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이 까미유와 함께 로체스터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 그곳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자신의 귀환을 축하하며 밤새도록 진탕 마셨던 제임스 형과 까미유 형, 그리고 옛날부터 왠지 대하기가 어려웠던 근엄한 표정의 로젠 형, 그리고 웬 미인 아가씨 한 명과 아버지. 그리고 해골바가지처럼 생긴 괴상한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 한 명.
미카엘은 우선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다른 형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를 이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해골바가지를 쓴 남자가 갑자기 쓱 다가서더니 미카엘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억?”
미카엘은 흠칫 놀랐지만, 상대는 미카엘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더니 감탄 어린 어조로 로체스터 공작에게 말했다.
“자네는 늘 입버릇처럼 아들이 순 망나니라고 하더니, 나를 속이고 있었군. 아주 수련을 잘한, 제대로 된 몸이야.”
상대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질책하는 듯 말했지만, 그 눈은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는 다시 미카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동안 집을 나갔다더니 어디에서 수련을 했느냐?”
“예? 그냥 이곳저곳…….”
“그럴 리가……. 네 몸은 마스터를 거의 코앞에 두고 있는 상태다. 내가 그렇게도 혹독하게 단련시킨 로젠과 거의 비슷하다는 말이지.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느냐?”
상대의 말에 미카엘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마스터가 될 수 있다니, 미카엘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뭔가 자신에게 괴상한 술법을 걸었을 때, 온몸에 힘이 넘쳐흐르지 않았던가? 미카엘은 하늘을 날 것 같은 환희에 젖어 다크에게 감사했다.
“…….”
그 말에 놀라서 로체스터 공작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도 처음 만났을 때, 얼핏 아들이 꽤 상당한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 발전해 있을 줄이야.
“저, 정말인가?”
해골바가지의 사내는 자신이 농담을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럼, 절대 내 눈은 틀리지 않아. 물론 로젠처럼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마스터도 그렇게 불가능하지 않을 거야.”
로체스터 공작의 눈은 어느 덧 물기에 젖어 들고 있었다. 키에리의 세 아들들이 모두 엄청난 검객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그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자신의 가문을 코린트 최고 아니, 대륙 최고라고 해도 좋을 가문으로 만든 키에리를 볼 때마다 얼마간은 질투가 담긴 눈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들놈이 집을 나갔을 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창피했기에 한심한 놈이라고 입버릇처럼 푸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 로체스터 공작이었다.
‘메를리나,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우리들의 아들 미카엘이 너무나 자랑스럽지 않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로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로체스터 공작에게 해골바가지 사내가 부러운 듯이 말했다.
“허∼참, 나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세 놈을 쥐 잡듯이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겨우 한 놈 건졌는데……. 정말 부러우이.”
로체스터 공작은 자신의 얼굴이 벌써 눈물에 젖어 있는 줄도 모르고,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요 근래 들어 가장 자신감에 차 있는 당당한 것이었다.
“크하하핫, 내가 저놈에게 가전(家傳)의 검술을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저런데, 가르치기만 한다면 마스터가 문제겠어? 아마 곧 자네도 능가할 거야. 허허, 내 자식이지만 너무나도 믿음직스럽지 않나?”
언제나 자신을 질책하던 기억밖에 없는 아버지로부터 믿음직스럽다는 칭찬까지 들은 미카엘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또한 계속 이어지는 자상한 어조에 그동안 쌓여 왔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한순간 훨훨 날아가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오, 미카엘. 너, 치레아 대공하고 아주 친하다면서?”
“예, 아버님.”
“음, 역시 잘되었다. 그렇다면 너는 곧장 제임스와 치레아 공국으로 가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헤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카엘의 기분은 더욱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아버지의 계속 이어진 말 한마디가 그의 기분을 순간 저 하늘 위에서 땅바닥으로 곧장 추락시켜 버렸다.
“가서 치레아 대공과 동맹을 맺고 오너라. 내 제임스에게 상세한 것은 다 일러 놨으니 너는 그를 조금만 도와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번 일은 사실 네가 아니면 시도할 엄두도 못 냈을 게다. 치레아 대공에게 사과하고 달래서 보낸 것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동맹을 청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잘 부탁한다.”
