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9화 (355/930)

까미유와 오스카는 곧이어 마법이라도 직격한 듯 깊이 파인 구덩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구덩이들의 크기가 대단히 컸기에 그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자국일까요? 아주 깊이 파인 것을 보면 마법이라도 쓴 게 아닐까요?”

“글쎄……. 아니야, 마법은 아니고 뭔가 묵직하면서도 거대한 것이 날아와서 부딪친 것 같아. 여기를 봐.”

까미유는 재빨리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후, 구덩이의 제일 안쪽에 있는 둥그렇게 솟아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엄청난 물리적인 충격이 가해진 거야. 그 때문에 이 주위의 흙들이 몽땅 위로 날아가 버린 거지.”

구덩이 외곽 부분의 미끈한 부분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곳이 미끈한 것을 보면, 대단한 힘이 가해졌음에 틀림없어. 안 그러면 이렇게까지 깨끗한 경사면이 만들어질 수는 없거든.”

“그렇다면 적 타이탄이 철퇴라도 던졌다는 겁니까?”

“글쎄, 철퇴는 아닌 것 같아. 멀리서 철퇴를 던졌다면 이런 흔적이 생길 리가 없지. 이것은 좀 더 높은 각도에서 떨어진 물체에 의해서 생긴 거야. 물론 자네 말대로 먼 곳에서 타이탄이 철퇴를 던졌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철퇴가 어딘가에 있어야 할 거 아닌가? 혹시 녀석들이 회수해 갔다면, 이 근처에 타이탄의 발자국이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없잖아. 주위의 풀들을 봐. 어디에도 타이탄처럼 묵직한 것들이 돌아다닌 것 같은 흔적은 하나도 없어. 심지어 마차가 지나간 흔적조차 없잖아?”

“이해할 수가 없네요. 놈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아닐 텐데…….”

“글쎄 말이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구만. 어쨌건 이것만 가지고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좀 더 찾아봐야겠다. 너는 이쪽으로 가 봐. 나는 저쪽으로 가 볼 테니까.”

“예.”

잠시 수풀 여기저기를 뒤지던 까미유는 화살 한 대가 커다란 돌덩어리를 뚫고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래 웬만한 힘과 속도로는 화살이 돌을 파고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당한 실력의 기사로군.”

화살은 거의 20센티미터가 넘게 푹 박혀 있었다. 까미유는 검을 뽑아서는 솜씨 좋게 돌덩어리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과연 어느 정도 깊이로 들어갔는지 알아 보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로젠에게 보고할 자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이때 저 멀리서 오스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그는 서둘러 작업을 끝내고 잘라 낸 돌 조각을 가지고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것 좀 보십시오.”

오스카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밑동째 박살이 나서 쓰러져 있었다.

“대장 말대로 마법은 아닌 모양입니다. 나무를 박살 낸 후 저 뒤쪽에 있는 땅바닥까지 푹 팬 것을 보면, 철퇴 같은 둥근 것을 던진 것이 확실해요.”

“철퇴는 아니야. 뭔가 굵고 긴 사슬 같은 것 끝에 묵직한 철구가 붙어 있는 형식인 듯하다. 이쪽을 봐. 사슬 같은 것이 쓸고 지나간 흔적이 있지 않나? 물론 철퇴에도 사슬을 붙이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방의 발자국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철퇴는 절대로 아니야. 철퇴라는 것은 원래가 근접 공격 무기잖아.”

“그럼, 채찍 같은 것일까요?”

“전체적인 흔적은 그런 것 같지만, 그걸 사용한 놈의 발자국을 찾을 수가 없잖아. 대체 뭐지? 크라레스 놈들이 뭔가 신무기라도 개발한 것인가?”

“글쎄요, 제 상식으로는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데요.”

“뭐 어쨌든 그건 적들이 나타나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우선 생존자를 찾는 게 급선무다. 자네는 저쪽으로 가 봐. 나는 이쪽으로 가지. 딴사람은 몰라도 한두 사람은 탈출에 성공했을 거야. 그들이 달아난 흔적을 찾아보라구.”

“예, 알겠습니다.”

대마왕 크로네티오의 집착

“쿠크마스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쥐새끼들 잡으라고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

토지에르, 아니 대마왕 크로네티오의 질문에 그의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발록들 중의 하나가 대답했다.

“아직까지 처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쓸모없는 자식!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여기가 마계라면…….”

