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뭐가 어떻게 돼?”
“왜 저러느냔 말입니다.”
“훗.”
씨근거리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시선을 돌려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하늘에 달이 두 개나 동시에 떠 있었기에 달의 빛에 가려서 별들이 어둡게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르티엔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왜 드래곤이 서로 어울려서 살지 않는 줄 아느냐?”
“예? 갑자기 웬 뜬금없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그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겪어 보니 어느 정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구나.”
아르티엔은 잠시 아르티어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우리들 드래곤의 기억은 거의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지.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일도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나. 하지만 우리들 드래곤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기억들은 레어에 혼자 들어앉아서 만들어 놓은 아주 밋밋한 것들이지. 물론 세상을 떠돌면서 호비트나 오크, 트롤, 오우거 따위와 어울려서 유희를 즐기기도 하지. 그 과정에서 동료가 죽기도 하고, 하잘것없는 것들을 가지고 싸우기도 하고, 울고, 웃고, 분노하면서 지내게 되지. 하지만 그것들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다르지. 유희의 경우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서 그 생을 바라보는 것이야. 호비트들이 연극 구경을 하면서 울고 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런 기억은 아무리 떠올려도 크게 무리가 없는 것들이지. 똑같은 연극을 한 번 더 본다는 것 정도 외에는 별 감흥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드래곤끼리 어울려서 만들어 낸 기억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고 봐야 해. 그것 때문에 우리 종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을 매우 꺼리지.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선명하게 떠오를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는 드래곤인 친구가 몇 있습니다. 그리고 몇몇 드래곤들끼리 어울려서 친구로 지내는 녀석들도 많아요. 그건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닙니까?”
“맞아, 드래곤들도 소수이긴 하지만 친구를 깊게 사귀지. 하지만 그것도 다 헤즐링 시기를 벗어나서 독립된 개체로서의 완성이 끝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헤즐링일 때, 그들은 절대로 아버지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아직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면? 아마도 그 기억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들 거야.”
“그렇다면 아버지가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뭡니까? 손자 일을 물었는데, 왜 난데없이 우리 종족에 대해서 별로 흥미도 없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닥치고 들어 봐. 다 연관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인간은 드래곤에 비해서 훨씬 덜 성숙된 자아와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지?”
“그렇다고 봐야 하겠죠.”
“하지만 인간은 망각이라는 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지. 기억하기 싫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두 다 세월이 가면 잊어버리는 놀라운 신의 축복을 가지고 있단 말씀이야.”
그것이 신의 축복이 될 수 있나? 하는 회의적인 심정으로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래서요?”
“그렇기에 인간은 현재에 매달리게 되는 거지.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야. 미래도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현재만이 중요한 거야.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모든 일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게 된다면? 그걸 과연 성숙되지 못한 정신 체계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
아르티엔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챈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정신 붕괴 또는 자아 상실까지 갈 수도 있는, 속된 말로 미치거나 자폐증에 걸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들의 표정 변화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르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것은 최악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야.”
“어째서 그렇게 장담하시죠?”
수상쩍은 어조로 질문하는 아르티어스에게 아르티엔은 으스대듯 대답해 줬다.
“나는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마법을 남발하지는 않으니까 하는 말이다. 원래가 호비트의 두뇌라는 것은 매우 불완전해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도 곧잘 잊어버리지 않느냐? 지금은 잊고 지냈던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당황스럽겠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잊어버리게 되어 있어.
하지만 그 잊어버리는 순서에 조금 문제의 여지는 있지. 내가 예상하는 최악의 가정은, 그 아이가 안 좋았던 일들, 그러니까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모든 일들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후회스럽던 수많은 일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고……. 그러면서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는 것이지.”
아르티엔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한눈에 척 봐도 호비트의 수명을 기준으로 따졌을 때, 이제 겨우 20년도 채 못 살았을 거 아니냐? 겨우 20년 동안 쌓인 안 좋은 기억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없지.
기껏해야 남자한테 퇴짜를 맞았다든지, 혹은 짝사랑이라든지… 그런 몇 가지 후회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게다.”
아르티엔은 아들이 안심하라고 덧붙인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느낀 아르티엔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라고 있냐?”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아이는 겉모습은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80년은 충분히 살았다구요. 우리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호비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긴 세월이지요. 그리고 안 좋은 기억도 무지하게 많을 거예요.”
아르티엔은 약간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80년? 80년이라……? 그렇군, 뭔가 이상한 기척이 바로 그거였어. 혹시 그 아이 저주 같은 것에 걸린 것이냐? 뭔가 흑마법에 당한 것 같은 흔적이 엿보이던데…….”
