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서 벌어진 일은 곧장 근위 기사단에까지 연락이 올라갔다. 그 무렵 코린트 최강의 기사단인 코란 근위 기사단은 크라레스 침공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리고 새로이 편성을 끝마친 제2근위대도 합류를 끝마쳤다. 하지만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의 수색 작전에 투입 되었던 금십자 기사단이 아직 완전히 귀환하지 않은 상태였다. 치레아 대공에 대한 수색 작전은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금십자 기사단의 전투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침공 부대는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 방위 사령부로부터의 긴급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부관의 말에 제임스는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긴급 전문? 어딘가에서 또 마법사나 신관들과 한판 붙었으니 지원해 달라는 것이겠지. 거기에 놔두고 가게.”
“예, 각하.”
제임스는 문을 나서려는 부관의 뒤통수에다가 대고 급히 물었다.
“금십자 기사단의 준비는 완료되었는지 알파레인 후작에게 물어봐 주게.”
“예, 각하.”
“이거야, 원.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것이 언제인데, 금십자 기사단 때문에 발목이 붙잡혀 있다니…….”
잠시 궁리를 한 후 제임스는 자신의 명령을 행하러 가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명령이 더 있는지 몰라서 눈치를 살피고 있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각 기사단장과 부단장, 그리고 각 기사단의 작전관들을 불러들이게. 금십자 기사단의 출동 준비가 완료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으니까, 그동안 지휘관들과 크라레스 침공 작전에 대해서 토론을 좀 해 두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각하.”
“좋아, 가 보도록.”
“옛.”
부관이 나가고 난 후, 제임스는 커다란 탁자에 앉아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톡톡톡 몇 번 두들기다가 이윽고 부관이 놔두고 간 서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일단 자신의 휘하에 있는 제1근위대의 출동 준비는 다 갖춰 놓은 상태였고, 부관에게 지시해 놓은 작전 회의에 참석할 인원이 모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동안 제임스는 할 일이 없었다.
제임스는 그동안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서류를 집어 들고는 따분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곧이어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는 맹렬한 속도로 그 서류를 읽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가 방금 읽은 서류는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 사건을 일으킨 두 명, 즉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미남 청년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노랑머리 하녀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호텔의 경비병들과 난투극을 벌이고는 그다음으로 드루이드 후작 가문의 용병들과 격투를 벌였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방위 사령부에서 파견한 병사들과도 드잡이를 벌였다. 수십 명이 넘는 부상자들이 발생했지만, 정작 그 범인들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출동은 미뤄 둔 채, 여기저기를 들쑤셔서 정보를 끌어 모았다. 그 덕분에 각 기사단의 지휘관들은 회의실에 제임스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려야만 했다. 제임스는 일단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끌어 모은 후에도 회의실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장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건 무슨 말이냐, 제임스.”
“아무래도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본 결과 그녀가 드래곤과 접촉한 것 같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뭣이라고?”
제임스는 방금 전에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서류들을 로체스터 공작의 앞에다가 차곡차곡 놓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것은 치레아 대공으로 추정되는 하녀와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청년이 루비의 눈이라는 호텔에서 난투극을 벌인 것에 대한 방위 사령부의 보고서이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법의 탑에서 가지고 온 수도 내에서의 마법 사용 탐지 기록이옵니다. 탐지 기록에 따르면 호텔 내부 혹은 그 근처에서 강력한 마법이 몇 차례에 걸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그런 것만 가지고 꼭 그것이 드래곤이고, 그 하녀가 치레아 공작이라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가 있지 않겠나?”
“제가 마법사를 거느리고 그곳에 직접 가서 확인한 것이니 틀림없사옵니다. 그들은 마법사가 만든 이미지를 보고 그녀가 확실하다고 증언했사옵니다.”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는 말이냐?”
“그녀가 이미 크라레스로 갔다면, 이번 기습 작전은 중지해야만 하옵니다.”
“큰일이로군.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바로 이때 옆에 서 있던 레티안이 끼어들었다.
