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서 레어 밖으로 나온 아르티어스, 하지만 그는 마음만 급할 뿐 아직까지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실버 드래곤을 찾아가야 해. 그놈들이라면 나이아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조금 만만하면서도 나이아드를 불러낼 만한 놈이 누가 있지? 그러니까…….”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궁리를 했다. 너무 약한 놈이면 나이아드를 불러낼 만한 능력이 안 될 테고, 너무 강한 놈이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최강의 종족인 실버 일족을 상대해야 하는 일인 만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버 드래곤이 웜급에 이르면 그 파워는 에인션트급 그린 드래곤과 맞먹을 정도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르티어스 옹이라도 자연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실버 일족은 해양에서 살아가는 만큼 그 덩치와 파워는 육상의 드래곤과 차원을 달리할 만큼 컸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뒤에서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 섯거라!”
“이런 빌어먹을! 잠든 것이 아니었군.”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소녀, 아르티엔이었다. 그것을 본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아르티어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순순히 붙잡히느니 반항을 해 보기로 작정했다. 마법으로 따진다면 자신은 절대로 아버지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여태껏 수많은 골드 드래곤들이 태어나고 또 죽었지만, 아르티엔 만큼 마법에 깊숙이 파고든 드래곤은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상대로 마법으로 승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 많음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싸움이라는 것은 자신의 강점으로 승부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렇게 따져 본다면 아르티엔의 약점은 몸싸움일 것이다. 아르티엔은 여태껏 줄곧 마법에만 매진해 온 드래곤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싸우기로 작정하자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 나오며 그 빛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져 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법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음을 진작부터 깨닫고 현신을 한 상태로 육박전을 전개하기로 작심했다.
“어쭈? 너 간뎅이가 부었냐? 감히 애비한테 반항할 망상을 하는 것을 보면…….”
<어디 누가 죽나 해 보자구요.>
“맨날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나한테 닭대가리라는 소리를 듣는 거얏!”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티엔의 몸은 빠른 속도로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르티엔의 손에서 수십 가닥의 은빛 광선이 뻗어 나갔다. 아들놈의 현신이 끝나기 전에 감행하는 기습 공격이었다.
콰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지며 아르티어스의 주위에 엄청난 흙먼지가 뿜어져 올라왔다. 아르티어스가 그 먼지 구덩이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왔을 때,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낭패스러운 몰골이었다. 군데군데 상처를 조금씩 입기는 했지만, 뭐 자신의 예상보다는 피해가 작은 편이었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했던 것이다.
‘현신한 나를 상대하려면 당신 또한 현신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 손으로 장사 지내드리죠. 흐흐흐.’
이제 웬만한 마법 따위는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아르티어스는 꼬리를 슬슬 흔들며 여유만만하게 서서,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 자리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르티엔을 노려봤다. 서로 간의 거리는 1킬로미터가 조금 더 넘는 아주 먼 거리였다. 하지만 골드 드래곤의 밝은 눈에는 상대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다 보였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르티엔, 그 여유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르티어스였다.
아직까지 아버지는 본체로 현신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체로 현신하는 그 찰나는 완벽한 무방비의 대단히 위험한 순간이었기에 아르티엔이 아르티어스의 눈앞에서 현신하는 위험을 자초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전력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르티엔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이 아르티어스가 가지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왜 저렇게 여유만만 한 것일까? 겨우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가져다주는 시간 여유는 몇 초 되지도 않는다.
겨우 그 몇 초의 시간 여유로 에인션트급에 근접하는 아르티어스의 브레스를 막을 만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용언 마법을 사용한다면 시간 여유는 충분하겠지만 위력에 문제가 있을 테고, 마법은 주위의 마나를 응집하고 압축할 시간 여유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 여유 만만한 미소가 아르티어스를 헷갈리게 하기 위한 속임수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상대는 골드 일족 최강이라 불리는 드래곤이다. 그런 만큼 아르티어스가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르티어스는 뭔가 단안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쪽으로 내려오시죠! 왜, 겁나십니까?>
슬그머니 도발을 가하는 아르티어스, 하지만 아르티엔은 거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러는 네놈이나 올라오려무나.”
드래곤이 날아올랐을 때의 그 커다란 날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아르티어스 자신도 그 점을 이용해서 드래곤 여럿 잡았지 않았는가? 그것을 잘 알면서 하늘 위로 따라 올라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헤헤헷! 세상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겁나십니까? 아버지는 골드 일족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지만, 아무래도 그 정도 배짱은 안 되는 모양이죠?>
아르티어스의 말에 아르티엔의 얼굴이 시뻘겋게 바뀌었다.
“저런, 때려죽일 놈을 봤나!”
노기를 터뜨리는 아르티엔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도발하면 열 받아서 내려올 거야. 그러면 킥킥킥, 이 손으로…….’
