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리스 후작은 반도로스 후작과 함께 가레신 후작이 회담장에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또다시 머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여야 할 자신의 천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호, 가레신 후작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가레신 후작은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오랜만입니다.”
“옆에 계신 분은 영 얘기가 안 통하더군요. 역시 가레신 후작님 정도는 되어야 서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또 밀고 당기는 재미도 있고…….”
“껄껄껄, 과찬의 말씀이오.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반도로스 후작에게 접대를 맡겼더니, 귀하의 기대에 못 미쳤나 보오.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건 그렇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저야 비축해 둔 지방질이 너무 많다 보니 가끔은 단식도 하곤 하지만, 후작님이 그러신다면 며칠도 안 돼 신관에게 신세를 져야 할 가능성이 클 텐데요?”
“하하! 무슨 말씀을……. 저는 필요한 영양분을 뼛속에 저장해 두는 체질이라고 신관이 말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지방질을 늘릴 필요가 없죠. 또 이 나이쯤 되면 비만에 의한 고혈압도 두렵고 말입니다.”
반도로스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랜딜 공작은 옆에서 보고 들으며 가레신 후작의 외교술을 배우라고 했지만, 도대체 뭘 배운단 말인가? 서로 간에 쓸데없는 잡담만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들에게서 말이다.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은 놀라울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반도로스 후작에게는 잡담으로밖에 안 들렸겠지만, 그들은 서로 간에 나름대로 치열하게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또 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그런 모든 것에 대한 정보의 꼬투리를 잡기 위한 머리싸움이었던 것이다.
반도로스 후작은 밀려오는 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계속 그들의 잡담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근사한 대화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잠시 끄덕끄덕 졸다가 일어났을 때도 그들은 계속 잡담으로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반도로스 후작은 외교라는 것이 자신의 마누라가 친구들과 쓸데없는 화제로 수다 떠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의 마누라를 외교관으로 임명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들의 잡담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가 대화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만나 잡담을 나누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글쎄요, 본국의 황제 폐하께서 어떤 생각으로 미란을 흡수했는지는 저희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폐하께 여쭈어 보려고 해도 지금 잠시 여행을 떠나 계신 터라 좀 곤란하군요.”
가레신 후작의 말에 와리스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바로 이때가 적기라고 생각하고는 쐐기를 박기 시작한 것이다.
“허허허, 저희 치레아 대공께서 엘프리안을 방문하신 후 모든 것이 오해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폐하께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동안 귀국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역시 서로 간에 대화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절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두꺼운 철판과 같이 표정의 변화가 없던 가레신 후작의 얼굴에 동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화는 무슨 얼어 죽을 대화, 복날 개 패듯이 팬 것이 대화인가? 그리고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든 것이 대화라는 말인가? 가레신 후작이 분노를 삭이고 있을 때, 그의 표정을 보며 와리스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양국 간에 오해의 여지가 남아 있다면 치레아 대공 전하를 다시 이곳에 오시도록 제가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그편이 훨씬 시간도 절약될 테니 서로 간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와리스 후작의 위협은 명확한 것이었다. 까불면 또다시 그녀를 보내서 크루마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가레신 후작은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잠깐만, 그렇게 바쁘신 분을 또 다시 이 누추한 곳까지 방문하시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이제 완전히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한 와리스 후작은 비대한 몸집을 출렁거리며 능글맞게 말했다.
“어허∼ 그래도 서로 간에 몇 날 며칠 동안 말싸움하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좋지 않겠소? 그분이 오시면 금방 오해도 풀릴 것이고 말이외다.”
“이 사안은 치레아 대공께서 오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왜냐하면 미란의 독립은 본인이 약속할 만한 범주를 벗어나 있소. 본인의 생각에도 귀국과의 오랜 친분을 생각해서 미란을 지금 당장이라도 독립시켜야 함이 옳다고 생각하오. 처음에는 야욕에 찬 코린트에게 미란의 국민들이 불의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본국이 먼저 군대를 투입하였소. 나중에 귀국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었을 때, 그때 그들을 독립시켜 주면 되니까 말이오. 하지만 그동안 사정이 많이 바뀌었소.”
“어떻게 말입니까?”
