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7화 (353/930)

과연 제1귀빈관의 대접은 특별한 것이었다. 식탁 옆에서 다섯 명의 악사들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거대한 탁자 위에는 수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평상시에 상류층의 물을 먹은 듯 행동해 왔던 미카엘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진귀한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앞에 놓여 있는 식기들마저도 모두 금은세공품들로, 드워프가 세공한 듯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제임스는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뒤,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제임스는 한군데에 모여서 서 있던 시종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움직여 식사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귀빈들이 손짓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가리키면 시종들은 그 음식을 작은 접시에 담아서 가져왔다. 그 작은 접시는 각자의 앞에 놓여 있던 순금 접시 위에 놓여졌다. 이때 한쪽 귀퉁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관의 치료를 받아서 얼굴의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팔시온이었다. 그는 입 안 가득히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젠장! 이거 감질나서 먹겠나. 가져오려면 좀 많이나 갖다 주지. 한 입 털어 넣으면 없잖아. 안 그래? 미카엘.”

그 말에 미카엘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젠장! 치료나 끝난 후에 먹으러 오라고 하지. 하필이면 내가 치료받을 차례가 되니까 밥 먹으러 오래.”

팔시온은 미카엘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뭔가 중얼거리고 있자 의아하게 생각했다. 평상시에는 귀족물을 먹은 듯 갖은 폼을 다 잡았던 그였다. 미카엘에게 지금처럼 자신을 과시할 좋은 기회가 있겠는가? 마치 오랫동안 이런 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아한 폼을 잡으며 음식을 먹을 것이고, 또 자신들에게 이런 것은 이렇게 먹는 거라고 으스대고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렇게 주위를 한 번씩 힐끔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해 본 팔시온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야, 미카엘! 너답지 않게 왜 그래? 귀족물 먹었다고 거짓말한 게 들통 나서 그러는 거야? 짜식! 그렇게 의기소침하지 말고 나처럼 편하게 먹어. 뭐, 우리가 언제 주변 신경 쓰고 먹었냐? 그냥 입 안에 퍽퍽 집어넣으면 되는 거지 뭐.”

팔시온의 말을 들은 미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그래, 귀족처럼 먹을 줄 모른다고 기죽을 필요 없어. 넌 그렇게 안 먹어도 멋있잖아. 팔시온을 봐, 포크만 쓰고도 멋있게 먹고 있잖아.”

미디아의 칭찬에 입 안에 음식을 연신 퍼 넣고 있던 팔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음식은 복스럽게 먹어야 한대.”

팔시온의 말에 미카엘은 인상을 벅벅 쓰며 말했다.

“이 자식들이, 닥치고 밥이나 처먹어.”

이때 시종이 들어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까뮤 드 로체스터 공작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식당 문이 열리며 로체스터 공작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시종 한 명이 아주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술 한 병을 들고 따라 들어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아르티엔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말했다. 이미 제임스에게서 아르티엔의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았기에 그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위대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술은 황제 폐하께서 위대하신 분께서 왕림하셨다는 것을 아시고 특별히 하사하신 것입니다. 제가 직접 따라 드리는 영광을 누려도 될는지요.”

아르티엔은 포도주병을 힐끗 본 후 경악했다.

“이, 이것은 대륙에 몇 병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는 아그립파 1세가 아닌가?”

로체스터 공작은 상대의 박식함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코린트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도주라는 아그립파 1세가 맞습니다. 이 술은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황실에만 내려오는 진품이지요. 아마 현재 남아 있는 술은 단 세 병밖에 없을 겁니다. 나머지는 전에 코린티아시와 함께 파괴되었으니까요.”

오랫동안 레어에 있었기에 인간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아르티엔은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코린티아시가 왜 파괴되었지? 혹시 너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도시 파괴자가 아니라구요. 코린티아시는 몇 년 전에 크루마에서 유성 소환 마법으로 박살 내 버렸죠.”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한 후 로체스터 공작에게 시선을 돌리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유성 소환 따위로 도시를 파괴한 것을 보면 크루마는 정말 나쁜 놈들이지? 유성 소환은 금지된 마법인데 말이야.”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로체스터 공작은 노회하게 대처했다.

