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세 시간 뒤. 다크와 팔시온 일행은 모두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두 드래곤은 차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위기는 상당히 화기애애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뭐가 불만인지 팔시온 일행들을 째려보고 있었다.
‘저 쉐이들이! 나는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아까워서 입술만 적시고 있는데, 아예 쏟아 부어라, 부어! 술을 음미할 줄도 모르는 저런 무식한 것들에게 이런 고급술은 돼지 목에 진주야, 진주.’
얼큰하게 술에 취한 다크는 한 잔 쭉 들이켠 후 로얄 크루나를 다시 한 잔 따라서 아르티어스에게 권했다.
“아빠는 왜 안 드세요? 자, 한 잔 쭉 들이켜세요.”
‘에구구구, 내 아들이지만 왜 이렇게 술 먹는 모습도 이쁜지. 술도 정말 화통하게 잘 마신다니까, 히히. 하지만 저 무식한 것들은 미친 듯이 퍼먹는 거지, 저게 마시는 거야?’
술잔을 받아 쭈욱 들이켠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예뻐 못 견디겠다는 듯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얘야, 왜 할아버지에게는 권하지 않는 거냐? 지금껏 옆에서 가만히 보니까 할아버지한테는 말도 안 하고 술도 안 권하는데 왜 그러느냐? 좀 어색한 것 같아서 보기에 안 좋구나.”
“아뇨.”
다크는 혀 꼬부라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게…, 도저히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말이죠. 아빠도 생각해 봐요. 저게 할아버지의 모습이냐구요.”
아르티엔의 현재 모습은 이제 겨우 열댓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드래곤처럼 취향에 따라 겉모습을 자주 바꾸는 종족이라면 으레 그렇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다크로서는 이런 일은 처음 당해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고, 약간 당황스러운 김에 그냥 무시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흐음, 그러니까 내 겉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구나.”
“아뇨, 그건 아니구요. 그러니까 뭐랄까…, 전혀 할아버지 같다는 느낌이 안 든다는 거죠. 할아버지라면 할아버지다워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르티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어떻게 생겨야 할아버지라는 거냐? 네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형을 한번 말해 봐라.”
“으음, 글쎄요. 일단 위엄이 있어야죠.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연장자의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받아 줄 것 같은 푸근한 느낌, 거기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노련미가 있으면 더욱 좋죠. 주름도 조금 있으면 좋구요. 그리고 세월에 퇴색해 가는 오랜 상처의 흔적도 하나쯤 있으면 좋죠. 적당히 긴 수염, 그리고…….”
술에 취해 정신없이 횡설수설하고 있는 다크의 눈빛이 점차 꿈꾸는 듯 몽롱하게 변해 갔다. 그가 중얼거리는 할아버지의 이상형은 바로 사부 유백의 모습이었다. 그가 살아온 기나긴 인생에서 자신에게 아낌없이 정을 줬고, 또 모든 것을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상승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줬던,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물론 아르티어스도 자신에게 아낌없이 정을 주고 있었지만, 그는 워낙 젊은 용모를 하고 있었기에 이상적인 할아버지의 상이 될 수 없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상황이었기에 아르티엔으로서는 다크가 말하는 할아버지의 인상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연장자의 느낌? 푸근함? 노련미와 적당히 긴 수염 등등……. 이건 완전히 주관적인 해석이 아닌가?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아르티엔에게는 필요했다. 그렇기에 아르티엔은 슬며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곧 유백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주절대고 있는 다크의 머리 위로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오호라, 바로 저 모습을 가져다가 저렇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로군.’
역시 백 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아르티엔은 슬며시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내 겉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꿔 주지. 어쨌든 유희를 즐기기로 한 이상 그 정도의 서비스는 해 줘야 하겠지.”
말을 마친 아르티엔의 모습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뭔가 빛이 확 뿜어 나온 후 그 빛이 사라지고 나니까 바뀌었더라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키 작은 소녀의 몸집이 점점 자라나고, 팽팽하던 피부가 약간 쭈글쭈글해지며 주름도 몇 겹 생겼다. 그리고 곧이어 수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커다랗던 소녀의 눈망울은 옆으로 길게 찢어지면서 평범한 크기로 돌아갔고, 오똑하던 코는 약간 낮아지면서 옆으로 슬쩍 퍼져 버렸다. 그리고 새하얗던 피부는 문어처럼 급격히 변색하기 시작하더니 황갈색으로 바뀌었다. 변신에는 1분 정도 걸렸는데, 처음에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을 때 매우 신기한 듯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던 다크의 표정이 변신이 완료되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윽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곧이어 입술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 사부.”