와리스 후작이 뚱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가레신 후작은 정색을 하며 차분히 설명했다.
“이제는 미란의 국민들이 크루마의 우수한 정치적 지도력을 신뢰하여 우리에게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이오. 그리고 일부 국민들은 그전의 나약했던 미란의 왕들보다는 크루마의 황제 폐하를 더욱 존경하며 따르고 있소. 일부 귀족들의 경우에는 아예 황제 폐하께 충성을 서약하며 신께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는 형국이오. 이렇다 보니 그들을 억지로 내몰다가는 미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소. 미란이 본국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독립시킬 궁리를 한단 말이오? 허∼참, 난감하군.”
와리스 후작이 미란 국민들을 상대로 여론 조사를 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가레신 후작의 뻔뻔스러운 대답이었다. 바로 이때 밖에서 경비하고 있던 병사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뭣이?”
은근슬쩍 넘어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한참 말을 하고 있던 가레신 후작은 기겁을 한 듯 튕기듯 일어섰다. 그런 다음 곧장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렸다. 잠시 후 경비병이 열어 준 문으로 들어서는 다크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가레신 후작은 와리스 후작을 째려보며 나직하지만, 잔뜩 힘을 준 어조로 물었다.
“귀하가 치레아 대공을 부른 것이오?”
와리스 후작은 천천히 일어서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절대로 모르는 일이요. 나는 어제 크루마에 가서 미란 건에 대해서 협상하라는 루빈스키 전하의 지시를 받았을 뿐이요.”
슬그머니 발뺌을 하는 와리스 후작의 유들유들한 표정을 보며 가레신 후작은 더욱 화가 뻗쳤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다크의 뒤를 따라서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는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는 순간 창백하게 바뀌었다. 엘프리안을 가루로 만든 그 드래곤의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와리스 후작은 재빨리 일어서서 다가오는 다크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가레신 후작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어찌 되었건 상대의 신분으로 봤을 때, 정중히 예의를 갖춰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 자네가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리로 왔지. 협상은 어떻게 되었나?”
“저… 그게…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직 진전이…….”
“그래? 하기야 저런 잔챙이를 상대로 밀고 당기고 해 봐야 결과를 빨리 얻어 내기는 힘들겠지.”
그 말에 ‘잔챙이’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다크는 가레신 후작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에 한 번 본 얼굴인 것 같군. 그래, 미네르바는 잘 있나?”
다크의 물음에 가레신 후작은 약간 비꼬아 대답했다. 하지만 말투는 아주 정중한 것이었다.
“미네르바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 덕분에 자알∼ 계십니다.”
다크 덕분에 미네르바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다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잘 있다니 다행이군. 미네르바를 불러와라. 내가 직접 협상할 테니까 말이야.”
“예? 하, 하지만…….”
“왜? 무슨 문제가 있나?”
계속되는 다크의 질문에 가레신 후작은 진땀을 흘리며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크루마의 내부 사정이 외부에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게…, 전하께서는 지금 이곳에 안 계십니다. 전방을 순시하러 가셨기에….”
“그래? 그러면 기다리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진을 이용하면 금방 올 수 있을 것 아닌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불러와.”
“아, 예.”
가레신 후작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자신을 그 망할 협상 장소로 보낸 그랜딜 공작에게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는 그가 크루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뭐야, 벌써 협상이 끝났나?”
“그게 아니옵니다, 전하.”
그랜딜 공작은 또 뭐가 문제이냐는 듯 짜증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럼, 뭔가?”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이 왔사옵니다.”
“그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다크가 지닌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고 있었던 그랜딜 공작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단 상대국의 공작이 왔으니 이것을 계기로 자신이 공식적으로 외부로 등장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음, 하기야 상대국에서 공작이 왔는데, 자네를 보내어 영접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는 하지.”
“그분께서는 켄타로아 전하와 직접 협상하시기를 원하고 계시옵니다.”
“뭐? 크하하하! 미네르바를? 그녀가 투옥된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정보력이 형편없다니, 크라레스는 소문으로 듣던 것만큼 그렇게 굉장한 나라는 아닌 모양이군.”
“그, 그게 아니옵니다, 전하.”
가레신 후작이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지만, 그랜딜 공작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옆에 서 있는 엘프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봐.”