“허허허, 어쩔 수가 없죠. 알고도 당한 저희들의 잘못이라고 봐야죠.”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엘프리안이 파괴된 걸 아느냐?”

“예.”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아 줬는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그거 한 병 더 얻을 수 없을까? 그때 힘을 너무 썼더니 목이 컬컬해서 말이지.”

“예?”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재빨리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위대하신 분의 부탁이신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더욱이 저희들의 원수까지 갚아 주셨는데…….”

로체스터 공작은 뒤에 서 있던 시종에게 나직하게 지시했다.

“이거 한 병 더 가져와.”

거기까지 말한 후 로체스터 공작은 아르티엔을 힐끔 본 후 명령을 수정했다.

“두 분이 오셨는데 한 분께만 드리면 예의가 아니지. 내가 나중에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두 병 다 가져오너라.”

“옛, 전하.”

로체스터 공작의 말을 들은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는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눈물의 부자 상봉

집무실로 들어오는 로체스터 공작의 안색이 밝은 것을 보고 레티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신 모양이옵니다, 전하.”

“응, 모든 일이 잘 해결됐어. 이제 수도를 옮길 필요는 없으니 철수 작업을 중지하라고 전하게.”

“축하드리옵니다, 전하.”

“허허헛, 다 경의 덕분이야. 경의 아그립파 1세를 뇌물로 건네자는 말이 제대로 먹혀 들어갔어.”

“과찬이시옵니다. 그럼, 아그립파 1세 두 상자가 케락스시를 구한 셈이군요. 아무리 귀한 포도주라고 하지만 수도가 파괴되는 것에 비할 수 있겠사옵니까?”

레티안의 말에 로체스터 공작은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핫! 두 상자가 아니라 단 세 병일세. 왠지 상자째로 준다고 하면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서 전 대륙에 단 세 병만이 남아 있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그 드래곤이 은근히 협박을 하며 한 병 더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아주 크게 인심 쓰는 척하면서 한 병 더 줬지. 그랬더니 입이 쭉 찢어지더구먼.”

레티안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코린티아시가지가 유성 공격 마법으로 파괴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철수할 만한 시간 여유가 있었을 정도였는데, 황실에서 애지중지하는 포도주들을 피난시키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된다. 코린티아시는 파괴되었지만, 황실의 물품은 모두 다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옮겼기에 아그립파 1세 또한 전량 다 무사히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상태였다.

“역시 로체스터 전하께서는 대단하시옵니다.”

이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경비병이 들어오며 말했다.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고 하게.”

“옛.”

곧이어 제임스가 들어왔다. 로체스터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제임스의 공을 치하했다.

“역시 처음에 경을 보내기를 잘했어. 거물급 드래곤이 왔다는 것에 대해서 경이 전해 주지 않았다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거든. 그리고 그 드래곤이 포도주를 아주 좋아한다는 정보를 빨리 보내 줬기에 대책을 세울 수 있었어. 하하핫, 이제 모든 것이 잘된 것 같군. 적당히 달래서 보내면 끝이거든.”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곧이어 제임스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드래곤이 베크렐 드 드루이드 후작을 잡아오기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뭐? 베크렐? 그게 누구지?”

옆에서 레티안이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녀는 코린트 제국의 귀족 족보를 죄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예. 케락스에서 1백 킬로미터쯤 남쪽으로 가다보면 드루이드라는 지방이 있사옵니다. 그곳을 다스리는 영주이온데, 그의 아버지 대부터 궁정에서 이렇다할 직위를 얻지 못했기에 전하께서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그를 왜?”

“치레아 대공이 탈출했을 때 그의 딸과 관계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의 딸은 그녀를 아버지의 성 노리개로 선물할 생각을 했던 모양이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정도는 웬만한 놈들은 다 하는데, 그 죄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것도 귀족을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드래곤의 제의를 거절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드루이드 후작은 약간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 너무 많은 세금을 농노들에게서 거둬들이는 바람에, 농노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하옵니다.”