<거기서 어중간한 마법 따위 날려 봐야 본체로 돌아간 나한테 그 어떤 타격도 주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죠? 어때요? 여기 내려와서 한판 해 볼 배짱이 있으십니까? 맨날 닭대가리라고 놀려 댄 아들하고 한판 해 볼 배짱이 있으시냐구요!>
“으드드득!”
아르티엔은 분노를 참지 못해 이빨을 갈아 댔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아래쪽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점점 확신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그 미소는 속임수였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 그만큼 자신이 있다면 이리로 내려와서 싸워도 될 것이 아닌가? 아르티어스가 어떤 방식으로 아르티엔을 공격할까 궁리하는 중에 아르티엔이 선수를 쳐 왔다.
아르티엔은 저 아래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거대한 골드 드래곤을 향해 한쪽 손을 슬쩍 들어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는데도 아르티엔의 주위에 파동 치는 엄청난 마나의 기운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아르티어스의 눈가가 슬쩍 찌푸려졌다.
‘마법인가? 아마도 그렇다면 8내지 9사이클급?’
그러다가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주위가 뭔가 이상한 마법진에 의해 공간의 왜곡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것은?’
그 공간의 왜곡은 엄청난 마법이 터졌을 때, 그 여파가 딴 곳으로 퍼지지 않도록 한정시키는 오브젝트 리머테이션(Object Limitation : 목표 제한) 마법을 사용했을 때 그 여파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었다. 좁은 공간만을 그 목표로 했을 때는 왜곡의 정도가 미미했기에 눈치 채기 어렵지만, 아르티엔은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걸쳐 그 마법을 썼기에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처럼 무턱대고 마법을 남발하는 유형의 드래곤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상대만을 철저히 파멸시킨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에는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마법 컨트롤이 뛰어난 것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과시하는 것이다.
공간 왜곡이 이토록 광범위하다면 아르티엔이 사용하려는 마법의 위력이 결코 약한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르티엔은 마법으로 자신에게 반항하는 아들놈을 반쯤 죽여 놓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죠. 옛날의 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르티어스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다음 자신의 몸속에 쌓여 있는 바람의 기운을 섞어 내뿜을 준비를 시작했다. 그에 따라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한껏 벌어진 입속에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것은 폭발적인 파괴력을 품고 하늘 높이 뿜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티엔의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기인 브레스로 말이다.
“어엇? 브레스까지? 이 녀석이 나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약간 당황한 듯했던 아르티엔, 하지만 곧이어 그의 눈은 슬쩍 가늘어지며 살기가 가득한 어조로 외쳤다. 이렇게까지 아들놈이 막나가기 시작하자 정말 열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냐, 그래! 한번 죽어 봐랏!”
그와 동시에 아르티엔의 쭉 뻗은 손바닥의 끝에서 엄청난 기운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아르티엔은 그 어떤 주문도 외우지 않았는데도 단시간 안에 엄청난 마나를 사방에서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엔은 마법이 막 완성되기 직전, 욕설을 내뱉으며 주문을 해제해 버렸다. 차마 아들놈에게 그 마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식이라는 것이 뭔지…….
“젠장!”
주문을 해제한다고 해서 뭉쳐진 마나가 순순히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법 사용을 위해 인위적으로 뭉쳐진 마나들은 처음 끌어 모았을 때의 역순으로 차근차근 흩어 버려야 했다. 안 그러면 스스로 폭주하면서 대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르티엔이 마나를 되돌리는 그 순간, 이미 아르티어스가 내뿜은 브레스는 아르티엔의 지척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르티엔은 황급히 용언 마법을 사용하여 공간 이동을 했다.
아르티엔이 공간 이동을 한 그 순간, 그의 통제력을 잃은 마나의 덩어리는 대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이어 그 폭발 지점 위를 아르티어스의 브레스가 쓸고 지나갔다.
<히히힛! 드디어 해방인가?>
저 정도라면 최소한 사망 아니면 중상일 것이라고 희희낙락하며 아르티어스가 통쾌하게 미소 짓는 것도 몇 초 되지 못했다. 그는 곧이어 자신의 브레스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을 노려보며 떠 있는 아르티엔을 발견한 것이다.
‘젠장! 그 짧은 순간에 공간 이동한 것인가?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시군. 저 정도의 기동력이라면 브레스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봐야 하잖아.’
그때부터 시작하여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강력한 마법을 아르티엔에게 퍼부었다. 브레스를 또 쓸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거리가 벌어져 있는 이상 상대가 또다시 공간 이동할 가능성도 있었다. 앞으로 전력으로 뿜어낼 수 있는 브레스는 겨우 두 번, 강적을 앞에 두고 그걸 헛되게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 닭대가리 녀석아. 지금 당장 레어로 돌아간다면 방금 전까지 대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 안 그러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아르티어스가 자신만만하게 따지고 들자, 아르티엔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너, 아예 겁을 상실한 모양이구나.”