“예…….”
기대에 가득 찬 로체스터 공작의 시선을 받고, 미카엘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지만 마음은 별로 편하지 못했다. 헤어질 때 아르티어스의 그 흉폭했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한 번 작심한 것은 결단코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는 미카엘이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미카엘.”
미카엘은 아버지의 칭찬에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아버지에게 따뜻한 눈길을 받아 봤단 말인가. 이제 그 흉폭한 드래곤에게 맞아 죽더라도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버님.”
대답을 하면서도 미카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휴∼ 이번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할 수 없지. 갈 때까지 가 보는 거지 뭐. 그나저나 뇌물로 바치려면 무슨 포도주가 최고지? 젠장, 집 안에 있는 거 몽땅 다 털어서 가져가 보면 알겠지.’
미카엘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에서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호오, 이게 죽으려고 제 발로 기어 들어왔군.”
아르티어스는 팔시온과 미디아, 가스톤이 튀어 버린 후 무척이나 심심했었다. 사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호비트들은 벌벌 떨기만 했다. 그런데 이놈들은 정신이 나갔는지 간혹 가다 개기기도 했다. 물론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는 가소롭기만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팔시온 일행이 도망간 자리가 휑하니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미카엘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오늘 밤 아들 녀석 몰래 미카엘을 어떻게 괴롭히는 것이 좋을지 이것저것 상상하며 키득거리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이게 뭐야?”
즐거운 기분으로 밖으로 나선 아르티어스는 곧 미카엘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인상을 쓰기보다는 이상한 것을 본 듯 말했다. 미카엘의 뒤에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도주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힐끔거리다 다급히 대답했다.
“포도주입니다. 어르신 생각이 나서 저희 집 창고에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족히 마차 석 대는 동원해야 다 옮길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의 포도주 상자를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다음 슬그머니 다가가서 그것들 중의 한 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흠, 뇌물로 바치기에는 그렇게 좋은 포도주라고는 볼 수 없군. 그래서 질보다는 양으로 보충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가져온 거냐?”
로체스터 공작이 평상시에 마시는 것인 만큼 싸구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고급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카엘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포도주를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창고를 몽땅 털어 가져온 것입니다. 아마 찾아보시면 괜찮은 것도 있을 겁니다.”
“그래? 어디 보자. 하여간에 허접쓰레기만 있으면 알아서 해.”
아르티어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도주 상자를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있을 때, 아르티엔이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그 또한 포도주라면 질과 양을 따지지 않는 애주가였으니까 말이다.
“오호, 이게 다 포도주야? 요즘 들어 술 복이 터지는구나, 흐흐흐.”
아르티엔이 흐뭇한 웃음을 짓는 가운데, 아르티어스는 재빨리 포도주 상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최단 시간 내에 최상급 포도주를 찾아 꿍쳐 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전에 한번 본 것 같은 고풍스러운 병이 들어왔다.
“어엇!”
아르티어스의 놀란 듯한 신음성에 아르티엔이 괴이쩍다는 듯 의문을 던졌다.
“왜 그러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하마터면 맛도 못 보고 한 병을 깰 뻔했거든요. 헤헤헤.”
“별 싱거운 놈을 다 보겠군.”
아르티어스는 자신을 경악하게 했던 그 병을 몰래 집어 들었다. 틀림없었다. 밀봉까지 확실하게 된 것으로 보아 아직 한 번도 따지 않은 진품이었다.
‘단 세 병밖에 남지 않았다고? 웃기고 있네. 자기가 마실 것은 이렇게 꼬불쳐 놓고 말이야. 에그그, 빨리 숨겨야지. 저 노친네가 알아채기 전에 말이야.’
‘아그립파 1세’ 한 병을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공간 이동시킨 후, 또다시 열심히 뒤졌지만 더 이상 그것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시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미카엘은 슬그머니 다가가서 은근슬쩍 말했다.
“선물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르신?”