물론 다크도 상대가 유백이 아니라 아르티엔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실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까지 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또 임종을 도와 드리지도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던가. 다크는 술까지 취한 상태였기에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아르티엔의 도움으로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부터 그는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을 한꺼번에 되돌아보며 느꼈던 혼란, 후회 등등.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그것이 더욱 심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던 그에게 유백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유백은 그가 최초로 인간의 정을 느꼈고,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의 눈앞에 있는 유백이 아르티엔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다크로서는 가짜라도 좋았다.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그리고 그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 사부…….”
다크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르티엔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아르티엔은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르티엔으로서는 유희로서의 할아버지 역을 했을 뿐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크는 그렇지 않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부가,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었어요, 흑흑.”
급기야 다크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르티엔의 품에 안기어 오열하자,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어이없는 듯 바라보다가 곧이어 잔뜩 독 오른 독사마냥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아들놈이 언제 자신에게 저런 나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할수록 열 받는 일이었다. 어떻게 겉모습 하나 바꾼 것을 가지고 저렇게까지 대접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요?”
아르티어스가 심통 궂은 어조로 아르티엔에게 항의하는 가운데, 옆에 앉아 있던 놈들이 그의 분통을 더욱 터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휘익! 너무 감동적이야.”
팔시온과 미카엘이 술김에 휘파람까지 불어 대며 난리를 치는 가운데, 미디아도 두 손을 가슴에 대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겉모습이 우락부락한 무사라고 해도 그녀 역시 여자인 것이다.
“왠지 가슴이 찡한 것 같아.”
한참을 오열하던 다크의 울음소리가 점차 잦아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르티엔이 축 늘어져 있는 다크를 안고 일어섰다.
“너무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아서 내가 마법으로 재웠다. 얘는 내가 데려다가 눕힐 테니까 너희들은 좀 더 마시다가 오거라.”
아르티엔은 다크를 안고 나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남아 있던 로얄 크루나를 품속에 집어넣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르티엔이 다크를 안고 2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르티어스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저 영감탱이의 노회한 술수에 아들을 뺏길 것 같다는 불안감이 아주 진하게 들었던 것이다. 이때 옆에서 팔시온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아르티어스를 향해 주절거렸다.
“어, 어∼르신, 꺼억! 술이 없는뎁쇼.”
“뭣이! 이 새끼들이!”
코린트에 감도는 전운
드넓은 초원과 야트막한 산으로 이뤄져 있는 아름다운 프루니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을 달리며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오랜 옛날에는 사냥 대회라는 행사 자체가 각자의 기마술과 궁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기회였고, 국가가 지닌 세력을 타국에 과시할 수 있는 무대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돌진해 들어감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군사 훈련의 목적까지 띠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검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사들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또 그들에게 타이탄이라는 마법 병기가 주어진 후부터 사냥 대회의 성격은 많이 변질되었다. 군사 훈련의 목적보다는 귀족들의 친목 도모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크루마의 황실 사냥터에서 벌어진 이번 사냥 대회도 여태껏 있어 왔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귀족들 간의 친목 도모는 물론이고 미란을 흡수 통합한 후 더욱 강대해진 국력을 대외적으로 과시라도 하는 듯, 크루마의 모든 귀족들이 참여하여 크루마 제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개최되었다. 경호의 임무보다는 귀족들이 사냥감들을 비교적 사냥하기 쉽도록 몰아주는 임무를 더욱 중시하게 된 1개 사단급의 병사들이 폭넓게 포진하여 귀족들을 향해 사냥감들을 몰아주면서 사냥 대회는 시작되었다.
잡털 하나 없는 흰 말을 타고서 사냥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 바로 그가 현재 크루마의 63대 황제인 알카파이네 드 크루마였다. 한 귀족 젊은이가 한껏 폼을 잡고서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자, 화살은 사슴의 엉덩이 부근에 명중했다. 상처 입은 사슴은 길게 울부짖으며 더욱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며 황제는 혀를 끌끌 찼다. 황제 또한 사냥을 즐겼기에 젊은이의 미숙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의 뒤에 서 있던 늙은 기사가 황제의 마음을 짐작하고서 나직하게 말했다.