“그럴지도 모르죠. 아버지도 제 처지가 되어 보시라구요. 눈에 뭐가 보이는지.”
그다음부터 시작된 것은 아르티어스의 처절하다고 할 만큼의 ‘발악’이었다. 상대는 하늘 높이 자리 잡고 있으니 몸싸움을 벌일 수도 없고, 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에 브레스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마법뿐인데, 이 세계에서 아르티엔과 마법으로 맞장을 떠서 이길 드래곤이 과연 몇 마리나 될까?
물론 이 수치도, 아르티엔은 드래곤이 아닌 뭔가 다른 생명체로 트랜스포메이션하고 있고 상대방은 마법을 쓰기에 매우 유리한 드래곤의 몸체를 유지한 상태라는 단서가 붙어야만 손가락이 몇 개 정도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아르티엔의 마법 실력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을 낳은 아비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아르티어스, 웬만한 공격은 막거나 맞받아치고, 아주 강력한 공격을 날리면 살짝 피해서는 카운터를 날리는 아르티엔. 처음부터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마지막 한 방울의 마나가 남을 때까지 악착스럽게 공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아르티엔의 눈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헤즐링일 때야 닭대가리라고 구박하며 처절할 정도로 마법 수행을 시킨 것도 사실이었지만,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가 목숨을 걸고 달려들고 있는 지금에서야 자신이 낳은 아들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놈이 헤즐링일 때야 비교 대상이 없어서 그렇게 구박했다고 하지만, 4천 살이 넘은 드래곤을 수도 없이 만나 본 아르티엔이었다. 그 많은 드래곤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낳은 아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흐흐흐… 성격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실력 하나는 제대로 쌓았구나. 마법을 통한 실전 경험이 좀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만, 저 정도면 내 자식으로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봐야 하겠지.’
뿌듯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르티엔과 달리 점점 더 아르티어스의 눈동자는 절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써도, 또 브레스를 써도, 그의 아버지는 태산과 같이 자신의 앞을 당당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서로 간의 실력 차가 너무 심하게 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아르티어스는 완전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쏘아 대면서도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크흐흐흑!>
아르티어스가 더 이상 허무하기 그지없는 공격을 포기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 그 순간, 방금 전에 모아 뒀다가 아직 뿜어내지 못한 마법의 기운이 폭주하면서 대 폭발을 일으켰다. 하지만 튼튼한 드래곤의 외갑(外甲)을 뚫지는 못한 채, 여기저기 자그마한 상처만을 만들었을 뿐이다.
갑작스런 아들의 행동을 보고 아르티엔이 오히려 당황했다.
“어라? 저 녀석이 왜 저래?”
하지만 아르티엔은 호기심 어린 시선만을 던지고 있을 뿐, 드래곤으로 현신해 있는 아들의 주위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저놈이 또 무슨 나쁜 꾀를 부려서 자신을 꾀어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어어어엉∼, 내 아들 죽는다. 그런데도 나는 애비가 되어 가지고 도와주러 가지도 못하다니…, 엉엉∼.>
산만 한 덩치의 골드 드래곤으로 현신한 채 사발만 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부짖는 모습은 그것이 과연 지상 최강의 존재인지 의심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당한 표정으로 아들놈의 짓거리를 보고 있던 아르티엔은 그 절규하는 목소리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이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아르티엔, 낮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도대체 그 목소리 안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실어서 뿜어내었는지 아르티어스는 주위의 공기가 요동친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절망감을 안겨 줬을 정도로 강한 아버지……. 하지만 그 아버지는 자신과 싸우면서 본래 실력의 10분의 1도 발휘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방금 내뱉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티어스에게 더더욱 깊은 절망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하나뿐인 내 아들이… 아들이, 흐흑! 그 어리고 나약한 것이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나 있지 않은지…, 엉엉엉…….>
이성을 잃고 울음을 터뜨려 대는 아르티어스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아들이라, 그리고 어리고 나약하다고? 그렇다면 헤즐링…, 헤즐링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저놈이 알을 낳았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는데…….”
아르티엔은 힐끗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저것이 또 무슨 못된 꾀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가늠해 봤다. 하지만 퍼질러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 꼴사나운 모습, 평소에 아들놈의 그 오만방자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아르티엔으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아들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저 모습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연극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알은 혼자서도 낳을 수 있지. 그렇지, 저 녀석은 요 근래 사고도 안 치고 레어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었잖아? 그 동안에 몰래 알을 낳아서 키운 것일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티엔의 얼굴은 점점 희미한 미소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의 아들이라면 자신에게는 손자가 아닌가?