후작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새하얀 피부의 아름다운 엘프 청년이 즉각 대답했다.
“옛, 전하.”
“국무대신한테 그녀를… 아니야, 지금은 별로 할 일도 없으니 내가 직접 만나 볼까? 소문대로 그렇게 미인인지 한번 보고 싶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호비트가 아름다워도 우리들 엘프만 하겠나?”
호기롭게 말한 그랜딜 공작은 반도로스 후작을 향해 지시했다.
“안내하게. 내가 협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가르쳐 주지.”
“옛, 전하.”
당당하게 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레신 후작은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참, 크루마 황실의 미래가 걱정되는군.”
“어스무스 엘 그랜딜 공작 전하께서 드시옵니다.”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아르티어스가 과자를 씹어 먹다가 중얼거렸다.
“그랜딜이 누구냐?”
“글쎄요. 미네르바는 전방 순시 갔다고 하잖아요. 아마 미네르바가 곧장 오지 못하니까 대신 접대하기 위해 나오는 녀석이 아닐까요?”
“그런가? 어? 그러고 보니 엘프네.”
아르티어스는 포도주를 한 잔 더 따르면서, 실내에 들어선 후 자신들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그랜딜 공작에게 말했다.
“이봐, 과자 좀 더 가져와. 쩝쩝, 이거 맛이 괜찮군. 제법이야.”
자신의 상관을 마치 시종을 대하듯 편하게 말하는 금발 청년의 태도에 반도로스 후작이 화가 잔뜩 난 어조로 질책했다.
“무례하다.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이번에는 다크가 빙글빙글 미소 지으며 장난 삼아 대답했다.
“누군데?”
“대 크루마 제국의 의회 의장이시자, 원로원 의장 대리이시며, 총사령관 대리를 겸임하고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린레이크 공작 전하와 함께 본국에 단 두 분밖에 안 계시는 7사이클급 마법을 마스터하신 마법사협회의 부의장이시기도 하다. 지금 당장 무례를 사죄하지 않는다면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아빠, 뜨거운 맛을 보여 준다는데요?”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 듯 어이없어 하다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말했다.
“허어∼참, 너 이리 와 봐.”
아르티어스는 멍청한 부하는 무시하고, 그 옆에서 이미 눈치를 챘는지 벌벌 떨고 있는 그랜딜 공작을 향해 험상궂게 인상을 긁었다. 그의 표정을 본 그랜딜 공작은 생명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휘청휘청 아르티어스에게 다가갔다. 아르티어스는 상대의 면상을 손바닥으로 힘껏 후려 친 후 투덜거렸다.
“도대체가 쫄다구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빨리 이리 튀어와!”
뒤로 나자빠졌던 그랜딜 공작은 후다닥 일어선 후 신음성을 터뜨릴 여유도 없이 재빨리 아르티어스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 상관의 모습을 보며 반도로스 후작의 얼굴은 천천히 핏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감히 위대한 일족을 몰라 뵈었습니다. 하찮은 호비트가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니 제발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옆에서 빙글거리며 가만히 보고 있던 다크가 이죽거렸다.
“어? 나도 호비트인데…….”
아르티어스는 힐끗 다크의 눈치를 본 후 더욱 화가 난 어조로 외쳤다. 상대가 다크를 향해 한 말이 아님을 알긴 하지만, 아들이 그걸 탓하는데 자신이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크가 얼마나 귀여운 자식인데…….
“이 짜식이, 그럼 내 아들이 하찮고 어리석다는 말이냐?”
아르티어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자, 그랜딜 공작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고위급 마법을 수련한 만큼 민감한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던 그는 지금 아르티어스가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존재감만으로도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그의 머릿속은 두려움에 질려 하얗게 텅 비어 있었다. 그 오랜 삶을 거치며 배운 수많은 지식도, 연륜도, 경험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완전히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저, 절대로 오해이십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저, 저는 제 부하를 두고 생각 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멍청한 자식,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미네르바를 데려와. 내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잖아. 기다리기 지루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알겠어?”
“예, 옛!”
후다닥 문을 박차며 달려가는 그랜딜 공작의 뒤통수에 대고 아르티어스가 외쳤다.
“이봐, 과자도 좀 더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