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4화 (330/930)

라나의 시녀가 된 다크

다크 일행이 고용인의 안내를 받아 실내로 들어서자 콧수염을 매우 짧게 다듬은 단정한 모습의 사내가 아는 척을 했다. 너무 말라서 그런지 약간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흠이었지만, 그는 일행을 안내한 고용인과 달리 매우 고급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인상 좋은 사내였다. 그는 중개인의 설명을 듣자 섬세한 시선으로 라나를 이리저리 뜯어본 후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게 목소리 또한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아마도 지체 높은 귀족 집안의 집사인 만큼 그런 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으리라.

“과연! 이 정도면 공녀님의 마음에 드실지도 모르겠군요. 자, 이리로 오시죠.”

집사가 일행을 안내한 곳은 공녀가 묶고 있는 방이었다. 공녀는 호화로운 물건들을 잔뜩 쌓아 놓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집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투덜거렸다.

“알카사스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하더니, 영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 전에 왔을 때보다 형편없는 것 같아. 크라레스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최고급 물품들은 대부분 알카사스에서 제작된 것이 많았다. 알카사스는 그 뛰어난 마법 실력을 십분 이용하여 산업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 알카사스에서 전쟁이 벌어졌으니, 자연히 최고급 물품들의 공급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저, 공녀님. 부탁하신 호위병이 도착했습니다.”

“호위병? 저 엘프 말이야?”

“예.”

공녀는 찬찬히 라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대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알카사스라면 노예 시장에 가서 손쉽게 엘프를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코린트는 공식적으로는 엘프를 노예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비공식적인 밀매 루트를 통해 변태 성욕자라든지, 뭐 그런 놈들에게 공급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공식적’으로 엘프는 ‘비매품’이었다. 그렇기에 여태껏 자신에게 허락된 제한된 공간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공녀는 여태껏 엘프를 구경한 적이 없었다. 공녀는 그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며 이모저모 뜯어보다가 이윽고 결정한 듯 말했다.

“좋아, 저 정도면 그 얄미운 엘리리아의 콧대를 꺾어 놓을 수 있겠어. 전에 만났을 때 자기 호위병이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아름다운지… 별의별 자랑을 다 늘어 놨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앙갚음을 해 줘야지. 당장 계약해.”

“예, 공녀님.”

공녀의 말을 들은 다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공녀는 대체 호위병의 존재를 뭐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호위병을 무슨 장난감쯤으로 생각하지 않고서야 저따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호위병 선택 요건 중의 첫 번째는 외모가 아닌 실력이었다. 호위병이라면 그 어떤 극악한 조건이 닥쳐와도 주인을 지켜 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집사는 일행을 임시 집무실로 데리고 돌아갔다. 집사는 집무실의 한쪽에 놓인 책상에 앉은 후, 서랍을 열고 서류들을 꺼내 들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서로 조건을 따져서 좋은 방향으로 계약을 맺었으면 좋겠군요. 그래, 금액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라나는 잠시 생각을 한 후 집사에게 되물었다. 라나는 용병들을 따라서 여행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듯 귀족의 집에 고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대충 어느 정도 선에서 월급이 책정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집사님은 얼마 정도를 예상하고 계십니까?”

“일단은 한 달에 50골드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영지로 돌아갈 때까지만 그렇게 하고, 일단 영지에 도착한 후에 장기 계약을 맺기로 하죠. 공녀님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한다면 어쩌면 두 배, 혹은 세 배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용병들의 경우 한 달 10골드, 혹은 그 작전에서 살아남았을 때 50골드 하는 식으로 급료를 책정했다. 물론 후자가 전자의 경우보다 조금 더 후한 급료를 주게 되지만, 작전이 실패했을 때는 땡전 한 푼도 못 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것을 따지고 본다면 50골드면 꽤 후한 월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고용할 용병의 실력 테스트는 한 번도 해 보지 않고 말이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아이는…….”

라나가 다크를 가리키며 서두를 꺼내려고 하는데 집사가 그것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공녀님께서는 당신만을 고용하기를 원하신 겁니다. 당신의 동료가 아니구요. 물론 시종은 두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시종의 급료까지 제가 지불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은 잘 아시겠지요? 일단 급료가 만족스러우시다면 여기다가 서명을 해 주십시오.”

