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되는 엘프리안시
철수 작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그린레이크에게 반란죄를 물어 지하 감옥에 가두고, 또 그의 심복 부하들도 모두 다 가둬 버렸다. 그 외에 의회나 국무부에서 일하던 인물들도 몇몇 체포되었는데, 그들이 이 사실을 황제와 함께 프루니아로 떠난 국무대신이나 의회 의장에게 알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후 엘프리안 시내의 철수 작전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황제가 황궁에서 떠난 다음 날 철수 작전은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 황궁 내의 거의 모든 값나가는 집기들과 각종 유물 등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다 수도 밖으로 빼냈던 것이다. 겨우 하루 동안에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크루마의 문화재들을 수도 밖으로 꺼내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 승리에 가까운 혹독한 중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중노동에 동원된 것은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엘프리안시의 시민들이었다.
징발된 건장한 남자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짐을 엘프리안시 외곽으로 옮기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거의 5만 명이 넘는 남자들을 동원했기에 그 엄청난 일이 하루 동안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네르바는 일단 큰 일거리가 끝나고 나자 그때서야 수도에서 모든 시민들의 철수를 발표했다. 수도 방위군의 남은 1개 사단과 황궁 경비대까지 출동하여 시민들의 혼란을 수습했기에, 그것도 비교적 순조롭게 행해졌다.
대부분의 준비를 갖춘 후, 미네르바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크와 그 일행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지 궁리하면서.
다크 일행은 곧장 황궁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다음 천천히 아래쪽으로 고도를 낮추어 바닥에 내려섰다.
“웬 놈들이냐?”
하늘 위에서 날아서 내려온 그들을 발견한 경비병이 달려오자, 다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미네르바를 불러오너라.”
미네르바는 이미 자신을 찾아오는 일행들에 대해서 실례가 없도록 당부를 해 놓은 상태였기에 경비병은 공손하게 질문을 던졌다.
“켄타로아 공작 전하를 찾아오신 분들이십니까?”
“그렇다.”
잠시 후 경비병의 보고를 받은 미네르바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것을 보며 다크는 살기 어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허둥대는 꼴을 보니, 자신이 지은 죄가 뭔지 알긴 아는 모양이군.”
미네르바는 달려오면서 다크의 뒤에 서 있는 아르티어스를 확인했다. 역시 그녀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혼자 온 것이 아니고 드래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것도 가공스러운 힘을 지닌 웜급 드래곤을. 미네르바는 다크의 앞에 서자 곧장 준비해 놨던 것을 내밀었다. 아르티어스가 직접 만들어서 다크에게 선물했던 그 검이었다. 미네르바는 다크가 검을 허리에 차는 것을 보며, 망설이지 않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제발, 나 한 사람의 목숨으로 용서해 줘. 이곳에는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 그들은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서 비롯된 것인지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제발 그들은 용서해 주길 바라.”
다크는 무표정하게 미네르바를 잠시 바라봤다. 그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서를 구하기에 앞서서, 나한테 먼저 건네줘야 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미네르바는 흠칫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놨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그린레이크 공작이 데려가서 세뇌를 시키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제 그를 감옥에 수감해 버린 후 그들을 빼내기는 했지만, 도저히 너에게 건네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다크가 화가 나서 외칠 때, 뒤에서 아르티어스가 한마디 했다.
“그들을 데려오너라. 내가 치료하마.”
미네르바가 고개를 살짝 까딱이자 몇몇 기사들이 달려갔다. 그들은 곧이어 다크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그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어딘가 좀 이상했다. 모두들 두 눈이 풀려 있었고, 뭔가 멍청한 상태였다. 다크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아르티어스에게로 간절한 시선을 담아 보냈다.
“치료하실 수 있는 거지요?”
“헛, 나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내가 누구냐? 그 위대한 골드 일족의 후예로서 나보다도 잘난 드래곤이 있으면…….”
아르티어스는 갑자기 생각난 듯 말을 멈추고 아르티엔의 눈치를 힐끔 봤다. 아르티엔은 저런 바보탱이 아들 따위는 둔 적이 없다는 듯 먼 산을 보는 척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종족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저따위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아르티엔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이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고칠 수 있으면 빨리 고쳐 주세요.”
“알겠다, 그만 보채거라. 알아서 해 줄 테니까.”
아르티어스는 멍청하게 서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서는 마법의 푸른 오라(Aura)를 뿜어내고 있는 손을 들어 각자의 머리 위에 살짝 올리기를 반복했다. 잠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더니 갑자기 팔시온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 아르티어스 님,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팔시온은 갑자기 눈앞에 아르티어스가 보이고, 또 저 앞쪽에는 다크의 모습까지 보이자 어리둥절해서 말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분명히 정보부원이라고 솔직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밝힌 그 개자식들에게 별의별 고문을 당했던 것 같은데, 그게 꿈이었나? 하지만 이리저리 돌아가던 팔시온의 시선에 미네르바와 그의 부하들이 잡히자 화들짝 놀랐다. 그건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희들을 구해 주러 오셨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충 사태 파악을 한 그들은 저마다 아르티어스에게 감사를 보낸 다음 다크에게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모두들 한마디씩 던졌다.
