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지금 아주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다. 태산같이 쌓인 서류를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 모두 다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서류를 검토해 보지도 않고 대충 서명해 버린다면 일은 순식간에 끝나겠지만, 그런 식으로 처리했다가는 나중에 아들놈에게 어떤 잔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일 하나라도 대충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도 노회한 드래곤이었다. 옆에서 아들놈이 지켜보고 있을 때나 열심히 하지,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머리가 터져라 일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아르티어스가 널찍한 집무실에 수십 명의 인원을 데려다 놓고 그들에게 열심히 일을 시키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책상에 다리를 얹어 놓고 가끔씩 포도주를 마시면서 그들이 일하는 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야, 거기. 너 말이야, 너.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안 해? 죽고 싶어?”
아르티어스가 으르렁거리며 그들의 능력을 쥐어짜 일을 시키고 있는 가운데, 검토를 거친 서류는 카르토 백작의 책상에 쌓였다. 카르토 백작은 그 서류들을 최종 단계까지 검토한 후 다시 아르티어스에게 넘기는 것이다. 그러면 아르티어스는 카르토 백작이 넘긴 서류를 거의 보지도 않고 ‘쓱쓱’ 서명하면서도 으르렁거렸다.
“이거, 서류가 올라오는 속도가 느린 것 같아. 다시 한 번 정신 교육을 실시한 후에 새 마음으로 산뜻하게 일을 시작할래?”
한쪽 눈두덩에 퍼런색 잉크를 뿌려 놓은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카르토 백작은 진저리를 치며 정신없이 대답했다. 처음 몇 번 올라간 서류를 면밀하게 검토한 아르티어스에게 계산이 틀렸다고 모두 다 집합당해서 정신이 아득해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을 때 생긴 멍이었다. 아르티어스는 어쩌다 하나씩 그런 식으로 검토를 했기에, 모두들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어르신.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믿어 주십시오.”
“그럼 빨리 가 봐. 일거리가 쌓이고 있잖아.”
“옛!”
씩씩하게 대답하고 자신의 책상을 향해 뛰어가는 카르토 백작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중얼거렸다.
“역시, 호비트는 쥐어짜면 짤수록 더욱 열심히 일하거든. 머리 나쁜 드워프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다니까.”
이런 식으로 열심히 호비트들을 쥐어짠 덕분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저녁 식사 전까지 모든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돌아오는 다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헤, 사랑하는 아들아. 일은 다 끝내 놨다. 그리고 근사한 식사까지 준비해 뒀어. 자, 식사하러 가자, 응?”
“예, 아빠. 정말 고마워요.”
아르티어스는 다크가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고 하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으헤헤헤,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모두 다 아빠한테 부탁해. 뭐든지 다 해 줄 테니까 말이다.”
“지금도 충분히 저한테 잘해 주고 계신데요, 뭘.”
잠시 대화를 주고받던 아르티어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크에게 물었다.
“참, 그런데 너하고 같이 있던 그 떨거지들은 왜 안 보이냐?”
떨거지라는 말에 다크의 눈이 순간적으로 실쭉 가늘어졌다.
“떨거지라뇨? 그들은 제 친구들이라구요.”
“그래, 그 녀석들 말이야.”
“몸이 근질거린다며 제발 전쟁터로 보내 달라고 사정하기에 소원대로 보내 줬죠. 아마 지금쯤 아르곤 전선에 도착했을걸요?”
어제저녁에는 다크가 미카엘을 데리고 밤에 뭔가 하고 있었기에 아르티어스는 그들을 교육시킬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밤을 벼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미리 알고 튀어 버린 것이다.
“그래? 이놈의 자식들이 도망쳤단 말이지.”
아르티어스가 다시는 도망칠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반쯤 죽여 놓겠다고 훗날을 기약하며 다짐하고 있을 때, 다크가 의도적으로 되물었다.
“도망쳐요?”
“아, 아냐. 헤헤헤, 늙으면 한 번씩 헛소리가 튀어 나온다니까…….”
“그건 그렇고, 저 몰래 엘프리안을 파괴했다면서요?”
뭔가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마냥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아르티어스였지만, 노회한 그답게 재빨리 정색을 하며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누, 누가 그딴 헛소리를 하더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걸리기만 해 봐라. 헛소리를 해 대는 그놈의 주둥아리를 그냥…….”