집사의 말인즉슨, 저 새파란 무녀를 하녀로서 두는 것은 상관없지만, 동료로서는 절대로 둘 수 없다는 뜻이었다. 라나는 잠시 다크를 바라봤다. 그녀의 의향을 물은 것이다. 다크는 여태껏 그래왔듯이 결과만을 생각할 뿐, 그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든지 별로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것을 본 라나는 재빨리 집사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집사는 유려한 필치로 계약서를 작성해서는 라나에게 건네 서명을 받아 냈다. 집사는 라나의 서명이 된 계약서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본 후 그것을 서랍에다가 집어넣으며 밖에다가 대고 외쳤다.

“한스!”

“예.”

“새로 오신 공녀님의 전속 경비다. 내가 비워 두라고 했던 남쪽의 그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예, 집사님.”

그런 다음 집사는 라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계약서에 서명함으로 인해서 이제 그녀도 이 집안의 고용인이 되었기에, 그녀에게 하는 말투는 어느새 하대로 바뀌어져 있었다.

“한스를 따라가게. 자네의 방을 안내해 줄 거야.”

‘루비의 눈’이라는 고급 호텔은 중간에 있는 큰 규모의 본 건물과 여러 채의 호화 주택들로 이루어진 별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체 높은 귀족이라면 당연히 그에 딸린 식구들이 많다. 호위 기사, 호위병, 시중들 시녀나 시종들, 짐꾼들, 그리고 호위 기사의 시종들 등등……. 그리고 그들의 수는 주인의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증가했다. 꼭 법으로 어떤 지위에서는 호위병이나 수행원의 수를 얼마만큼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정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주인의 지위가 높다면 좀 더 비옥하고 더욱 넓은 영지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그들의 부(富)와 직결되었다. 일단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돌아다니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간혹 산적이나 몬스터들이 출몰하기도 했지만 지위가 높은 자일수록 그 호위병의 수는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코린트의 변방도 아니고 이런 중심부에서 그런 걱정을 할 이유는 없었다. 호위병과 시종들을 대규모로 이끌고 다니는 것도 다 자신들의 지위와 풍요로움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이런 지체 높은 귀족들이 애용하는 호텔이라면 당연히 귀족이 이끌고 다니는 호위병이나 시종들에 대한 배려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호텔의 치안 상태가 아무리 좋아도, 혹은 아무리 서비스가 좋다고 해도 자신의 호위병이나 시종들과 따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곧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는 방법이었고, 오랜 시간 자신을 모셔 온 시종들이 훨씬 더 눈치가 빠를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급 호텔일수록 최고급 귀빈들을 위해서 호텔의 다른 손님들과 격리된 독립된 거대한 주거 구역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나와 다크가 한스라는 사내에게 안내된 방도 그것들 중의 하나였다. 귀족의 고용인이 사용할 방이라서 그런지 별로 크지도 않았고, 방금 전 공녀라는 소녀의 방처럼 고급스런 가구도 없는 간단한 구조의 침실이었다. 라나는 자신들의 짐을 차곡차곡 간소한 모양의 옷장에다가 세심하게 챙겨 넣으면서 말했다.

“일단 달리 숨을 곳도 없으니까 이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수색 작전이 시작된다고 해도 귀족을 상대로 함부로 뒤지기에는 무리가 있을 테니까요.”

“좋을 대로 해.”

인신매매범에 팔리다

다음 날 다크는 일어나서 무녀 복장 대신에 보통 시녀들이 입는 허름한 옷가지를 입었다. 무녀의 옷을 입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그들 틈에 녹아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들 자신을 라나의 하녀쯤으로 생각하지 절대로 여행 동료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과거에 살수로서 생활했을 때,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녹아 들어가는 방법을 혹독하게 교육받았던 다크였다. 그렇기에 하녀로 분장을 한 것인데…….

“이번에 공녀님의 호위 기사가 고용되었다고 하더니, 그분의 시녀가 너인 모양이구나.”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하녀가 다크를 보고 말을 걸었다. 다크가 그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빨리 따라오너라. 그렇게 빈둥대고 있으면 어쩌니?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많단 말이야.”

다크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 하녀를 따라가서 일을 해야만 하는가? 거기에다가 자신은 라나의 시녀로 되어 있는 것이지, 공녀의 시녀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될 수 있으면 가냘픈 미소를 지어 보이며 항변했다.

“저… 저는 엔테로아 님의 시녀인데요.”

그 하녀는 콧방귀를 뀌며 같잖다는 듯 말했다.

