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4화 (360/930)

곧장 감옥으로 달려간 그랜딜 공작은 다짜고짜 미네르바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왜 드래곤이 치레아 대공하고 함께 다니는 것이오?”

하얗게 질린 상대의 얼굴에 미네르바는 고소하다는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미네르바는 자신의 예상보다 그녀의 방문이 훨씬 빠르다는 것에 일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후후, 그녀가 온 모양이군.”

“당신은 뭔가 알고 있소?”

“물론, 드래곤은 그녀의 양아버지야. 그리고 그녀를 대단히 사랑하고 있지.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의 관례를 깨고 엘프리안을 날려 버렸으니까.”

미네르바의 대답에 그랜딜 공작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엘프리안을 파괴한 드래곤이 바로 그, 그 드래곤이었소?”

“호오, 몰랐던 모양이군. 하기야, 그녀와 그 드래곤에 대한 접대는 여태껏 내가 직접 했으니 몰랐을 수도 있겠지. 그래, 접대를 한번 해 보니까 총사령관직이 해 볼 만하던가?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생명의 위협 정도가 아니라 크루마가 박살 날 수도 있으니 기분이 짜릿짜릿하지? 어떤 면에서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크루마의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에 함께 따라다니는 청량제라고나 할까. 자극이 조금 지나쳐서 그렇지, 계속 그들을 상대하다 보면 꽤 재미있을 거야.”

“그, 그렇다면 당신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그 드래곤과 자주 만났단 말이오?”

미네르바는 창백한 안색의 그랜딜 공작을 바라보며 그가 지금 엄청난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랜딜 공작 정도로서는 도저히 크루마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드래곤? 흥. 드래곤뿐이라면 내가 말도 안하지. 드래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대하기 쉬운 족속이야. 그들은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 주면 조용하지만, 치레아 대공은 얘기가 달라. 한때 세계 최강이라고 불렸던 키에리 발렌시아드를 박살 냈을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거든.

키에리의 행동이야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지. 그는 언제나 국가를 제일로 생각했으니까 거기에 맞춰서 추리하면 금방 속마음을 알 수 있었거든.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가 뭘 원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지. 그녀는 국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니까 말이야. 거기에다가 비위를 거스르면 엘프리안 정도가 아니라 크루마도 하루아침에 박살 내 버릴 정도로 성격까지 지랄 같지.”

“헉! 말도 안 돼! 어떻게 호비트 따위가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 막강한 코린트의 전권을 잡았던 키에리라도 본국을 하루아침에 박살 낸다는 호언장담을 하지 못했어.”

“웃기고 있네. 물론 그녀 혼자서 크루마를 멸망시킬 수는 없겠지. 하지만 방금 자네가 봤던 그 드래곤이 누구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보나? 그녀의 말 한마디면 망설이지 않고 크루마를 하루아침에 가루로 만들걸.”

“그, 그럴 리가…….”

“잘해 보게. 그녀의 비위 맞추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미네르바의 말에 그랜딜 공작의 두뇌는 맹렬히 회전했다. 이제는 대화를 종료하고 싶다는 듯한 상대의 말.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협상을 원하는 듯한 말이 아닌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협상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드래곤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족속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그대는 그녀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이오?”

미네르바는 필사적인 상대의 태도에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고 느낀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주 여유 만만했다.

“꼭 다룰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은 없어. 그녀를 다루는 데 실수 한 번 했다가 엘프리안이 날아갔으니까 말이야. 물론 그런 커다란 대가를 지불한 만큼 나는 그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지. 그런 만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는 어떨까? 자네도 나처럼 실수를 되풀이하며 정보를 쌓을 텐가? 아마 아차하다가는 도시 하나 둘 정도는 잃을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공갈이 조금 섞인 미네르바의 말을 듣던 그랜딜 공작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안 그래도 무시무시했던 아르티어스의 눈초리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었던 그랜딜 공작으로서는 미네르바의 말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때서야 미네르바가 자신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사실 아르티어스의 그 지독한 존재감에 억눌려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건넸던 그랜딜 공작으로서는 미네르바라는 존재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핑계였던 것이다. 엘프인 그에게 다크라는 호비트의 능력은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호비트보다 훨씬 더 민감한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는 엘프인 그로서는 에인션트급에 가까운 그 엄청난 드래곤의 존재감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왔었다. 어차피 자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드래곤이었고, 또 상대하지 않고 무시했다가는 이곳 크루마의 임시 황궁마저 파괴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네르바의 말은 드래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매혹적인 제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드래곤이 무섭다고 하자니, 영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랜딜 공작은 상대가 두려워하는 다크로 말을 돌렸다.

“그 호비트가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오?”

미네르바는 자신의 위협이 제대로 먹힌 것으로 생각하고 미소 지었다. 다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데……. 빌어먹을 년.

“당연하지.”

“그렇다면 그대가 크루마를 구해 주시오. 또다시 수도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글쎄…, 하지만 나한테는 그만한 실권이 없다는 것을 경도 잘 알 텐데? 나는 이미 크루마의 총사령관이 아니라 한낱 초라한 죄수일 뿐이야.”

미네르바의 빈정거림에 그랜딜 공작은 황급히 대답했다. 사실 이번 건만 처리해 준다면 무슨 약속인들 못 하겠는가? 이 일만 무사히 끝난다면 확실하게 미네르바를 단두대에 올려놓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 그랜딜 공작이었다.

“그건 염려 마시오. 드래곤만…, 아니 그녀만 처리해 주시오. 이 일에 크루마의 장래가 달려 있지 않소?”