크로네티오의 분노에 발록들은 몸을 움찔거렸다. 사실 이곳이 마계라면 그런 일을 처리 못한 쿠크마스는 당장 죽은 목숨인 것이다. 발록들 중의 하나가 대마왕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가면 어떻겠사옵니까? 당장 처리하고 돌아오겠사옵니다.”

크로네티오는 그 발록에게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닥쳐! 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건방지게 감히 참견을 해?”

“죄, 죄송하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거대한 덩치를 하고 있는 발록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즉시 납작 엎드려서 용서를 구했다.

“에잇 젠장!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 쿠크마스에게도 즉시 돌아오라고 일러라. 너희들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지금부터 철통같이 이곳만을 방어하도록 해라.”

“옛!”

빛과 같은 것이 번쩍 빛난 순간, 죽음의 기사의 몸통이 두 토막으로 쫙 갈라졌다. 기사의 몸은 두 토막이 나자마자 먼지로 화해서 흩어져 버렸다.

“헉헉헉! 젠장. 이걸로 스물둘!”

키에리는 자신을 수색하고 있던 괴상한 시체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자마자,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가 이동한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방금 전에 있었던 마나의 방출 때문에 그 지독한 몬스터가 곧 이리로 공간 이동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격투 현장에서 겨우 수십 미터도 안 되는 수풀 속에 납작 엎드릴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다.

“쿠아아아아.”

키에리가 엎드리는 그 순간 발록이 번쩍 하는 빛과 함께 그 거대한 덩치를 드러냈다. 이번에도 적을 찾을 수 없었기에 발록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지금까지 며칠 간의 추격전을 벌이며, 겨우 호비트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웬만한 일류 기사를 능가한다는 죽음의 기사를 몽땅 다 잃었다. 이대로 놈을 놓친다면 어쩌면 대마왕에게 죽음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발록은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쥐새끼 같은 놈, 나와랏!”

발록은 그 거대한 채찍을 사방으로 미친 듯 휘둘러 댔다. 그의 채찍질에 아름드리나무들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푹푹 쓰러졌다. 한참 동안 그렇게 채찍을 휘둘러 대던 발록은 이제 간신히 노기를 가라앉혔는지, 씩씩거리며 숨을 고른 후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발록은 떠나지 않고 그 근처 하늘을 계속 날아다니며 얄미운 쥐새끼를 찾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발록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자 쓰러지는 나무 밑에 엎드려 있던 키에리가 간신히 기어 나오며 투덜거렸다.

“쿨럭쿨럭! 젠장, 늑골이 두세 대 나갔나?”

키에리는 쓰러진 나무들을 엄폐물로 이용하면서 재빨리 기어서 황폐해진 숲을 벗어나서 아름드리나무들로 빽빽이 숲이 우거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한참 동안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여태껏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붙던 괴상하게 생긴 병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하군. 지금쯤이면 한둘 정도 나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잠시 더 기다려 본 후 키에리는 나무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3분의 2쯤 올라갔을 때, 저 멀리 까마득한 하늘 위를 선회하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끈질긴 자식!”

키에리는 나무 위에서 내려온 후, 자신의 타이탄을 불러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놈들에게 쫓기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결국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기력이 남아 있을 때, 최후의 도박을 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로체스터가 단 한 대만을 생산해서 키에리에게 선물했고, 키에리는 거기에 게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출력은 적기사와 동급인 2.3이었지만, 흑기사와 적기사들을 생산하며 얻은 각종 지식들이 몸체 곳곳에 집합된 최고의 타이탄이었다. 하지만 키에리는 모습을 드러낸 게레리아에 채 탑승하기도 전에 사력을 다해 도망쳐야만 했다.

게레리아의 어깨까지의 높이는 무려 6미터. 머리 위에 솟은 뿔까지 합한다면 6.3미터나 되는 크기였다. 그런 대형 타이탄이 공간을 가르고 숲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발록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발록이 만약 날아서 그곳까지 왔다면 키에리는 든든한 우군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록은 키에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간 이동해서 나타났다.

발록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게레리아를 향해 거대한 채찍을 날렸다. 게레리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고 있을 때, 이미 키에리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발록은 게레리아를 고철로 만들기보다는, 쥐새끼에게 더 볼일이 많았기에 그쪽으로 날아가며 무시무시한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그 덕분에 게레리아는 첫 출동에 주인도 태워 보지 못한 채 고철덩이가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붉은 구체가 날아가며 맹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곳곳에 불이 붙었다. 엄청난 화염과 연기 때문에 상대의 모습을 놓쳐 버렸지만, 그래도 발록은 끈질기게 그 일대를 초토화시켜 나갔다.