“흥, 겨우 고용 무사의 시녀인 주제에 내 말을 못 듣겠다는 거냐?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별 고약한 년을 다 보겠군. 너 이리 좀 따라와.”

그 하녀는 물정 모르는 꼬마 계집에게 신경질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 신참은 상하 관계에 따른 법칙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겨우 고용 무사의 하녀 주제에 대 귀족의 하녀 나으리와 맞먹으려고 들다니 말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슬며시 약이 오른 다크 또한 맞받아쳤다.

“뭐야? 누가 따라오라면 무서워할 줄 알아?”

하녀가 데리고 간 곳은 그 근처에 있는 아무도 없는 빈 방이었다. 다크가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하녀는 곧장 본색을 드러냈다.

“이것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말대답이야? 나는 드루이드 후작 가문의 하녀란 말이야. 어디 근본도 없는 천한 것이 알량한 무사 나부랭이를 믿고…….”

말을 하며 하녀는 다크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바닥을 날렸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아주 손쉽게 저지당해 버렸다. 다크가 날아오는 그녀의 손바닥을 아주 간단하게 낚아챘던 것이다.

“훗! 감히 누구한테 손찌검을 하려고 들어? 죽고 싶냐?”

다크가 손에 점점 힘을 주자 하녀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상대는 가냘파 보이는 소녀인데도 그 손아귀 힘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신참내기 하녀를 길들이겠답시고 깝죽거리던 하녀는 뭔가 일이 생각대로 풀려 가지 않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더 이상 연결되지 않았다.

짝!

“꺄악!”

방금 전 그 하녀가 신참 하녀를 상대로 써먹으려고 했던 그것, 그것이 정반대로 자신의 뺨에서 터진 것이다. 그리고 한 3분 정도? 그동안 그 하녀는 정말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호되게 구타(?)를 당했다. 온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대는데 어찌 머리에서 딴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하녀를 싸늘한 눈빛으로 흘끗 바라본 그 신참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다음에 또 한 번 더 귀찮게 굴었다가는 죽을 줄 알아. 이제는 아주 개나 소나 다 나하고 맞먹자고 드는군. 나 참! 더러워서.”

툴툴거리면서 나가는 다크를 보며, 그 하녀는 이빨을 뿌드드득 갈면서 원한에 찬 시선을 보냈다.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두들겨 맞았으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만도 하련만, 그 하녀는 전혀 그럴 기색이 아니었다. 만약 길 가다가 만난 사이였다면 하녀로서도 그날 재수 없었다고 투덜거린 후 침 한번 ‘퉤’ 뱉고 끝냈겠지만, 범인이 한 지붕 아래 있으니 당연히 복수할 기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년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뿌드드득! 두고 보자! 내 저년을…….”

원래가 두고 보자는 놈은 하나도 무서울 것이 없고, 또 ‘두고 보자’는 저주성이 다분한 글귀는 힘없는 자들이 내뱉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행일치를 주장하듯 그날 저녁에 다시금 다크를 만나러 왔다.

똑똑!

“예.”

하녀는 슬쩍 문을 연 후에 대답한 사람이 엘프라는 것을 알고는 두리번거리며 그 얄미운 계집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으므로 공손을 가장한 어조로 표정을 부드럽게 하여 물었다.

“저, 하녀는 어디로 갔습니까?”

“내가 포도주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무슨 일이지?”

“그런 일이라면 저에게 지시를 해 주셨으면 되는데, 괜한 일을 하셨군요. 딴 곳에서는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공녀님의 지시로 무사님들이 드실 좋은 술을 언제나 준비해 둔답니다. 물론 과음하시는 것은 안 되겠지만요.”

“아,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너에게 부탁하기로 하지.”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하녀는 깍듯이 인사를 한 후 방문을 나섰다. 그런 후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뇌까렸다. 안 그래도 밖으로 유인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도 상대가 벌써 밖에 나가 있다니…….

“차∼안스, 후후훗.”

그런 다음 부리나케 그 얄미운 년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려 나갔음은 물론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저년이야.”

하녀는 포도주병을 들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그러자 하녀를 따라오고 있던 남자들 중에서 수염을 잔뜩 기른 덩치 좋은 사내가 감탄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야, 아주 삼삼하게 생겼는데? 내다 팔면 제법 비싸게 받을 수 있겠어.”

“내가 말했잖아. 물건 하나는 끝내 준다고 말이야.”

“뒤탈이 날 염려는 없는 것이겠지?”