“너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빨이 갈린다구.”
“그 정보부에 소속되어 있다는 개자식들……. 너도 한번 당해 보면 혀를 내두를 거야.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지 말이야.”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다구.”
다크에게 별의별 말을 다 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다. 신뢰를 가득 담은 미소가 말이다. 다크는 아르티어스가 동료들을 완벽하게 치료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미네르바에게로 다가갔다. 미네르바 또한 시선을 딴 데로 돌리지 않고 다크를 마주 봤다. 다크는 서로 간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다고 생각된 그 순간 발을 날렸다.
퍽!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미네르바는 뒤로 나뒹굴어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그녀의 부하들이 다크를 향해서 저마다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안 돼!”
입술이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상태에서도 단호하게 외쳤다. 부하들은 검을 뽑아 든 상태에서 모두들 멈춰 섰다. 하지만 아직 검을 회수할 생각은 모두 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검을 거둬라. 이것은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둬야 옳은 것. 나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낼 수 있게 도와 다오.”
스메르는 입을 악 다물며 분노를 씹어 삼켰다. 그런 다음 장중한 어조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검을 넣어라. 이건 명령이다.”
레디아 제1근위대의 기사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미네르바는 정말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다크에게 두들겨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두들겨 맞는 미네르바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다크가 이런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봤을 때, 결코 또 다른 뒤탈을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엘프리안시, 60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이 도시만 지킬 수 있다면 그녀는 그 어떤 굴욕이라도 참아 낼 수 있었다.
다크는 두들겨 팰 만큼 팼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동작을 멈추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배반당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해. 두 번 다시 나의 호의를 받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나를 한 번 속인 인간은 절대로 신뢰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빠, 갈 준비를 해 줘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그가 아는 한 아들놈은 결코 이 정도에서 복수를 마무리할 인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벌써 가려고? 이제 시작인 거 아니냐? 너는 한 번도 이 아빠의 브레스가 얼마나 대단한지 못 봤잖아. 오늘 한번 보여 주려고 했더니.”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미네르바가 치를 떠는 가운데, 다크는 냉정하게 외쳤다.
“그만 가자구요. 최소한의 반항도 안 하는 상대를 무슨 재미로 계속 두들기고 있겠어요?”
아르티어스는 기죽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알겠다. 나는 절대로 가기 싫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리로 와라. 아버지도 이리로 오시죠.”
그런 다음 팔시온 일행에게는 갑자기 사나운 눈초리를 희번뜩거리며 말했다.
“네놈들은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 알아서 재깍재깍 기어 와야 할 거 아냐?”
“옛, 어르신.”
팔시온 일행이 허둥지둥 아르티어스의 주위로 모여 들고 있을 때, 아르티어스는 다크에게 다시금 다정한 시선을 보내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래, 어디로 가고 싶냐? 치레아로 돌아갈 거야?”
“몰라요. 어디 조용한 곳에서 친구들하고 술이나 한잔하고 싶어요.”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
아르티어스는 공간 이동을 하기 직전, 미네르바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으드드득. 나를 속인 벌은 네년의 뼛속 깊이 새겨 줄 것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미네르바는 그것을 정확히 들었다. 미네르바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스메르 경!”
“예, 전하.”
“모두 철수할 준비를 해라. 오늘 하루 동안은 수도를 비운다. 아무래도 이것으로 일이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치레아 대공은 그런대로 용서를 해 준 것 같은데, 드래곤은 그런 것 같지가 않은 모양이다. 자, 서둘러라.”
“옛, 전하.”
다크 일행이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것을 보고 마법사는 제임스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발렌시아드 각하, 아무래도 이것으로 끝인 모양입니다. 복수가 의외로 싱겁게 끝났군요.”
“다행한 일이 아닌가? 주범인 크루마를 이 정도로 처리한 것을 보면, 본국은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겠어. 자, 돌아갈 준비를 해 둬라.”
“지금 통신으로 보고를 하시지 않고 돌아가서 직접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화급을 다투는 보고 사항은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고, 정말 오늘은 멋진 광경을 봤어. 미네르바 켄타로아……. 정말 대단한 여자다. 같은 기사로서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엘프리안시가 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저 엄청난 치욕을 참아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치레아 대공도 대단해. 자신에게 충분히 복수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정도에서 넘길 수 있는 것을 보면, 약자에 대한 관용이 있는 진정한 기사임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훌륭한 기사들과 같은 시대를 살게 해 주신 아레스 님께 감사드린다.”
마법사는 제임스의 혼잣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말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각하.”
“그래, 출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