“헉헉헉…, 뭐 저런 게 다 있지? 타이탄도 아닌 게 무슨 덩치가 저렇게 커? 그리고 그 파괴적인 힘은 또 뭐야? 그리고 날아다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공간 이동을 자유자재로 하다니……. 그나저나 게레리아는 살아서 제대로 돌아갔는지 모르겠군.”

키에리는 나무 그늘에 몸을 꼭꼭 숨긴 후, 마나를 최대한 억제하여 자신의 기척을 숨겼다. 땅바닥의 그늘 위에 바짝 엎드린 상태였지만,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서 헤매고 있는 적에게서 몸을 숨기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키에리는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며 숲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거의 절망에 가까운 좌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내 살아생전에 저런 엄청난 몬스터는 처음 보는군. 그 거대한 채찍을 휘둘러 대는 힘도 힘이지만, 마법까지 쓰다니. 저런 놈이 몇 마리나 더 있는 거지? 아무리 코린트의 힘이 강대하다지만 수백 마리가 있다면 도저히 당해 낼 수 없겠군.”

키에리는 이제 다소 여유를 갖게 되자, 우선 지혈부터 했다. 방금 전 그 지옥과 같은 난리통을 신속히 빠져나오느라고 상처를 지혈할 시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키에리는 대충 지혈을 끝낸 후 칼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그는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마나를 움직이며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강의 기술을 쓸 준비를 했다.

“지금 내 몸 상태로 갑자기 오라 블레이드를 쓸 수 있을까? 마나를 끌어 모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끝장이야. 그렇다고 지금 끌어 모은다면 놈이 눈치 챌 거야. 어차피 모험이야. 더 이상 기회는 없어. 그래, 조금만 더 이쪽으로 가까이 와라. 뿌드드득!”

군데군데 불에 그슬린 상처가 쓰라려 왔지만,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키에리는 자신의 기척을 최대한 숨긴 상태에서, 하늘로 도약할 준비를 갖췄다. 몸의 상태도 최악이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적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타이탄만 한 덩치의 상대가 날아다니는 데다 공간 이동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그렇기에 여태껏 키에리가 상대해 온 적과는 판이하게 다른 움직임을 보이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키에리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기습 공격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통할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젠장, 타이탄에 제대로 탈 수만 있었더라도 이 상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

키에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발록은 그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키겠다는 듯 마법 공격을 퍼부어 대다가 갑자기 공격을 멈췄다.

“으응? 저놈이 왜 저래?”

키에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발록이 뭔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나타났을 때와 같이 퍽하고 사라져 버렸다. 키에리는 상대가 무슨 유인 작전을 벌이는가 싶어서 감히 움직이지는 못하고 계속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땅거미가 내려 사위가 어둑해진 후에야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그때 적은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 같았다.

“포기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키에리는 상대의 기척을 도저히 찾을 수 없자, 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투덜거렸다.

“으으윽!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군.”

키에리는 서둘러 옷을 찢어 화상으로 진물이 흘러나오는 상처를 싸맸다. 대충 치료가 끝나자 그는 서둘러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쉬도록 하자. 이곳은 아무래도 위험해.”

크로네티오는 지하로 내려온 후 투덜거리며 열심히 마법진을 그렸다. 이계와 연락을 해야만 하는 마법진이었기에 그 복잡 미묘함은 여타의 통신 마법진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크로네티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주문을 외워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흑마법사라면 이런 식으로까지 복잡한 마법진을 사용할 엄두도 못 내겠지만, 그는 이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곧이어 마법진 위로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존재가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도니티에여,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마계의 다섯 대마왕들 중의 하나인 도니티에는 마법진에 모습을 드러낸 후 약간 의외라는 듯 토지에르를 잠시 바라봤다. 비쩍 말라비틀어진 리치가 자신과 대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리치하면 흑마법사가 영생을 추구하기 위해서 변신하는 궁극의 형태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미 누군가와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으면 흑마법 자체를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이자는 또 다른 마왕과 계약하자고 불러낸 것이다. 그전의 계약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담보로 잡았는데, 이번에는 무슨 조건을 걸고 계약을 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한 도니티에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껄끄러운 목소리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불렀는가? 세상을 파멸시킬 힘을 원하는가? 하지만, 그대는 이미 누군가와 계약을 맺었을 텐데…….”

