 난동의 중심에 아르곤의 점령지가 위치하고 있으니까 말이옵니다.”

“좋아좋아! 아르곤의 세력이 약해진다면 본국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겠지. 이렇게 되면 아르곤의 세력권이라 넘보지 못했던 동쪽으로의 진출이 쉬워지지 않겠나? 쓸데없이 빙 둘러갈 필요 없이 직통 항로를 개설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일세. 각국의 세력과 몬스터의 세력을 파악하는 데 모든 첩자들을 풀어 보게나.”

“옛, 전하.”

아르티어스의 과거

“야, 이 망할 녀석아! 내가 그렇게 일렀거늘 어떻게 그렇게도 동족 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냐? 네놈은 꼭 그렇게라도 해서 이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하고 싶냐? 위대한 골드 일족에 너 같은 놈이 태어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더군다나 왜 나한테서 너 같은 개망나니가 태어났다는 말이냐? 응?”

“누가 개망나니라는 겁니까?”

뻔뻔하게도 말대답을 하는 아들놈을 향해 아르티엔은 손바닥을 있는 힘껏 날렸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에구”하는 아들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르티엔은 손으로 직접 이 아들을 가리키는 대신 구타하는 형식으로 그 위치를 알려 준 것이다.

“네놈이지 누군 누구야! 네놈이 태어나고 나서 내가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으니 으이구! 너처럼 있는 대로 말썽만 부려 댄 헤즐링이 있었다는 말은 내 평생 들어 본 적이 없다. 아이구! 내 평생 그렇게 큰 잘못도 없었는데, 왜 너 같은 놈이 태어났느냔 말이다.

근처 드래곤 둥지들을 찾아가서 인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낮잠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을 도둑질하고, 부수고……. 네놈이 헤즐링만 아니었다면 목숨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랐을 거다. 헤즐링이란 점을 악용하여 이웃 드래곤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산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해코지를 했잖아! 엘프들을 이리저리 괴롭히고, 그래서 그놈들이 너를 잡아서 닦달하려고 하면 헤즐링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손도 못쓰게 만들고 말이야. 그러다가 웬만큼 괴롭히는 것으로는 양이 안 찼는지 산에 불까지 질러서 결국은 엘프들이 짐 싸들고 도망가게 만들지 않았냐?”

“그런 적 없습니다. 증거를 대시라니까요.”

“헛소리하지 마! 누가 네놈이 불 질렀다는 걸 모를 줄 알아?”

또다시 작렬하는 아르티엔의 손바닥. 아르티어스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제발 말로 하자구요.”

“말로 하고 있잖아! 내 아들만 아니었으면 벌써 죽여 버렸을 거라는 거 몰라? 그건 그렇고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렇지, 엘프들을 쫓아낸 후에 건드리기 시작한 것은 드워프였지. 별의별 방식으로 드워프들을 볶아 대더니, 나중에는 드워프들이 광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군데군데 설치해 놓은 버팀목을 부숴 버리고 말이야. 그 덕분에 드워프 수십 명이 압사(壓死)하는 바람에 내 원대했던 계획에 얼마나 큰 차질이 왔었는지 네놈은 아느냐? 내 그런 식으로 악질적으로 노는 헤즐링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어.”

“뭐가 악질적이라는 겁니까? 그냥 어렸을 적에 재미 삼아 해 본 것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계시다니…….”

“뭐가 재미 삼아야!”

퍽!

“쿠엑!”

“말썽만 부려 대는 흉악한 놈을 겨우겨우 5백 년을 참아 낸 후에 분가시키며 기뻐한 것이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 후부터 들려오는 것은 몽땅 다 최악의 소문들뿐……. 그래도 그때는 괜찮았어. 네놈이 둥지를 틀고 난 후 처음에 시작한 것은 유희였으니까 말이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검술을 익힌다고 깝죽거리면서 영웅이 되겠답시고 패거리를 끌고 왔다 갔다 하며 말썽을 부려 댔지만, 뭐 그것도 다 젊을 때의 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웅이 되려면 타도해야 할 사악한 마법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마법사를 찾을 수 없자 네놈은 어떻게 했냐?”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또다시 뒤통수를 때린 후 아르티엔은 말을 이었다.

“왜 기억이 안 나? 이번에는 네놈이 그 사악한 마법사가 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냐? 주변에 있던 수많은 국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온갖 못된 짓은 다 해 대고……. 그러다가 두목이 되어가지고는 못된 짓을 하기가 체면상 조금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그다음에는 이리저리 패거리를 끌어 모아서 산적질, 도적질에다가 살인, 강간, 약탈, 방화…….