“이렇게 구경만 하실 것이 아니라 폐하께옵서도 사냥에 참가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황제는 자신도 참가할까하는 마음이 솟구쳤지만, 곧이어 그 욕구를 너털웃음으로 억눌렀다.
“허허헛, 아닐세. 짐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아. 뒤늦게 끼어들어 봐야 괜스레 욕만 듣게 된다는 것을 짐이 모를 줄 아는가? 모두들 짐이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각별히 배려할 것이고, 또 짐보다 더 많은 짐승을 사냥하지 않도록 모두들 조심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여는 대규모 사냥 대회인데, 괜히 모두의 흥을 깰 이유가 없지.”
바로 이때, 마법사 한 명이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 임시 마법진으로 공간 이동해 왔다. 그는 초조한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이어 그는 찾으려던 사람을 발견했는지 황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사람은 황제의 뒤편에 서 있었기에 마법 따위를 사용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접근하려고 들었다가는 황제의 뒤편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암살자로 간주되어 즉각 목이 달아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추어라.”
곧이어 기사 한 명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채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마법사는 황급히 기사의 명령에 따라 멈춰서며 말했다.
“엘프리안에서 온 긴급 전문입니다. 국무대신 각하를 긴급히 뵙기를 청합니다.”
“가 보시오.”
그곳은 황제로부터 1백 걸음도 채 되지 않은 위치였기에 마법사는 국무대신 얼스웨이 후작을 향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방금 전의 그 기사가 검을 뽑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두 걸음 뒤에서 뒤따르기 시작했다. 얼스웨이 후작만 있다면 모르겠지만, 황제가 바로 근처에 있었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취해지는 조치였다.
마법사는 얼스웨이 후작의 앞에 이르자 예법에 따라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이냐?”
“엘프리안에서 도착한 긴급 전문입니다, 각하.”
마법사는 자신의 품속에 넣어 온 전문을 아주 천천히 꺼내어 건넸다. 황제 근처에서 품속에 넣었던 손을 급히 뽑기라도 한다면, 뒤에 서 있는 기사는 그 행위를 단도 같은 흉기를 던질 준비를 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즉시 목이 날아가 버릴 우려가 있는 것이다. 국무대신인 지크니아 엘 얼스웨이 후작은 그것을 받아서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악에 찬 표정으로 변했고, 손까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얼스웨이 후작은 황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간 후 땅바닥에 엎드리며 통렬한 어조로 외쳤다.
“폐하, 큰일이 벌어졌사옵니다.”
황제는 마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근엄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얼스웨이 경.”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긴급 보고이옵니다.”
황제는 그다지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듯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고?”
“예, 폐하. 갑자기 골드 드래곤이 나타나서 엘프리안을 폐허로 만들었다고 하옵니다.”
황제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황실의 주요 인물들이 이곳에 다 와 있다고 하지만, 수도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미네르바가 기사단을 이끌고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켄타로아 경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이유 없이 엘프리안을 파괴할 리는 없을 텐데…….”
“어쨌건 사실인 듯하옵니다. 그러니 빨리 궁으로 귀환하시어 전체적인 피해의 정도를 파악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일인 듯하옵니다.”
“허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어쨌든 돌아가세.”
“그렇다면 사냥을 중지시킬까요?”
“아니, 놔두게나. 괜히 저들의 흥을 깰 이유는 없지. 또 사냥 대회를 중지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옛, 폐하.”
일단 여름 궁전으로 돌아간 황제는 모든 보고를 종합하여 정확한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황제는 엘프리안이 파괴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루마의 수뇌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법사는 엘프리안으로부터 전송된 영상을 마법으로 보여 줬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브레스 한 방에 엘프리안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것을 보며 사방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황제는 그것을 본 순간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아 평생을 가꿔 왔던 수도가 하루아침에 가루가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었고, 그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황제가 쓰러지고 나자 국무대신 얼스웨이 후작은 급히 의회 의장인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에게 그것을 보고했다. 후속 조치를 독단으로 처리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린레이크 공작의 행방이 묘연했기에, 그랜딜 공작은 그를 대신해서 원로원을 소집함과 동시에 황태자를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스웨이 후작이 주치의의 소견에 따르면 황제의 건강 상태가 매우 위독하다는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황제를 배알했다. 황제와 그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황제를 알현하고 나오자마자 긴급히 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군의 총사령관인 로체스터 공작이 평상시에 소집하는 것은 기사단의 수뇌부나 각 군의 사단장급들인 데 반해, 이번에 소집한 사람들은 모두 다 내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이라는 점이 달랐다.