말을 멈춘 도니티에는 토지에르를 잠시 노려보더니, 이윽고 김빠진 듯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젠장! 오랜만의 먹음직한 먹이인 줄 알았더니, 크로네티오 자네였군. 자네가 어수룩한 호비트 한 마리를 꼬드겨 저쪽 세계에서 재미보고 있다는 보고는 부하로부터 들었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다.”

“뭐? 부탁이라고? 그렇게도 자존심이 강한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그렇게나 다급한 일인가? 자네는 절대로 부탁 따위는 해 본 적이 없었지 않나.”

“물론이지. 하지만…….”

크로네티오는 이를 뿌드득 갈며 증오에 찬 듯 외쳤다.

“예전에 내 즐거움을 방해했던 그 가증스러운 놈을 찾아냈어. 호비트 세계의 정복이고 새로운 마계의 건설이고 뭐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그놈만은 용서할 수가 없어. 도와줄 거지?”

“누군데 그러나? 겨우 호비트 따위가 자네의 속을 뒤집어 놨을 리는 없을 테고……. 참, 예전의 즐거움이라고? 호비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면 설마?”

“맞아, 드래곤이야. 마법을 아주 잘 쓰는 황금색 도마뱀 새끼지.”

“드래곤이 상대라…….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까지 도움을 청하게 된 것이군. 사실 그쪽 세상에 가면 드래곤 때문에 아주 힘들긴 하지. 마계의 힘을 그대로 가져간다면 한 방에 통구이를 만들어 버릴 수 있겠지만 말일세. 하지만 그쪽 세계는 태곳적부터 형성된 중간 지대가 아닌가? 신도, 마왕도, 정령도 다스릴 수 없는…….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자가 드래곤이지. 그렇기에 오락을 제대로 즐기려면 드래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도니티에는 잠시 크로네티오를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잘 안다면서 자네는 드래곤을 건드렸어. 그 때문에 강제 소환당한 것이고 말이야.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뭘 그걸 가지고 열을 내고 그러나? 나는 자네가 부러워. 마계의 틀에 박힌 따분한 생활에서 벗어나 도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 자극인가? 이제 더 이상 적이 없는 마계에서 벗어나, 추구할 만한 목표와 적이 있는 새로운 세상이 자네에게 주어져 있다네.

쓸데없는 과거의 자그마한 원한을 가지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착실하게 새로운 마계 건설에나 신경 쓰는 것이 좋지 않겠나? 드래곤은 그곳을 완전히 정복해서 힘을 충분히 갖춘 후에 간단히 제압할 수 있지 않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 망할 자식이 얼마 전에 찾아와서는 나를 깔보는 듯 유들유들한 어조로 재미 많이 보라고 하더군. 그때는 그런가 보다하고 넘겼지만, 생각할수록 열불이 치밀어 올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어떻게 드래곤 따위가 감히 나를 깔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능청스러운 낯짝을 찢어발길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모두 다 포기해도 좋아. 그 빌어먹을 자식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마계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나?”

“그러니까 해묵은 감정이 더해진 자존심의 문제로군.”

잠시 궁리를 하던 도니티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자네도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도니티에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내뱉었다.

“미쳤군.”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게나.”

“휴우∼ 자네의 마음이 이미 확고하다면 내가 뭐라고 말려도 통할 단계는 아니겠지?”

“그 말대로일세. 나는 지금 힘을 원한다네. 드래곤 따위가 더 이상 나를 깔보지 못할 정도의 힘을 말이야. 그리고 그 자식의 머리통을 잘라서 내 의자를 장식할 거야. 그렇게 해서 두고두고 나를 깔본 놈은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삼을 거라구.”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대법을 실행한 후에 혹시라도 이계에서 죽임을 당한다면 이건 강제 소환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어쩌면 그 충격으로 본체마저도 소멸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잃는 것에 비해서 얻는 것은 너무나도 작다는 말일세.”

도니티에의 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크로네티오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생각할 것은 없어. 나는 그놈의 목을 원해.”

“좋아, 어쩔 수 없지. 자네의 부탁인데, 도와주기로 하겠네. 어쩌면 시라에뉴라면 자네를 도와줄지도 몰라. 하지만 비슈누나 바크로니아는 힘들 텐데? 그들은 어떻게 설득할 텐가?”

“우선 자네와 시라에뉴부터 끌어들인 다음에 천천히 궁리해 보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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