아르티어스는 놀랍다는 듯 말했다.
“본격적으로 조사해 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셨어요? 아버지 말씀대로 흑마법 중에서 악명 높은 디스라이크에 걸린 모습이죠.”
아르티엔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핫! 디스라이크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예쁜 모습이 된 거지? 도대체가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투성이로구나. 의외의 연속이라고나 할까…….”
“어떤 여자 애를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상태에서 그 저주에 걸린 것이니 그렇겠죠. 그전에는 남자였단 말입니다. 그것도 호비트들 중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아르티엔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오호라,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나는 또 암컷을 보고 아들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가 정착된 것인가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냥 놔두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왜 괜히 그딴 마법은 걸어서 저 모양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일단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저 아이가 지나가 버린 시간에 얽매여 버릴 것인지, 아니면 과거를 딛고 한 단계 성숙한 모습을 보일 것인지는 말이야.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겠지.”
“손자의 일인데도 아주 속 편하게 얘기하시는군요.”
아르티엔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사전에 호비트 양자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나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까.”
아르티어스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손자라구요.”
“아니, 그 애는 너의 아들일 뿐, 나의 손자는 절대로 아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네가 무엇을 가지고 즐기건 방해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만약 내가 그런 생각이 없었다면, 그 아이가 나한테 대든 그 순간 아예 소멸시켜 버렸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네가 슬퍼할 것 같아서 그냥 놔둔 것이지. 네가 무슨 종족의 아이를 양자로 삼건 나는 상관할 생각이 없다. 엘프나 오크, 심지어는 우리들 드래곤의 노예로서 신께서 점지해 주신 드워프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나한테까지 강요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알겠냐?”
“그으래에요? 좋아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멀리까지 배웅은 안 할 겁니다.”
이죽거린 후 픽 돌아서서 들어가는 아르티어스를 향해 아르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물론 골드 드래곤의 노룡 아르티엔으로서가 아니라, 어쩌면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으로서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아르티엔은 유희의 대상으로서 손자를 원하는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다크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그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손자를 대하듯 다정하게 해 줄 것이다. 할아버지 노릇을 유희로 생각한 이상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아르티엔은 결코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뒤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잠시 멈췄다. 그런 다음 퉁명스런 어조로 말을 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좋을 대로 하세요. 아버지는 그 아이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그 아이는 제가 낳은 헤즐링보다도 더 소중합니다.”
아르티어스는 지금은 조금 진정되었나 싶어서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 다크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냐?”
“예, 아르티어스 님. 주인님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이분을 모시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오신 신관이시라고 해서요.”
아르티어스는 이번에는 라나 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게나.”
“예? 하지만…….”
“별일 없을 거야. 아버지도 그렇게 보증했으니까 말이야. 물밀듯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에 파묻혀서 많이 괴로워하겠지만, 결국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털고 일어서겠지. 이 위대하신 아르티어스의 아들이 저 정도 시련에 굴복할 수는 없지 않겠나?”
아르티어스의 신념 어린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던 라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부르십시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르신께서는 대단한 실력의 마법사인 듯싶습니다. 그렇게 손쉽게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시는 것을 봐서 말입니다. 하지만 옆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는 믿음도 중요하겠지만 어려울 때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도 큰 힘이 되더군요.”
“잘 알겠네.”
아르티어스는 라나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듯 세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다크는 어디에 있느냐?”
“안에 계십니다.”
아르티어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지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위에는 몇 개인가 빈 병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인사불성이 되어 축 늘어져 있는 다크의 모습이 보였다. 다크가 덮고 있는 담요는 아마도 세린이 가져다가 덮어 준 것 같았다.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다가가서 다크의 옆에 앉았다. 그런 후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살그머니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작정 도움만을 준다고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단다. 우선은 옆에서 지켜봐 주마. 그게 며칠이 걸리든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네가 오래지 않아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단다.”
다크의 방황의 시간은 계속되었고,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해서 술을 퍼마시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참견할 수도 없었다. 아들놈이 여태껏 보여 줬던 성격으로 봤을 때, 말리면 말릴수록 더 할 것이었다. 어쩌면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살하겠다고 날뛸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아들놈이 자살하겠다고 날뛰면 말려야 하겠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거의 밤잠도 잊고 다크를 몰래 감시했다. 다크는 모르고 있었지만, 수십 개도 넘는 마법의 눈들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아아악! 골치야. 머리통이 빠개지는 것 같군. 이봐, 세린.”
