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6화 (332/930)

“전하, 몇 가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사옵니다.”

이블리스의 말에 미네르바는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예, 드디어 코린트에서 치레아 대공을 처형했다고 하옵니다.”

“뭐야!”

미네르바는 놀라서 외쳤다. 여태껏 미끼를 던져 놓고 고기가 그것을 물기를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이 너무 잘 풀린 것 같아서 오히려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그것이 정확한 정보인가?”

“예, 한 가지 의문점을 제외한다면, 썩 신뢰성이 있는 정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의문점?”

역시 뭔가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았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네르바가 물었다.

“그래, 의문점이라는 것이 뭔가?”

“예, 치레아 대공은 코린트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혀 왔던 숙적이옵니다. 그런 그녀를 처형했는데,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사옵니까? 오히려 대대적으로 선전을 하며 기사들 및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켜도 시원찮을 텐데 말이옵니다.”

“당연한 의문이로군. 하지만 그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코린트는 치레아 대공의 목을 전쟁터에서 벤 것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만약 코린트가 그녀의 목을 전쟁터에서 날린 것이라면 사방에 선전을 해 대며 축배를 들 일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그녀의 죽음에는 본국의 비열하기 그지없는 수단이 사용되었고, 또 코린트는 그 연장선상에서 그녀를 인도받아 처형한 것이야.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지. 그녀를 죽였다는 것을 부하들에게 알린다면 당연히 부하들의 사기가 올라가겠지만, 그녀를 죽이는 과정에서 사용된 그 치사하기 그지없는 일련의 사건들이 공개된다면 그래도 사기가 올라갈까? 또 기사도를 숭배하는 기사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아, 예, 제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2단계 작전을 시작해도 괜찮겠사옵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좀 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세나. 이번 작전은 그 대가가 큰 만큼 위험도 또한 너무 커. 작전이 성공하면 코린트가 멸망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 본국이 멸망한다. 가능한 한 철저하게 확인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지.”

“예, 전하. 그렇게 첩자들에게 이르겠사옵니다.”

이블리스는 서류를 미네르바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첩자들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이번 몬스터들의 난동이 상상 이상의 규모인 것 같사옵니다.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거의 연이어 벌어지고 있으며, 두 나라 다 기사단들을 파견한 상황에서도 난동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본국에서도 몬스터들의 난동에 대비하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글쎄, 아직까지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나? 몬스터들은 알카사스와 아르곤만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두 나라와 열심히 잘 싸우고 있지 않나? 그리고 아직까지는 코린트가 그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있어. 아마 코린트도 우리들처럼 눈치를 보고 있겠지. 알카사스와 아르곤의 국력이 고갈되기를 말이야. 그런 다음에야 코린트는 전쟁에 동참할 테지. 그리고 그때쯤 본국도 움직이기 시작해야 할 거야.”

“그렇다면 언제쯤이 좋겠사옵니까?”

“일단 코린트가 참전한 후에 계획을 세워 나가도 늦지 않을 거야. 물론 코린트가 참전하기 전에 몬스터가 지리멸렬할 정도라면, 본국이 참여해도 얻어 낼 것은 없지 않겠나? 그들 스스로도 막아 낼 수 있을 테니, 본국이 도와주는 대가로 무엇을 얻어 낼 수 있겠나?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야.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힘을 비축하는 것이 좋겠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블리스가 보고를 끝내고 나간 후 미네르바는 포도주를 한 잔 따라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말했다.

“자, 로체스터 공작. 그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닭대가리 아르티어스

“저… 아버지!”

무려 일주일에 걸쳐 설교라고 하기보다는 신세 한탄에 가까운 주절거림을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설교를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것이다.

“왜? 내가 틀린 말을 했냐?”

그러면서 슬그머니 올라가는 아르티엔의 주먹을 힐끗 쳐다보고,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말했다.

“그건 아니구요.”

“그럼, 뭐냐?”

“며칠 동안 저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목은 안 마르세요? 아버지를 위해서 아주 좋은 포도주를 장만해 뒀습니다.”

아르티엔은 갑자기 자신에게 웃는 낯짝을 보이며 포도주를 권하는 아들놈을 향해 수상쩍은 시선으로 빈정거렸다.

“호오, 그래? 없던 효성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테고……. 너 같은 닭대가리가 웬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냐?”