“내가 경들을 소집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 발생했기 때문이오.”
갑자기 로체스터 공작이 그들을 회의에 불러내어 국가의 존망이 걸렸다는 둥 뜬금없는 말로 서두를 장식하자 모두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손을 들어 조용히 시킨 후 말했다.
“일단 본국에 어떤 위험이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정보부장인 베르딘 후작의 보고부터 들어 본 후에 회의를 시작하기로 하겠소.”
지명을 받은 베르딘 후작은 인사를 한 후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치레아 공국의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베르딘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잠시 생각할 여유를 준 후 말을 이었다.
“일의 발단은 그녀의 실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제2차 제국 전쟁 당시 본국의 최대 숙적인 그녀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자칫 전쟁 패배라는 한계 상황에까지 치달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크라레스 전력의 핵인 그녀가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갑자기 실종되었기 때문에 본국은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실종됨에 따라 엄청난 존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정보부에서 치밀하게 조사한 결과, 그녀는 골드 드래곤과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그 판단에 가장 큰 단서를 제공한 것이 크루마 제국의 수도 엘프리안의 파괴였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국무대신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던졌다.
“엘프리안의 소멸에 대해서는 나도 겨우 한 시간 전에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과 그녀가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예, 정보부에서 각 채널을 동원, 철저히 정보를 분석해 본 결과 치레아 대공이 실종될 당시 마지막 흔적이 크루마의 엘프리안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크루마의 수도 엘프리안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이지요. 골드 드래곤은 그녀의 실종에 크루마가 관계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드래곤의 분노가 풀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 한 드래곤의 파괴 행각은 계속될 게 분명하다는 것이 정보부의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의 요점이 뭔가? 다음 대상이 본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예, 그렇사옵니다, 국무대신 전하. 그녀가 실종될 때까지 크라레스의 가장 강력한 적국은 우리 코린트였습니다. 그런 만큼 드래곤으로서는 그녀가 실종된 것에 대해서 본국에 혐의를 둘 가능성이 지대하지 않겠습니까?”
국무대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골드 드래곤이 그녀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다음 파괴 대상으로 케락스를 선택할 가능성이 짙다는 말이군.”
“예, 그렇사옵니다, 국무대신 전하. 그런데 문제는 골드 드래곤이 본국에 언제 올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케락스 상공에 그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까지도 있사옵니다.”
베르딘 후작의 말이 끝나자 로체스터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경들을 긴급히 소집한 것이오. 이미 폐하의 윤허는 떨어졌소. 국무대신은 최우선 순위에 따라 황족 및 주요 시설을 긴급히 시외로 대피시키도록 하시오.”
“그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로체스터 공작. 아무리 긴급 사항이라고 해도 확인되지도 않은 정보를 믿고 대피 작업을 진행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그 많은 시설 및 재화들을 어떻게 단시일 내에 시외로 대피시킨다는 말입니까?”
국무대신이 곤란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로체스터 공작은 화가 나서 외쳤다.
“그렇기에 폐하의 칙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당장 철수 작업을 시작하란 말이다. 수도 방위 사령부에는 내가 이미 명령을 내려 놨으니까 원하는 만큼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타이탄 생산 시설을 몽땅 다 시외로 옮기도록 해라.”
“하지만 그렇게 대대적으로 밤중에 인원을 동원한다면 시민들이 눈치 챌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청난 혼란이…….”
“닥쳐라. 그런 것도 내가 생각하지 않은 줄 아는가? 하지만 지금의 비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시민들의 혼란은 감수해야 한다. 전에 코린티아시가 파괴되었을 때, 타이탄 생산 시설의 파괴로 인해 본국이 얼마나 막대한 타격을 받았었는가? 그것을 완전히 복구하는 데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런 악몽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다.”
로체스터 공작은 회의장에 모여 있는 모든 관료들을 한 차례 둘러본 후 서슬 퍼런 어조로 외쳤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모두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단축시켜라. 만약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있다면 내 직접 반역죄로 처단하겠다. 그리고 철수 작업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파괴해도 무방하다.”
로체스터의 강압적인 자세에 국무대신은 어쩔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내정을 담당하는 수장이 저럴 정도니 그 밑의 관료들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더 이상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기에 로체스터 공작의 일방적인 지시로 회의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