상대의 얄팍한 술수에 놀아나기에 미네르바는 너무 똑똑했다. 그리고 사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무슨 권한으로 협상을 한단 말인가?

“쯧쯧, 한낱 죄수의 신분인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녀와 협상을 한다는 말인가?”

정곡을 찌르는 미네르바의 지적에 그랜딜 공작은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렇지. 그럼 내 지금 당장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리겠소.”

그랜딜 공작의 말에 미네르바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황태자 전하라니, 그건 무슨 말이요? 이건 황제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아니요?”

어이없다는 미네르바의 질문에 그랜딜 공작은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아아, 말이 잠시 헛나왔군. 내 황제 폐하께 즉시 아뢰겠소. 그럼…….”

서둘러서 감옥을 나서는 그랜딜 공작의 뒷모습을 보며, 미네르바는 절망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폐하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본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직 젊은 황태자 전하의 주위에 저런 녀석들만 있다면…….”

큰소리는 쳐 놨지만, 아무래도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미네르바로서는 다크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기는 힘들었다.

“여∼ 오랜만이군.”

슬금슬금 다가오는 미네르바를 보고 다크가 방긋이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자, 미네르바는 상대의 그 귀여운 모습에 오히려 오한이 드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그렇지?”

미네르바는 재빨리 시선을 옆으로 돌려 감탄사를 연발하며 과자를 열심히 먹고 있는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위대하신 분이시여. 요즘 자주 뵙는군요.”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미네르바를 째려보며 말했다.

“젠장, 저 얼굴을 또 보게 되다니……. 쩝쩝, 확실히 호비트는 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족속이란 말이야. 그때 확실히 보냈어야 하는데.”

아르티어스의 말에 안색이 핼쑥해지는 미네르바를 보며, 다크가 질책하듯 말했다.

“아빠, 그만 좀 해. 얘가 무서워서 말도 못 하잖아.”

“아, 알았다.”

미네르바는 대 제국 크루마의 총사령관이었던 자신을 애송이 취급하는 다크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열불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얘가 무서워 말도 못 해? 내가 앤 줄 아냐? 이런 빌어먹을 년.’

하지만 노회한 미네르바는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누군가 분노는 두려움을 초월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분노의 힘 덕분인지 미네르바는 아르티어스라는 존재를 잊고 다크와 차분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지? 우리 서로 편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구.”

“아아, 전에 왔을 때, 깜빡 잊고 간 게 있어서 말이야. 미란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그걸 까먹었단 말이지. 너도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

상대의 말에 미네르바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 제안을 거절해 봐야 그 뒷감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제안은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하겠지만, 자신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좋아, 독립시켜 주겠어.”

화끈한 미네르바의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와리스 후작과 가레신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저렇게 빨리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협상이 전문인 그들로서도 이렇게 빠른 속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와리스 후작을 향해 다크가 외쳤다.

“이봐, 문서 가져왔겠지? 빨리 내놔.”

와리스 후작이 허둥지둥 문서를 꺼내 놓고, 서명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미네르바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 조건? 까불지 마.”

퉁명스런 다크의 대답에 미네르바는 약간 당황스런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들어 봐. 결코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야. 본국과 다시금 동맹을 맺는 것이 좋지 않겠어? 사실 그런 조건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미란을 돌려받는다고 해도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잖아.”

다크는 미네르바의 말에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럴지도 모르겠군. 다시 크루마를 동맹국으로 삼는다면 아마 루빈스키가 좋아할지도…….”

“그리고 미란을 포기하면 본국은 쟈코니아 평원과 단절되게 돼. 그런 만큼 미란과 본국의 동맹을 크라레스에서 주선해 줬으면 해. 3국이 단결하여 평화를 누리자는 말이지. 그편이 독립하게 되는 미란에게도 좋지 않겠어? 사실 지금 미란은 독립시켜 준다고 해도, 자국을 방어할 여력 따위는 하나도 없잖아.”

“뭐? 방어할 여력? 웃기고 있네. 만약 또 다시 미란에 손을 대면 내가 가만히 놔둘 줄 알아? 이번에는 아예 지도 상에서 크루마라는 이름 그 자체를 없애 주지.”

으르렁거리며 인상을 팍 쓰던 다크는 잠시 생각하다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좋아. 뭐, 그 정도 조건은 들어주지.”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다크가 말하자 미네르바는 속으로 열불이 치밀었지만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 얼굴을 봐서 그렇게 큰 양보를 해 줘서.”

다크는 와리스 후작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기에 대충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말했다.

“이봐 뚱땡이, 방금 미네르바가 말한 조건을 들었지? 서류를 다시 작성해.”

“옛, 대공 전하.”

미네르바는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다크에게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리고 잠깐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뭔데? 그럼 얘기해 봐.”

다크는 약간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곧장 기를 움직여 주위에 막을 쳤다. 뭔가 강력한 마나의 움직임을 느낀 미네르바는 놀라서 물었다.

“이게 뭐지? 뭐가 우리를 둘러싼 거지?”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다며? 우리 주위에 음파를 차단하는 막을 쳤을 뿐이야.”

‘헉! 무서운 년…….’

미네르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마나를 움직여 음을 차단하는 다크를 보며 아무래도 드래곤이 폴리모프(Polymorph)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나한테는 별로 힘이 없어. 만약 네가 떠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말이야.”

“엘프리안이 파괴되었기에 그런가?”

“응, 그래서 하는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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