닭대가리라는 말은 아르티어스가 아르티엔에게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으면서 마법을 배울 때 불렸었던 별칭이었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배우는 속도가 자신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자 닭대가리라며 엄청난 구박과 박해를 가했었다. 아르티어스의 그 삐뚤어진 성격도 알고 보면 다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르티어스가 마법을 배우는 속도는 결코 딴 헤즐링에 뒤처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딴 헤즐링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태껏 다른 헤즐링이 마법을 배우는 것을 보지 못했던 아르티엔의 기대치에는 엄청나게 못 미쳤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아르티엔은 모든 것은 무시하고 마법만을 마스터한 좀 이상한 드래곤이었고, 또 마법에 있어서 아르티엔을 따라갈 수 있는 드래곤은 극히 드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자신의 어렸을 적 기억을 되살리며 자신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이 덜떨어진 아들놈을 게으름 부린다며 무지막지하게 닦달했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계속된 부자간 불화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씨, 닭대가리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욧!”

여태껏 그런대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갑자기 얼굴색이 변해서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슬그머니 후퇴했다.

“그랬었나? 이거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역시 늙으면 죽어야 돼.”

얼렁뚱땅 말끝을 흐리는 아르티엔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그것도 4천 살이 넘은 드래곤의 별명으로 닭대가리는 좀 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일 뿐, 아직까지도 아르티엔의 눈에 아르티어스는 말썽꾸러기 헤즐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쳇! 그렇게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 양반이 4천 년도 전에 있었던 일을 낱낱이 기억해?’

하지만 그것을 입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아부성 짙은 미소를 얼굴 가득 뿜어내며 공손히 말했다.

“저도 이제 에인션트 드레곤이 다 되어 간다구요. 예전의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르티어스가 아무리 자신의 나이를 강조해도 아르티엔의 눈에 비치고 있는 그는 말썽꾸러기 헤즐링일 뿐이었다. 그것도 철이 들려면 한참 먼…….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의심스런 눈길을 던지면서 투덜거렸다.

“그건 그렇고, 웬일로 내 생각을 다 해 주느냐? 오래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정색을 하고는 섭섭한 듯 말했다. 그의 표정과 어투로 봤을 때 이 세상에 ‘불효자식’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는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누가 뭐래도 저는 아버님의 하나뿐인 자식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 준다는 놈이 분가한 후 코빼기도 안 보였냐? 무려 3천 년하고도…….”

또다시 지겨운 설교가 시작될 순간이었기에,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막았다.

“그건 오해십니다. 몇 번이나 찾아뵙고 싶었지만, 여태껏 아버님의 명성에 누만 끼쳐 드렸기에 솔직히 찾아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대신 아버님과 만났을 때를 위해서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포도주를, 아버님을 생각하며 구입해 뒀었죠.”

사실은 아르티엔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그 자체가 싫었기에 가 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만큼 아르티엔과 얽혀 있는 기억은 부자간이 아니라 사제지간보다도 더한 강압적인 교육을 하려는 부친과 그것에서 해방되려는 아들과의 어긋난 시련의 역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부친의 마수(魔手)에 떨어져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닌가?

아르티어스는 여태껏 별로 쓰지도 않던 ‘아버님’이란 말을 계속 집어넣으며 슬쩍 입에 발린 말로 아르티엔을 설득했다. 아르티엔은 매우 포도주를 좋아했기에 그 정도 사탕발림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랬냐? 오오, 며칠 동안의 설교가 아주 큰 효과가 있었구나. 네 녀석이 그런 생각까지 다 하게 만들어 준 것을 보면 말이다. 좋다, 목도 컬컬한데 한잔하면서 부자간의 오붓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로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행여나 포도주 가지러 가는 척하면서 도망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게다.”

“제 머리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구요. 어떻게 아버님을 앞에 두고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르티어스는 변명을 늘어놓은 후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 창고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창고 구석구석을 뒤져서 오래전에 숨겨 뒀던 것을 찾아냈다. 그가 꺼낸 병에는 핏빛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전에 미네르바가 그에게 뇌물로 바쳤던 최고급 포도주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병이었다.

아들놈이 행여라도 훔쳐 먹을까 봐 레어까지 들고 와서 창고 깊숙이 감춰 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아르티어스가 아끼던 것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미끼의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또다시 아르티어스는 창고 구석을 여기저기 뒤져서 작은 스위치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벽이 스르릉 열리면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수천 개도 넘는 작은 병들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그 병들 중에서도 ‘독약’이라고 쓰인 곳에 놓여 있는 병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찾다가 그중 하나를 꺼내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늘게 떨리는 그의 손이었다. 아르티어스의 손은 그 독약병을 잡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기나긴 한숨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아무리 아버지를 싫어하는 아르티어스라고 하더라도 그를 독살하는 것만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제기랄!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아버지니까 할 수 없잖아.”