“예, 주인님. 해장술을 드시겠습니까?”
3일 동안 오로지 술만을 마셔 왔던 주인이었기에 세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질문을 던져 왔다. 어제도 눈뜨자마자 해장술부터 시작해서 밤늦도록 곤드레가 되도록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주인의 반응이 달랐다.
“세린, 나를 죽이려고 작심했냐?”
세린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오랜만에 네가 차려 주는 따뜻한 식사를 하고 싶구나. 3일 동안 후회하고 고민해 줬으면 죽은 녀석들에게 충분히 보답을 해 준 거지. 죽은 놈은 죽은 거고, 나는 이렇게 잘 살아 있으니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 자, 우선 목욕물부터 받아 둬라. 씻은 후에 식사를 하고 싶다.”
여느 때의 낙천적인 주인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세린은 다급하게 말했다.
“예, 주인님.”
세린이 목욕과 식사 준비를 위해 달려 나간 후, 다크는 천장에다가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빠도 아침 식사 함께 하시죠. 며칠 동안 감시하신다고 피곤하셨을 텐데……. 그리고 그 호텔로 찾아오신 것에 대해서 할 말도 좀 있구요.”
그 말과 동시에 천장의 한쪽 귀퉁이,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둥실 떠 있던 작은 눈알 같은 것이 ‘팍’하고 사라져 버렸다.
“에구구, 벌써 눈치 채고 있었나?”
아르티어스는 무안해져서 뒤통수를 긁으며 일어섰다. 일단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자, 오랜만에 함께 하는 아침 식사인데 뭘 입고 갈까…….”
여기저기에서 사다 모아 놓은 옷들이 수십 벌은 족히 되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두리번거리면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이야? 나는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죽은 놈들 때문에 3일씩이나 고민해 줬으면 많이 해 준 거라니, 이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호비트가 할 수 있는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또다시 뒤적뒤적 옷을 찾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참, 호텔에 찾아온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댔지. 에구구, 늦게 찾아왔다고 또 얼마나 구박을 하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해서 찾아간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알아듣도록 변명을 해야 하지?”
아르티어스는 옷 찾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떻게 변명을 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별로 변명이 통할 상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밑져 봐야 본전이니까.
“생각 밖이네요.”
“뭐가?”
“저는 할아버지라는 그 드래곤도 함께 데려오실 줄 알았는데, 아빠 혼자서만 왔어요?”
아버지를 데려온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잔머리를 굴리려고 든다면, 다크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 자신이 있는 총명한 아르티어스가 아니었던가? 아르티어스는 그것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아르티엔을 데려왔을 때의 최악의 상황도 이미 고려해 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아들놈이 여태껏 그래왔던 대로 아르티엔의 앞이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인다면? 닭대가리라고 자신을 놀리는 아버지 앞에서만은 절대로 아들에게 당하고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왔던 것이다.
“뭐, 그 노친네는 바쁘니까…….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식사니까 우리 둘이서만 오붓하게 먹기로 하자꾸나.”
“그러죠, 뭐. 세린! 식사 가져오너라.”
곧이어 세린이 식당으로부터 날라 온 따끈한 갖가지 음식들이 식탁에 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의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래도 서로 간의 분위기가 조금 심상찮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다크도 뭔가 껄끄러운 기분을 느꼈는지, 포도주를 조금 마신 후에 말을 걸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아르티어스가 통 말이 없었기에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아빠!”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아르티어스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비해 놓은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아! 얘야. 그게 아니고 말이다. 나는 절대로 고의로 그렇게 늦게 찾아간 것이 아니야.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나도 정말 너를 찾아낸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니까…….”
행여나 아들이 “조용히 해욧! 드래곤이라면서 그런 것도 못 해요?”하고 따질세라 다급하게 말을 내뱉던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살며시 다크가 자신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아들의 애정 표현에 멍한 상태인 아르티어스. 따뜻한 아들의 체온에 아르티어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술 더 떠서 약간은 쑥스러운 듯한 어조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가 구하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단 한마디의 말, 그 말 때문에 아르티어스는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폭발하는 줄 알았다. 여태껏 다크가 이렇듯 다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한 적이 없었기에 아르티어스는 더욱 기뻤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다크가 건넨 인사 한마디 덕분에 식사는 아주 화기애애하게 끝마쳐졌다. 아르티어스는 다크의 이 새로운 변화가 기쁘기는 했지만, 뭔가 썩 석연치 않았는지 식당 문을 나서면서 거의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기분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상은 아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