“글쎄…, 하지만 지방 영주가 폐하께 30퍼센트의 세금만 제대로 납부한다면 그가 얼마를 거둬들이든지 상관할 수는 없지 않나? 폐하의 몫을 빼돌렸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그렇지만 드루이드는 농노들의 영지 이탈이 너무 심하옵니다. 거의 태반에 가까운 농노들이 탈출했고, 그 농노들을 잡아들인다고 인근의 군대까지 동원되었을 정도였사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잡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그에게 영지를 맡긴다면 결국에는 단 한 명의 농노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 점을 생각하시옵소서,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흐음,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러니까 경의 말은 영지의 관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밀어붙이자는 말이군.”

“예, 전하.”

“좋아, 폐하께는 내가 말하지.”

로체스터 공작은 결심을 한 듯 제임스를 향해 명령했다.

“그놈을 당장 잡아들이게.”

“옛, 전하.”

밖으로 나가려던 제임스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금 돌아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전하, 혹시 치레아 대공의 일행들 중에 섞여 있는 기사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셨사옵니까?”

“뭐? 글쎄…, 그 드래곤들한테 신경 쓴다고 미처 거기까지 여유가 없었네. 뭐 특이한 점이라도 있었나?”

“그게 말이옵니다, 저…, 제가 잘못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 중에 미카엘이 끼어 있는 것 같았사옵니다.”

“뭣? 미카엘이?”

“예, 전하. 식사 중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수행이 고되다고 도망친 놈이 치레아 대공 같은 거물급을 수행하는 기사가 되었다니, 말이 안 되지 않나?”

“예전의 미카엘을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르겠사옵니다.”

로체스터 공작은 필요 이상으로 딱딱한 어조로 힐책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경은 치레아 대공 일행을 잘 영접해서 보낼 궁리나 하게.”

“옛, 전하.”

제임스가 나가고 난 후, 로체스터 공작은 레티안에게 말했다.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네. 경은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예? 예, 전하.”

레티안이 나간 후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에잉, 못난 놈 같으니라고.’

옛일을 회상하는지, 로체스터 공작의 두 눈이 아련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로체스터 공작은 키에리의 방해로 인해 리사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울분을 달래기 위해 미친 듯이 무술을 익히는 것에만 전념했었다.

그러다가 메를리나라는 미모의 여인과 뒤늦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자신의 마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리사라는 존재를 잊는 데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메를리나와의 사랑도 단 5년으로 막을 내려야만 했다. 몸이 약했던 그녀는 난산을 견디지 못하고 첫 아이를 낳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로체스터 공작은 태어난 아기에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아주 잘생긴 사내아이였는데도 오히려 그 점이 로체스터 공작의 속을 뒤집어 놨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사랑스러웠던 메를리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로체스터 공작은 아들로 인해 부인이 죽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기에, 자연히 쌀쌀맞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전통적인 무가인 로체스터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으면서도, 가문의 검술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로체스터 공작이 어쩌다가 한 번씩 직접 교육을 시킬 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짜증 섞인 꾸중으로 교육은 끝이 나곤 했다.

그래서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로체스터 공작의 부하들에게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무술의 기초를 배워야 할 어린 시절을 어영부영 태평스럽게 보내 버렸던 것이다.

그 아이가 청년기에 들어섰을 때, 로체스터 공작은 그제야 가문의 검술을 전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강도 높은 수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련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아들의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못난 녀석, 그까짓 수련을 못 견디고 가출을 하다니……. 휴! 그나저나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죽어서 그녀의 얼굴을 어찌 볼지 걱정이군. 그러고 보니, 메를리나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군.”

로체스터 공작은 잠시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급히 집무실을 나섰다. 처음에는 울적한 마음에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로체스터 공작의 발길은 어느덧 제1귀빈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치레아 대공을 수행하고 온 기사들은 어디에 묵고 있는가?”

로체스터 공작의 질문을 받은 시녀는 파랗게 질리며 황급히 대답했다.

“예, 저 앞방이옵니다, 전하.”

로체스터 공작은 막상 방문 앞에 섰지만 망설이기만 할 뿐,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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