“그녀와 드래곤이 만났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전부터 계획해 왔던 작전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
레티안은 잠시 로체스터 공작이 생각할 여유를 준 후에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어쩌면 크루마는 분노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에게 치명타를 입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전에 세웠던 작전과 달리 드래곤은 이쪽의 해명도 듣지 않은 채 그녀와 만났사옵니다. 그런 만큼 빨리 손을 써서 드래곤에게 본국에게 죄가 없다는 점을 납득시켜야만 하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말이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말이 옳은 것 같군.”
“예, 그리고 이번 원정은 포기하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전하. 그녀가 크라레스의 손을 들어 주는 한 저희가 승리 할 방법은 없사옵니다.”
혼란스런 과거의 기억
“기나긴 역경을 견뎌 내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네.”
아르티어스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서사시 「아르티어스 애가」의 마지막 한 구절을 읊은 후 미소 띤 얼굴로 다크에게 말했다.
“어려울 때는 역시 고향이 최고지. 너에게는 이곳 치레아가 고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여기서 한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아르티어스는 코린트의 수도 케락스에서 곧장 치레아로 공간 이동해 왔다. 그가 생각했을 때, 아무래도 아들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은 아들의 보금자리인 이곳이 최적일 테니까 말이다.
치레아 공작 관저의 한쪽 구석에 위치한 공간 이동 마법진에 도착한 일행들은 곧바로 관저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공간 이동 마법진 근처에 버티고 서 있는 거대한 것들…….
“어라?”
갑자기 나타난 손님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트롤들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잘못 왔나? 이런, 이런, 벌써부터 치매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나? 수십 번도 더 와 본 이곳 좌표를 잘못 기억하다니…….”
아르티엔이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제대로 찾아온 것일 게다. 저놈들은 흑마법에 조종당한 것들이야. 그렇지 않고 야생의 그들이었다면 벌써 공격해 왔겠지.”
“그도 그렇군요.”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트롤들의 뒤쪽에서 꽁꽁 묶여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는 그들에게 달려오며 외쳤다.
“어서 오시옵소서! 대공 전하.”
그 순간 무표정하게 트롤들을 둘러보던 다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달려오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봤던 것이다. 그녀는 상대가 여태껏 몬스터에게 잡혀 있다가 구원을 청하는 것으로 여기고,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손을 썼다. 그녀의 손이 우아하게 원을 그린 그 순간, 그녀의 사방으로 푸른 강기의 다발들이 쫙 뿌려져 나갔다. 그리고 그다음 벌어진 일은 여태껏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 아르티엔 어르신의 입을 쫙 벌어지게 만들었다. 뭔가 강력한 마나의 존재감을 느낌과 동시에 사방에 있던 트롤들이 일제히 피보라를 일으키며 쓰러졌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냐?”
그리고 다음 순간 다크는 달려오고 있는 사내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그리고 이 몬스터들은 뭐야?”
사내는 공포에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선, 돌아오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하지만… 하지만 몬스터들을 왜 죽이셨사옵니까?”
사내는 공간 이동을 통해 나타난 자들 중에서 적과 아군을 선별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법진을 통해 왔다 갔다 하는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걸 대신 선별해 줘야 하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뒤에 서 있다가 몬스터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첩자인 누군가 본다면 들통 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꽁꽁 묶여서 포로인 척 연극을 하면서 몬스터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착각해서 다크가 몬스터들을 몰살시켜 버린 것이었다.
“어라?”
사내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다크였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줬더니, 물에 떠내려간 보따리는 왜 안 건져 주느냐고 따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크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을 느낀 사내는 다급하게 말했다.
“카르토 백작님을 만나서 보고를 받으시면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실 것이옵니다.”
다크는 잠시 카르토 백작이 누군가 생각을 정리했다. 곧이어 그 이름을 가진 인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크가 알고 있는 그 카르토 백작이 맞다면 그의 경우 요직에 있기는 했지만 공국 내부에 몬스터를 끌어들인다든지 하는 그런 중대한 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높은 상급자가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카알 폰 카슬레이 백작은 어디에 있느냐? 먼저 그를 만나서 보고를 듣고 난 후에 카르토 백작을 만나겠다.”