아르티엔 모르게 최고급 포도주 한 병을 꿍치는 데 성공한 아르티어스는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물론 마음에 들어. 확실히 교육 한 번 받더니 자네 눈치가 많이 늘었구먼. 그건 그렇고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야? 이거 가져다주려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야.”
“예, 다크를 좀 만나 보려구요.”
“다크? 집무실에 있을 거야. 이렇게 콩알만 한 국가라도 제대로 챙겨 나가려면 잡다한 일이 많거든.”
처음 봤을 때는 영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아르티어스가 미카엘의 말 몇 마디에 저렇게까지 호탕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제임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련은 뒷전이고 언제나 말썽만 부려 대던 그 철부지가 저렇게까지 듬직하게 성장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집구석에서 수련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넓은 세상에 나가서 수련을 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생각해 보는 제임스였다.
제임스와 함께 다크를 만나러 들어온 미카엘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듯 술자리에서 뻥을 좀 쳐 놨더니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이야. 과연 다크가 동맹을 맺어 줄지 영 자신이 없었다. 사실 아무리 친구 사이라고 해도 국가 간의 거래가 얽히면 서로 양보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미카엘이 열심히 눈치를 보는 가운데 양국의 정상은 회담을 시작했다.
제임스는 다크를 만나자 로체스터 공작에게 지시받은 대로 마왕의 강림과 현재 국제 정세를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그리고 가슴은 또 왜 이리 쿵쾅거리는 것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말은 자주 끊어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횡설수설에 가까운 대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다크는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요점은 시국도 어수선하니까 서로 간에 동맹을 맺자는 거 아니야?”
“예? 예, 전하.”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 가면서 하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말이야. 뭐, 좋아. 미카엘이 함께 왔는데 그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그래, 서류는 준비해 왔겠지?”
다크가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뒤쪽에 서 있던 미카엘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제임스도 미카엘의 얼굴을 봐 동맹을 맺어 준다는 다크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서류를 꺼내며 대답했다.
“예.”
서류를 쭉 훑어보던 다크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영구적인 동맹과 불가침 협정을 맺을 대상이 왜 치레아 공국이지? 이거 크라레스 제국을 치레아 공국으로 잘못 써 놓은 거 아냐?”
“아닙니다, 전하. 어쩌면 그 마왕의 강림과 크라레스 제국이 어떤 연관성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정보부의 분석이…….”
“헛소리하고 있네. 이건 내 발을 묶어 놓고 크라레스를 박살 내겠다는 음모가 깔린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크라레스를 본국으로 생각하시는 한, 결단코 그들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전하께서 그쪽을 적으로 생각하신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흠, 그래? 좋아, 그렇다면 그 문구도 집어넣어서 서류를 다시 만들어.”
“예.”
제임스가 화려한 필치로 다시금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가운데, 다크는 미카엘에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아빠 품이 좋긴 좋은 모양이지? 며칠 새 살이 피둥피둥 쪘는걸.”
그 말에 미카엘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서 외쳤다.
“뭐야, 새꺄. 겨우 며칠 사이에 무슨 군살이 붙었다고 헛소리야.”
“아냐, 아니야. 왠지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아.”
“하긴 너하고 그 누군가를 며칠 안 봤더니 입맛이 도는 게 살맛이 나더구먼.”
둘의 대화에 제임스가 기겁을 해서는 다급하게 미카엘에게 외쳤다.
“자네, 치레아 대공 전하께 그 무슨 무례한 언동이냐!”
제임스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소리치자 다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뭐 옛날부터 친했는데, 현재의 신분이 대수인가?”
“그럼그럼, 너 처음에 봤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었는데도 지금은 엄청 출세했잖아. 이것도 다 우리들이 자상하게 옆에서 보살펴 줬기 때문이 아니겠어? 하하핫.”