아르티어스가 짐짓 울분 어린 어조로 말했지만, 다크는 속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말했는지는 아실 필요 없어요. 이미 소문이 쫙 퍼졌는데,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았어요? 다시는 저 모르게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예?”
의외로 아들이 화를 내지 않는 데 대해 안도한 아르티어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그래, 헤헤헤.”
“분명히 약속했어요?”
“그래, 알겠다. 내 약속할게.”
“그리고 그 약속에는 제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 거예요.”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쩝, 내 스트레스 해소용인데. 에이, 좋아. 약속하지.”
하지만 풀이 죽은 것도 잠시, 아르티어스는 다시금 활기찬 어조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내일은 뭐 할 거냐? 같이 놀러가자. 오늘은 나 열심히 일했잖아.”
“내일은 크루마에 가 볼까 해요.”
“크루마에는 왜?”
“몰라서 물어요? 수도를 박살 낸 아빠의 처사는 너무 심했다구요. 그런 만큼 가서 사과라도 해야죠.”
다크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천장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물론 속으로는 그따위 호비트 도시 하나 박살 낸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러는지 의아해하면서 말이다.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오랜만에 단 둘이서 오붓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카르토 백작은 멍든 눈에 열심히 계란을 굴리며, 왜 오늘 아침에 다크의 말을 듣지 않았는지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어차피 아르티어스에게 줘 터져가며 자신이 다 처리할 일이었는데, 차라리 그때 자신이 하겠다고 했으면 진급이라도 했을 것 아닌가? 카르토 백작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가에 문지르고 있던 계란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가 왜…….”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
와리스 후작은 그 비대한 얼굴에 가려진 자그마한 눈망울을 열심히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뭔가 이상하군. 정말 이상해…….’
와리스 후작은 아직까지 미네르바의 실각과 같은 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대략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파괴한 사람이 치레아 대공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사실은 치레아 대공이 직접 루빈스키 대공에게 말한 것으로서, 정보부에서 알아낸 사실이 아니었다. 그만큼 크라레스의 모든 정보력은 현재 알카사스와 아르곤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프루니아의 여름 궁전 아니, 크루마의 임시 황궁에 도착한 후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품었던 의문은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똑똑.
짧게 노크를 한 뒤 문이 활짝 열리며 근엄하게 생긴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와리스 후작에게 자신을 정중하게 소개했다.
“나는 라이언 반도로스 후작이라고 하오.”
외교 담당관은 예전부터 가레신 후작이었기에 와리스 후작은 의문을 느꼈다. 어디로 간 것인가? 아니면…….
“가레신 후작은 어디에……?”
“아, 그분은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귀하를 접대하실 수 없소. 그래, 본국을 방문한 용건은 무엇이오?”
성급하게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상대를 보며, 와리스 후작은 속으로 비웃었다. 상대는 아직 외교적 화술의 기본조차 모르고 있는 애송이인 것이다.
“예, 우선 귀국의 수도 엘프리안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본국의 폐하께서 귀국의 폐하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셨소.”
자국의 수도가 가루가 난 것에 대해 상대가 화제로 올리자, 그 진의를 알 수 없었던 반도로스 후작은 조금은 언짢은 어조로 대답했다.
“예, 귀국의 폐하께 하찮은 타국의 일에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감읍할 따름이라고 전해 주시오.”
타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와리스 후작은 일부러 과장되게 감정을 표현하며 떠들어 댔다.
“타국이라니요, 이거 섭섭하군요. 귀국과 본국은 제1차 제국 전쟁 때 코린트를 물리친 혈맹이 아니었소이까? 요 근래 한동안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과거의 친분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대 제국 코린트와 싸우기 위해 서로의 국력을 합쳐 총력전을 벌였던 혈맹들이었는데 말이오.”
‘과거의 친분 따위가 중요할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반도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상대의 말은 도덕적 관점에서 봤을 때 충분히 납득이 갈 만큼 논리 정연했기 때문이다.
“그거야 그렇지요.”
상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긍하자, 와리스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이 의도하는 페이스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모든 것을 보면 귀국과 본국은 작은 일 따위로 사이가 벌어질 관계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 폐하의 생각이십니다. 사실 제2차 제국 전쟁에서 본국이 위태로울 때, 귀국이 갑자기 미란을 침공하여 합병하였잖습니까?”