“대공 전하, 송구스럽게도 카슬레이 백작님은 치레아에 안 계시옵니다.”
“왜?”
“황제 폐하로부터 치레아 기사단의 출동 명령이 떨어져서 지금 전선에 나가 있사옵니다. 기사단 전원이 출동해 버렸고, 또 가스톤 님도 대공 전하와 함께 행방불명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카르토 백작님이 책임을 맡으셨사옵니다.”
그러면서 사내는 다크와 뒤에 서 있는 일행들을 힐끔 쳐다봤다. 팔시온, 가스톤, 미디아, 미카엘. 이렇게 네 명이 대공과 함께 행방불명되었다. 하지만 왜 이 자리에 대공 혼자만 양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대공을 따라온 저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힐끗 던져 보는 눈길이었다.
“기사단이 출동했단 말이지…, 알겠다. 집무실로 갈 테니 카르토 백작을 불러오도록 해라.”
다크는 너절하게 쓰러져 있는 트롤의 사체들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쓰레기들은 빨리 치워 버려.”
“옛, 전하.”
보고를 끝마친 후 카르토 백작이 나가고 나자, 다크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면서 푹신한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푹 퍼져 있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세린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주인님, 따뜻한 물을 받아 놓을까요? 목욕을 좀 하시면 기분이 한결 개운해지실 겁니다.”
“아, 목욕은 됐고, 술이나 좀 가져오너라.”
“예, 주인님.”
다크는 천천히 술을 따라 마시면서 혼란스럽게 엉켜 있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오래전의 일들이 마치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다크가 최초로 인간적인 정을 느꼈던 사람은 마지막 사부였던 유백이었다. 아마도 그는 다크를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생각했기에, 좀 더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지막 제자라는 것 때문에 조금 더 감상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 망할 사제라는 녀석에게서 사부의 최후를 전해 들었을 때가 기억났다. 탈마(脫魔)에 이르지 않고서는 피해 갈 수 없는 산공의 고통, 무리한 수단을 써서 역행하여 쌓은 내공은 죽기 직전에 흩어지면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안겨 준다. 사부는 죽는 그 순간까지 그 지독한 고통에 처절하게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때,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여태껏 배운 대로 일검에 그 고통을 없애 드렸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 마교 교주와의 갈등, 아마도 그것은 아주 사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연속되면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때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마교 내에서 자신을 찍어 내려고 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을 먼저 파악하기만 했어도,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던 ‘국’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갑자기 떠오른 사라졌던 과거의 기억들, 그중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은 그가 꽤 존경했었던 옥영진 대장군과 그 부하들의 죽음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다. 자신이 유치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간단한 마교의 술책에 놀아나고 있을 때, 그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 자신이 그 집에 있었다면 그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원래가 인간이 살아오면서 천천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추억이라고 한다면, 그 추억들 중에는 죽는 그날까지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는 반면 최대한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일수록 더욱 더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습성이 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망각이라는 신이 내려 준 축복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든 기억들이 아주 희미해지기에 그런 부분이 떠오른다고 해도 약간의 불쾌감 정도만 생길 정도로 사건의 전말이 흐려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일들이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 듯 아주 또렷하게 떠오른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이 망할 이상한 세계로 떨어진 것도,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믿고 깝죽거린 결과가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 떨어진 후에도 그전의 일은 망각하고 설치고 돌아다니다가 미네르바에게 호되게 당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기억들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떠오르며 수많은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속에 넘치고 있었다. 분노, 후회, 슬픔, 그리고 그리움……. 그런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다가 그 모든 기억들은 ‘후회’라는 감정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다크는 마시고 있던 술잔을 벽에다가 패대기쳐 버린 다음, 한동안 씩씩거리다가 급기야는 술병을 들고 통째로 꿀꺽거리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런 말은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단숨에 한 병을 다 비워 버린 후 말리는 세린을 밀쳐 버리면서 벌떡 일어서서는 집무실 옆에 딸려 있는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 그 방에는 집무실에서 다크가 원할 때 가져오기 위해 준비해 둔 술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