“하하하, 손자를 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늘…, 하하하핫!”
혼자서 북 치고 장구까지 친 후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아들이 어찌 되었다는 말이냐? 응?”
<아들놈이 행방불명되었단 말입니다. 엉엉∼. 그 나약한 것이 지금 무슨 꼴을 당하고나 있을지, 흑흑흑!>
“나약하다고? 설마, 그렇다면 헤즐링이라는 말이냐? 한동안 조용하더니 너는 그동안 헤즐링을 키우고 있었단 말이냐?”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아르티어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원래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다크를 헤즐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에게 헤즐링이라고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다크를 찾은 후에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호비트를 양자로 삼은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오직 강함을 추구하는 아르티엔에게 호비트 양자라는 것은 씨도 안 먹힐 것이 뻔했다. 오히려 다크를 찾는 것을 악착같이 방해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두리뭉실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그냥 ‘나약하다’는 말과 함께 ‘아들’이라고만 말하며 울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해 놔야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테니까.
“헤즐링이 납치되었다면 그건 중대한 사건이다. 왜,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흑흑, 저는 제 힘으로 찾을 수 있을 줄 알고…….>
“이런 망할 녀석, 갑자기 네놈이 왜 이웃 드래곤들까지 찾아가서 난리를 피워 댔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빨리빨리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니냐? 이런 미련한 녀석! 그러니까 닭대가리라는 소리를 듣지!”
아르티엔이 슬쩍 손을 흔들자 대기가 요동치며 엄청나게 강한 공기의 흐름이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직격했다.
‘꽝!’
<으갸갸갹!>
그 공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드래곤으로 현신해 있는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속도로 보아 어느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마법을 이용해 아르티어스의 머리통을 갈긴 후 아르티엔은 저 맑은 하늘 쪽으로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시선을 돌렸다.
“허허허, 내가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이냐? 허허, 저놈 하는 꼴을 봐서는 절대로 손자 같은 것은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티엔과는 달리, 아르티어스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그 긴 목을 아래쪽으로 한껏 끄집어내려 작은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고는 주물러 대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손자를 만나 봐야겠다. 그 녀석의 특징부터 소상하게 말해라. 광범위 수색 마법을 통해서 그 목표를 찾아낸 후 곧장 공간 이동하면 끝날 일이 아니냐?”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제가 왜 이웃 영토까지 침범하면서 난리를 쳤겠습니까? 아무래도 뭔가 결계 같은 것을 쳤는지 도저히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시도는 한번 해 보는 것이 좋겠지. 네 녀석과 나는 방금 당해 봐서 알다시피 레벨이 다르지 않느냐?”
<그러실 게 아니라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마지막에 써 먹으려고 생각했던 건데요.>
“뭔데?”
<아들 녀석이 전에 나이아드하고 관계를 맺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 정령왕 나이아드를 불러내어 행방을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겁니다.>
순간, 아르티엔의 눈이 살짝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가늘어졌다.
“오호라, 나이아드라고? 그렇다면 너 혼자서 자가 수정한 것이 아니라 혹시 실버 드래곤하고? 누구냐? 그놈 이름이.”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발끈하며 외쳤다.
<누가 실버 드래곤 따위하고 거시기를 해서 애를 만든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아쿠아 룰러 때문에 맺어진 인연이었죠.>
“그래? 그렇다면 아쿠아 룰러는 어디 있냐? 그걸 이용한다면 간단히 나이아드를 불러낼 수 있을 것 아니냐?”
아무리 마법 실력이 막강한 아르티엔이라고 해도 종족의 특성을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 그건 마법 실력이 얼마나 뛰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드래곤의 특성과 관계되어 있는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나이아드는 아들 녀석을 아주 미워한단 말입니다. 아쿠아 룰러를 통해 나이아드를 불러내 봤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구요.>
“그건 또 왜? 왜 정령왕이 헤즐링을 미워한단 말이냐?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려고 하기 시작하는 아르티엔을 향해, 아르티어스는 당황해서 외쳤다. 여기서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아들이 호비트라는 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르티엔은 수색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 도와주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서 호비트 따위를 양자로 삼은 행위는 가문의 수치라면서 오히려 다크 수색 작전을 방해할 우려마저도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하려면 너무 복잡하단 말입니다. 그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나이아드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실버 일족뿐이잖습니까? 실버를 한 마리 족쳐서 나이아드를 불러내어 알아 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손쉬운 길이라니까요.>
“흐음, 실버를 한 마리 족쳐야 한단 말이지?”
<예.>
잠시 궁리하던 아르티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그 ‘먼저 저지른 후에 생각하는’ 성격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아르티엔의 표정이 갑작스레 음흉하게 변한다고 생각한 순간…….
“그래, 어떤 녀석을 족치면 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