다시 아르티어스의 눈길이 뒤지기 시작한 곳은 ‘수면제’ 쪽이었다.

‘가능한 한, 아주 강력한 놈으로…….’

아르티어스가 이리저리 뒤지다가 선택한 작은 푸른색 약병, 단 한 방울로도 코끼리를 한 달 동안 잠재울 수 있는 최강의 수면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약병에 쓰여 있는 주의 사항처럼 그 약의 효력만큼이나 막강한 부작용이었다. 이 약은 약의 안정성은 아예 무시한 채 효력만을 중시해서 만든 것이기에 부작용이 심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방금 전 독약병을 집으려고 하면서 망설인 것과는 달리 매우 과감하게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직접 독약을 사용해서 살해하는 것은 못할 노릇이겠지만, 그 약의 부작용 때문에 죽은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자위할 여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조심조심 포도주병의 마개를 뽑은 후, 그 약병을 조심스럽게 살짝 기울여 한 방울 집어넣었다. 지금 그에게는 아들을 구해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었다. 설혹 재수가 없어서 아버지가 부작용 때문에 사망한다고 해도 아르티어스는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 장수를 누렸기에, 이제 더 이상 산다는 것에 대해 미련이 없으실 것이 분명했다. 뭐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자라 온 환경상 효심(孝心)이라는 것에 대해서 교육받은 적이 전무한 이 아들놈은 그럴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수면제가 든 병을 처음 놓여 있던 곳에 집어넣으려다가 다시 꺼내어 한 방울을 더 추가했다. 아무래도 한 방울로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만큼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은 더욱 증가하겠지만…….

“여기 있습니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병과 투명한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아버지 앞에 다시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르티엔은 슬쩍 병을 보는 듯 가장하며 조심스럽게 포도주병의 밀봉 상태를 점검했다. 그러다가 병에 붙은 이름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이건 크루마 황실에서나 마신다는 ‘로얄 크루나’가 아니냐?”

“예, 아버님. 오래전에 아버님 생각을 하며 구입해 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아버님께 가져다 드릴 염치가 없어서…….”

아르티어스는 슬쩍 뒷말을 흐렸다. 더 이상 말을 하다가는 이 포도주를 포기해야만 하는 아쉬움이 목소리에 녹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포도주는 아르티어스가 아끼고 아꼈던 것이었다.

아르티엔은 입맛을 다시며 포도주병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렇게 좋은 것을 구했으면 빨리 가져와야지.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났냐? 혹시 엘프리안까지 날아가서 황제를 협박한 것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나이가 있는데, 쪼잔하게 포도주 몇 병 구하겠다고 그 수고를 하겠습니까?”

“나도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네놈이 크루마 황궁에 모습을 드러내며 뒤집어엎었다는 소문은 못 들었으니까 말이다.”

아르티엔은 과거 아르티어스가 황금에 눈이 뒤집혀서 말토리오 산맥 인근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협박하여, 금은보화를 긁어 들이던 시절을 슬쩍 꼬집어서 말한 것이었다.

“아버님만 늙은 게 아니고 저도 늙었다구요. 어릴 때나 그런데 돌아다니지, 나이 들어서까지 그런 망령된 짓을 하겠습니까?”

아르티엔은 병에다가 무슨 장난을 쳐 놓지 않았는지 세심하게 살펴봤다. 하지만 아주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이 확실했다. 병의 겉만 봐 가지고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기에, 그는 아르티어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포도주 마개를 따며 투덜거렸다.

“글쎄다, 하고도 남을 놈이니까 하는 말이지.”

투덜거리면서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힐끔 쳐다봤다. 뭔가 기대에 가득 찬 눈빛.

‘아무래도 저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언제나 사고 치기 전에 꼭 저런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확증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귀중한 선물 공세를 펼치는 아들을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르티엔은 슬며시 시치미를 떼고는 말했다.

“나 혼자서만 마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술이구나. 자, 너부터 한잔해라. 오랜만의 부자 상봉을 축하하며 함께 한잔하자꾸나.”

역시나 아르티엔의 예상대로 아르티어스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제가 감히 아버님 앞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아버님께 술주정 한 번 했다가 쥐어 터…, 아니 절대로 아버님 앞에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소중한 맹세를 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당황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아르티어스를 본 아르티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그머니 지었다.

‘역시 뭔가 못된 꾀가 숨어 있구먼…….’

하지만 아르티엔은 짐짓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투덜거렸다.

“여태껏 네 녀석이 살아온 과정을 낱낱이 알고 있는 내 앞에서 감히 그딴 소리를 하다니…….”

“저도 개과천선했다구요.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과거사에 얽매여 계십니까? 개과천선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저를 위해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르십니까?”