“안심하라니까. 저년은 후작 가문의 하녀가 아니라 떠돌이 무사가 고용한 하녀야. 뒤탈이 날 염려는 절대로 없어. 그리고 3일 후면 영지를 향해 출발할 거야. 그 엘프 무사가 하녀를 찾으려고 해도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

“흐음, 좋아.”

털보는 품속에 손을 넣어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하녀에게 건넸다.

“자, 약속한 5골드야.”

하녀는 주머니 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살짝 이빨로 깨물어서 진짜인지 확인한 후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는 내 눈앞에 저 계집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 줘.”

“염려 말라니까. 다시는 못 보게 해 주지.”

하녀는 금화가 든 주머니를 자신의 품속에 슬쩍 집어넣은 후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너무 험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제값을 받으려면 물건의 상태가 좋아야 하니까 말이야.”

“염려 말라구. 이런 장사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녀가 떠나고 난 후 털보는 주위의 사내들에게 말했다.

“자, 시작하자. 저 정도라면 못 받아도 60골드는 받을 수 있어. 흠집 안 나게 조심해서 모셔라.”

“염려 마십쇼, 두목.”

다크는 포도주를 사 들고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은 라나가 아닌 자신이 마실 것이었는데, 라나 보고 사 오라고 하면 남들이 보기에 조금 이상할 듯하여 직접 움직이게 된 것이다. 사위에 어둠이 깔려 있었기에 지나다니는 행인은 거의 없었다. 이때 그녀의 뒤쪽에서 발걸음을 빨리해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추격자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크는 걸어가는 속도를 조금 더 줄이면서 그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두 명의 사내는 다크를 지나쳐 앞쪽으로 바쁘게 걸어가 버렸다.

아무리 탈출하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너무 과민 반응을 보인 것 같다고 내심 투덜거렸다. 앞쪽으로 지나쳐 간 두 사내는 옆으로 뚫려 있는 골목길의 앞쪽에 서서는 뭔가 대화를 나누면서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뭔가를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앞으로 걸어가는 다크와의 거리는 자연히 다시금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뒤쪽에서 남자 두 명이 달려오면서 외쳤다.

“이봐,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방금 왔어.”

그러면서 어쩌구저쩌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크는 그 네 명의 사내들이 만나는 자리에 우연히 지나가게 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앞과 뒤에 두 명씩, 완전히 포위된 입장이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았다. 곧이어 자신은 앞의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갈 것이고, 뒤에서 오는 두 놈은 앞의 두 놈과 만나서 술이라도 마시러 갈 것이니까 말이다.

바로 이때, 뒤쪽에서 다가오던 한 사내가 우악스럽게 다크의 목을 뒤에서 감아 왔다.

“조용히 해!”

사내는 여태껏 계집들을 납치하면서 몇 번이나 써먹어 왔던 그 수법을 다시금 재현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여자를 제압한 다음 저 골목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꽁꽁 묶어서 푸대 자루에 집어넣은 후 자신들의 소굴로 운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초장부터 뭔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뒤에서 상대가 손을 감자마자 다크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상대는 앞쪽으로 크게 돌면서 패대기쳐졌다.

“어이쿠!”

“이런 제길! 제법 반항을 하는군.”

옆에서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그녀를 뒤쪽에서 껴안았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는 그 순간 옆구리에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소녀가 약간 몸을 비틀면서 왼손으로는 포도주병을 꼭 껴안고 오른쪽 팔꿈치로 상대의 옆구리를 인정사정없이 가격한 것이다.

“헉!”

엄청난 통증으로 상대의 손이 조금 느슨해지는 그 순간, 소녀는 오른쪽으로 돌아갔던 허리를 다시 왼쪽으로 튕기며 순간적으로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하여 포도주병을 껴안으며 자로 잰 듯 왼쪽 팔꿈치로 상대의 목을 가격했다. 사내는 목을 가격당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동료 둘이 당하는 것을 보고 구원차 달려온 털보와 또 다른 사내의 운명도 앞서간 녀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어렸을 때는 소매치기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도둑, 강도, 강간, 인신매매를 일삼는 흉폭한 무리들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약자들이나 괴롭히는 인간쓰레기들이었다. 특별히 격투술 따위를 교육받은 적이 없었던 그들은 부녀자들이나 나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칼로 협박할 줄이나 알았지, 이렇듯 본격적으로 수련을 쌓은 무사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힘을 쓸 수 없는 소녀인 상태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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