그건 사실이었기에 반도로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와리스 후작은 꼭 상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곧장 말을 이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역시 동맹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이오. 크루마가 동맹국인 크라레스가 잠시 어려워지자 크라레스의 동맹국인 미란을 일거에 점령해 버렸다고 말이오.”
제2차 제국 전쟁 때의 치부를 드러내자 반도로스 후작의 안색은 약간 벌게졌다. 그런 그를 보며 와리스 후작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금 상대의 심리를 완전히 읽고 있는 상태였다. 원래 외교관이란 상대가 속마음을 읽을 수 없도록 자신의 표정을 절대로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저 애송이는 너무나 쉽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허허, 하지만 내 말을 오해하지 마시오. 본국이 설마 그런 속 좁은 무리와 같이 동맹국인 귀국이 우리가 어려운 틈을 타 미란을 진정으로 점령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실 우리같이 생각이 짧은 자들은 귀국의 행동을 오해했었소. 하지만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귀국을 굳게 믿으셨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만약 귀국이 미란을 삼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냐고 저희들에게 말씀하시며 믿음이 부족했던 저희들을 깨우쳐 주셨소.
사실 크루마가 그 당시 미란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코린트는 본국을 정리한 후, 곧장 군세를 돌려 공개적인 본국의 동맹국인 미란을 침공했을 것이오. 그것을 잘 알고 계신 귀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크라레스의 동맹국인 미란이 야욕에 찬 코린트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것이지요. 본국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크루마가 악역을 담당하신 것이라고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상당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 그렇지요. 귀국이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너무나 감사한 일이외다.”
와리스 후작은 대화가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잘 흘러가자 상대방에게 회심의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본국 사정도 어느 정도 호전되었고, 코린트와의 관계도 그런대로 정상화되었소. 그러니 더 이상 귀국이 악역을 감당하실 이유가 없어졌다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셨소.”
갑자기 화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반도로스 후작은 기겁했다.
“뭐, 뭐라고요?”
“그러니까 코린트가 미란을 집어삼킬 염려가 없어진 만큼 미란을 풀어 줘도 된다는 말이외다. 또한 수도 엘프리안이 파괴된 터라 귀국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테고 말입니다.”
여태껏 자신이 상대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반도로스 후작은 안색을 굳혔다. 사실 와리스 후작의 논리대로라면 크루마는 미란을 토해 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약속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 아닌가? 반도로스 후작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소. 이 사안은 아무래도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 것 같으니 윗분들에게 보고를 해야겠소.”
와리스 후작에게 양해를 구한 반도로스 후작은 회의장을 나와 곧장 원로원 의장 대리인 어스무스 그랜딜 공작의 집무실로 갔다.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는 그린레이크 공작을 대신해서 그가 임시로 원로원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왔다고 하던가?”
“미란을 되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전하”
반도로스 후작의 말에 깜작 놀란 그랜딜 공작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미, 미란을 말이냐?”
“예, 전하.”
반도로스 후작은 굳은 안색으로 차분히 와리스 후작과의 회담 내용을 그대로 전한 뒤,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전하. 저로서는 도저히 역부족이옵니다.”
“그렇게 대단한 자인가?”
“말솜씨가 대단한 인물이옵니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있어도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은 그놈이 의도한 방향으로 화제가 진행되는…….”
“에잇, 이런 멍청한! 하긴 처음부터 경에게 능숙한 외교관으로서의 역량을 기대한 내가 잘못인지도 모르지.”
한심스럽다는 듯 반도로스 후작을 쳐다보던 그랜딜 공작은 펜을 들어 뭔가를 종이에다가 쓴 다음, 경비병에게 건네주며 지시했다.
“너는 지하 감옥에 가서 가레신 후작을 인계받아 오너라.”
“옛, 전하.”
경비병이 명을 받고 나가자, 그랜딜 공작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한동안은 가레신 후작을 따라다니며 그의 옆에서 일을 배워라. 그는 미네르바의 측근이지만 외교관으로서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인물인 만큼 배울 것이 많을 것이다.”
“옛, 전하.”
그랜딜 공작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끝냈다.
“어느 정도 경이 일을 배우면 그때 그놈을 처형하기로 하지.”
현재 미네르바의 측근에 있던 모든 인물들은 투옥된 상태였다. 미네르바를 숙청하는데 그 측근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취해진 조치였다. 그리고 사실상 그 측근들이 군의 요직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네르바를 제거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