히히덕거리며 둘이 계속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제임스는 부럽기 그지없었다. 지고한 신분을 지닌 그녀에게 어떻게 저렇듯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말 한마디를 건네려고 해도 가슴이 울렁울렁, 말까지 더듬더듬 나오는데 말이다. 모든 회담이 성공적으로 성사된 후, 제임스는 정중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대공 전하의 호쾌한 결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라나라는 그 수녀님을 좀 만나 뵙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뭐, 상관없어. 내가 부하에게 지시해 놓을 테니까 만나고 가라구.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미카엘을 통해서 연락하게. 그는 앞으로도 영원한 나의 친구니까 말이야.”
“예,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미카엘이 지급받은 타이탄은 반납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치레아 기사단을 탈퇴할 때 타이탄을 반납했어야 하는데, 조치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럼 그것을 누구에게 말하면 되겠습니까?”
“카르토 백작에게 말해 놓을 테니, 그를 따라가면 될 거야.”
“예, 전하.”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서려는 제임스를 다크가 불러 세웠다.
“참, 잠깐만.”
“예? 왜 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니 본국에 박아 놓은 쥐새끼들 있지?”
다크의 말에 제임스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쥐새끼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실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난처한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다크는 매몰차게 말했다.
“없다고는 하지 마. 여태까지의 정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실해. 자네는 내가 그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저… 그게…….”
“그리고 그놈들 중에는 나하고 아주 가까운 놈도 하나 있을 거야. 나는 그놈이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조용히 데려가게. 이젠 더 이상 배신의 쓴맛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말이야.”
“예, 옛, 전하.”
당황한 듯한 제임스를 보며 다크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놈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어. 다만 부하 놈의 배신을 확인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만약 자네가 떠난 후에도 그 녀석이 남아 있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더불어서 그런 더러운 짓거리를 시킨 코린트까지도 말이야.”
“옛, 전하.”
“안녕하셨습니까, 수녀님.”
제임스가 다가오자 수녀는 조금 찔끔했지만, 그래도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예, 제임스 님께서도 안녕하셨습니까. 전에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한 행동으로 인해 제임스 님께 누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뭐, 상관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수녀님을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왕의 등장 때문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트릴 정도로 놀랐다.
“예? 마왕의 등장이라니요?”
“예, 얼마 전에 코린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뛰어난 기사가 부하들을 이끌고 마왕의 부하인 발록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마법사들의 의견으로는 발록이 본체를 드러낼 때는 마왕이 등장했다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마왕 외에는 인간의 힘으로 그 마신의 본체까지 소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답니다.
어쨌든 그가 거느린 부대가 발록 한 마리 때문에 거의 전멸당했을 정도로, 발록은 마왕의 부하라고 하지만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도 그가 부상을 당했지만 사력을 다해서 가까스로 탈출했기에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지요. 그래서 아무래도 예전에 수녀님이 가져오신 그 신탁의 검은 세력은 마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어 수녀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제임스는 일부러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마왕의 정보를 라나에게 아주 자세하게 말했다. 다크가 마왕의 등장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녀의 주위에 있는 이 수녀를 통해 이 사실이 전달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쨌든 이 수녀는 다크가 코린트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준 은인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그렇다면 저도 어서 코린트로 가 봐야겠군요. 저는 신탁에 따라서 영웅을 도와야 할 사명을 띠고 있으니까요.”
“아니, 수녀님은 이곳에 계셨으면 합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탁은 케락스로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이곳까지 흘러왔지만, 코린트가 마왕의 존재를 파악하고 그를 상대할 준비를 한다면 저는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임스는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수녀님이 도와야 할 곳은 코린트가 아닙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녀님은 지금 세계 최강의 국가가 어디라고 보십니까? 코린트, 크루마, 아르곤, 알카사스 등등 모두 다 강력한 제국이라고 하지만 지금 수녀님이 계신 치레아 공국만큼 막강한 국가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제 말은 사실입니다. 치레아 대공은 세계 최강이라고 인정받는 검객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라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이 그 정도였나요?”
“모르고 계셨었나요? 그리고 치레아 대공을 따라다니는 두 분은 에인션트급에 이르는 골드 드래곤들입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수녀를 보며 제임스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신탁이 영웅을 예고한다면, 치레아 대공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수녀님은 여기서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