뭐 그것도 좋다 이거야. 조금 과격하기는 했지만 네놈 나름대로 호비트들과 어울려 유희를 즐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그런데 왜 급기야는 그런 쓰레기들을 모아서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려고 했느냔 말이다. 그린 드래곤 그레사이어가 찾아와서 하소연을 할 때 나는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단 말이다. 알겠냐? 어떻게 드래곤이란 놈이 하고 많은 놀이를 놔두고 드래곤 슬레이어 노릇을 하려고 할 수가 있냐?”

“그거 다 옛날 옛적에 했던 일이라구요. 요즘은 시켜도 그런 짓 안 해요.”

“떽! 어른이 말하면 듣고 있어!”

“쿠엑!”

아르티엔은 호되게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쥐어박은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오우거로 변신하고 닦달하지 않는 것만도 천행으로 여기란 말이다.”

사실 아르티엔이 소녀가 아닌 거대한 오우거로 변신한 채, 인간으로 변신해 있는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향해 일격을 휘둘렀으면 곧장 변사체로 바뀌었을 것이다.

“네놈이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를 하며 많은 드래곤들을 괴롭힐 때 내가 알아봤어야 했어. 그때 드래곤들이 내 얼굴을 봐서 네놈을 용서해 준 것이 이렇게도 내 기나긴 생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길 줄이야……. 그때 반쯤 죽여 놨으면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네놈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겠답시고 설쳐 대며 말토리오 산맥을 휘저어 댄 덕분에 거기에 터전을 잡고 살던 드래곤들이 모두 다 귀찮아서 떠난 것 아니겠냐? 얼마나 네놈의 악행이 하늘을 찔렀으면 드래곤들이 다 떠날까! 아이구, 내 팔자야! 그러다가 나중에는 드래곤 슬레이어 놀이도 싫증이 나니까…….”

어쩌구 저쩌구……. 아르티엔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4천3백여 년을 살아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살아온 증인이었다. 사실 옆에서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그놈이 뭔가 못된 짓거리를 했을 때는 곧장 누군가가 달려와서 고자질을 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엔은 드래곤의 그 엄청난 기억력 때문에 아르티어스가 저질러 놓은 얼토당토않은 짓거리들을 본의 아니게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르티어스에게 잔소리 삼아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르티어스가 수천 년을 살아온 만큼 그 잔소리 또한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으아아악! 나를 제발 죽여 줘요. 이런 생고문을 하지 말고요!’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르티엔의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잔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대들면,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높은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는 노룡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가만히 놔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다. 파워와 실력, 모든 면에서 뒤지니 할 수 없이 오늘도 잔소리를 듣고 있는 아르티어스 옹이었다.

“으아아악!”

한참 훈계(?)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는 아르티어스의 뒤통수를 “딱” 치는 소리가 레어 안을 울릴 정도로 호되게 갈긴 아르티엔은 또다시 잔소리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때린 것도 아닌데 웬 비명이얏! 조용히 하고 듣고 있어! 다 네놈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라고 얼마 남지 않은 귀중한 시간을 바쳐서 설교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 네놈이 나에게서 독립하고 나서 2백 년이 흐른 시점인데 말씀이야. 그때 네놈이 무슨 황당한 짓거리를 했냐 하면…….”

아르티어스는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런 노망난 드래곤의 옛날 옛적 추억담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뭐 간혹 가다가 뒤통수가 번쩍번쩍하며 골이 띵해 왔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보배와도 바꿀 수 없는 아들 녀석이 어디에 잡혀 가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여기에 잡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놈은 지금쯤 아비가 구출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르티엔의 옛날 옛적 추억담을 듣고 있자니, 장난 삼아 계집들을 잡아다가 저질렀던 못된 짓거리들이 머릿속에 확연히 떠올랐다. 노예 상인에게 팔려가며 천벌을 받을 거라고 바락바락 저주를 퍼붓던 계집부터 시작해서, 네놈의 딸년도 이런 일을 당할 거라는 물귀신 저주 등등 수없이 많은 저주를 들었지만, 그때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놈이 사라지고 나니 그때 일이 덜컥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러면서 아르티어스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오한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원체 그런 짓을 소싯적에 많이 해 봤기에, 계집이 잡혀가면 무슨 일을 당할 것인지 확연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을 조금이라도 덜 당했을 때 아들놈을 구출하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일이 꼬이는 것일까? 갑자기 통곡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아르티어스 옹이었다.

『<묵향14 - 외전 : 다크 레이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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