“어디 보자…….”

아르티엔은 애주가답게 포도주잔을 집어 들고는 향기를 맡는 척했다.

“오! 정말 향기롭군.”

그러면서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반응을 살폈다. 아르티어스는 그런 줄도 모르고 활짝 미소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헤헤… 자, 목도 마르실 텐데 한잔 쭈욱 들이켜십시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의 기대 어린 눈길을 받으며 포도주를 조금씩 음미하면서 한 잔을 다 마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에 손을 갖다 대며 숨이 꽉 막히는 듯 버둥거렸다.

“으윽! 큭큭…….”

역시 수면제의 효력은 대단했다.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해독의 주문 하나 외울 시간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뭔가 이상이 있음을 깨닫고 발버둥을 치고 있기는 하지만 곧이어 아버지가 깊은 수면에 빠질 것이라고 확신한 아르티어스는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거기 누워서 한 달 정도 푹 쉬십쇼. 그때쯤엔 일이 끝났을 테니까요. 설혹 부작용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시신은 나중에 돌아와서 후하게 장사지내 드립죠.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헤헤헤.”

아르티어스는 지긋지긋했던 아버지와의 이별을 기뻐하느라 미처 아르티엔이 쓰러지는 순간에 보이는 행동에서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르티어스는 절대로 독약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슬그머니 잠들어야 정상인데, 왜 큭큭거리면서 꼭 독에 중독된 듯 버드럭거리다가 잠잠해졌단 말인가?

서둘러서 아르티어스가 내빼고 난 후, 쓰러졌던 아르티엔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어쭈? 뭔가 이상해서 중독된 척했더니, 나보고 여기서 한 달 동안 퍼질러서 자라고? 그렇다면 그 지독한 록사나의 뿌리를 주원료로 만든 수면제를 썼다는 소리구먼. 사망률 40퍼센트가 넘는 수면제를 나한테 먹여? 이런 망할 녀석!”

아르티엔은 투덜거리다가 “우욱”하면서 붉은 덩어리를 토해 냈다. 그것은 마나의 막에 싸여진 방금 전에 마셨던 로얄 크루나였다. 완벽하게 마나의 막에 둘러싸였기에 단 한 방울도 그의 체내에 흡수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티엔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그 붉은 덩어리를 버리려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는 손짓을 해서 다시 병 속에 담았다. 그런 다음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품속에서 끄집어 낸 것은 작은 약병이었다. 아르티엔은 그 안에 들어 있던 액체를 마나를 이용해서 조금만 꺼냈다. 푸른색 투명한 액체의 자그마한 방울이 진주 알갱이처럼 병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아르티엔은 그 약병을 밀봉해서 다시 품속에 집어넣은 후 손가락을 그 액체 방울 쪽으로 향했다. 아르티엔의 손가락 끝에서 휘황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대로 푸른색의 액체는 점차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흐흐흣! 원료만 짐작할 수 있다면 그깟 해독약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지.”

아르티엔이 손을 뻗자 아직까지도 공중에 떠 있던 자그마한 붉은빛 액체 덩어리는 빠르게 움직여서 포도주병 속으로 퐁당 들어가 버렸다. 아르티엔은 살며시 포도주병을 흔들어서 해독약이 섞이도록 한 후 다시금 포도주를 잔에 따랐다. 아르티엔은 포도주의 그 영롱한 붉은빛을 바라보며 자조하듯 말했다.

“젠장, 아들놈이 준 최초의 선물을 그냥 버릴 수는 없잖아.”

이제는 눈치 볼 것도 없이 천천히 향을 음미하며 포도주를 마셨다.

“정말 좋은 포도주로군. 동기가 좀 불순한 것을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 없는 첫 선물이야.”

뭔가에 홀린 듯 또다시 한 잔을 더 따르며 아르티엔은 말했다.

“무턱대고 마법 교육만 시켰지, 드래곤으로서 꼭 가져야만 하는 품성과 성격 교육을 시키지 않았더니 결과가 이 모양으로 나타나는구먼.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죽기 전까지 저놈을 제대로 교육시켜 놓아야 하는 것이 내 의무지. 그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를 뵐 면목이 서지.”

훌쩍 술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아르티엔은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빨을 뿌드드득 갈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다시 동굴로 돌아와서는 술병을 집어 품속에 넣으면서 외쳤다.

“네놈이 튀어 봤자 벼룩이지! 이번에 잡히기만 해 봐라.”

아르티엔은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애비를 우습게 보는 놈은 어떤 꼴이 되는지 확실하게 알려 준 후 다시금 설교를 시작할 작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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