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칼부림을 해 대던 그들은 이윽고 서로 간에 무언의 합의를 했는지 검을 멈추고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둘 다 오랜만에 전력을 다했던 탓인지 숨을 헐떡이고는 있었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내가 검술을 배운 후로 이렇게 후련하게 싸워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카렐의 말에 다크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온몸이 녹초가 된 듯했다. 모든 근육들이 탈진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 뻐근한 느낌조차도 황홀했다. 그녀는 카렐이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이쯤에서 그친 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였을 때의 자신이었다면 이틀 밤낮을 싸운다고 해도 견뎌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는 팔과 다리는 아무리 내공이 받쳐 준다고 해도 이것이 한계인 것이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다크에게 카렐은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너의 자존심을 건드리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네 검술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주 대단한 실력이라는 것은 잘 알아.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부족하단 말이야.”
카렐의 말에 약간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무공에 대한 호기심에 다크는 슬쩍 질문을 던졌다.
“뭐가?”
“너의 검은 순간순간 아주 적절하면서도 매끄러운 움직임을 보여 줬어. 굉장한 속도, 그러면서도 아주 다각적인 공격력,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극심한 변화…….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나는 네 공격을 막아 낸다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어. 왜냐하면 그런 검술을 쓰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거든.”
카렐의 검술은 이 세계의 모든 기사들이 그러하듯 변화보다는 한 점에 집중되는 파괴력을 중시하는 것이었기에 다크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나는 너를 압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지. 너의 검술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어. 엄청난 속도와 그 변화, 그러면서도 네 검격은 엄청난 힘을 싣고 있었지. 어쩌면 너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격투를 했다면 그 허점을 알아내기도 전에 내가 목숨을 잃었을 거야. 그만큼 너의 검술은 무서웠다고 할 수 있지.”
잠시 다크를 쳐다보던 카렐은 다크가 그런대로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자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검이란 한 점을 향해서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가야 할 텐데, 이상하게 그것이 뭔가에 구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단 말이야. 나는 이런 느낌을 형식에 얽매여 있는 자들에게서 느꼈거든. 바로 그 느낌을 자네에게서 받았단 말이지.”
“구속된다고? 글쎄…….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검술 하나를 연구하고 있는데, 그 때문인가? 사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거든.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검술이라고? 한번 설명해 봐. 너 정도 수준이라면 사실 검술이라는 틀에 얽매여서는 절대로 안 되지. 그리고 또 틀에 얽매여 있어서는 결코 네 수준에 올라설 수가 없어.”
카렐의 말에 다크는 어이없다는 듯 항변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가능했어. 그래서 나는 여태껏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다크는 자신의 사부 유백이 창안한 방법을 카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검술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만큼 쪼개어 그것을 개별적으로 격투에 응용하는 방법을 말이다. 사부는 이 방법을 통해 모든 검술을 ‘잊을 수 있다’면 최강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카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군. 그렇다면 너는 진정한 의미에서 ‘잊었다’고 할 수 없어. 최고의 경지란 그런 식으로 쪼개어 나가는 것이 아니야. 진짜로 잊어야만 해. 완벽하게 자신을 잊고, 검을 잊고, 정해진 투로(鬪路)를 잊었을 때, 그때가 돼야 검술은 새로운 경지를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참 이상하군. 형식이라는 것에 얽매여 있는 한, 의식과 한계 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이 충돌하면서 정신 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너는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긴 거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다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글쎄, 나는 그런 것을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어. 아, 참, 예전에 사부님께 검술을 배울 때, 어느 날 명상을 하다가 검술의 이치를 깨달은 적이 있어.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무(無)를 통한 검술은 아니었지. 하지만 그 후 내 검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사부님을 능가했거든.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벽을 넘었다고 생각했지.”
“허, 참, 그렇다면 한 가지 물어보세. 자네의 사부는 마스터였었나?”
“마스터? 아니.”
다크는 잠시 생각해 봤다. 유백은 조금 수준 높은 그래듀에이트 정도……. 그렇다면 마스터는 아니었다. 다크의 대답을 들은 카렐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사부에게 검술을 익혀서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이거지?”
“응.”
“그것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원래가 어떤 검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나가다 보면, 그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벽이 생기지. 그것을 뚫었을 때, 비로소 그 검술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의 칭호를 얻을 수 있어. 그런 다음 형식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완벽한 자유를 향해 일보를 내디딘 사람을 그랜드 마스터라고 부르지. 내가 봤을 때, 넌 형식에 얽매어 있어.
네 검술이 빠르고, 아주 심한 변화를 보였기에 내가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너는 그 틀 속에서의 변화와 틀 속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네 검술처럼 완벽한 검술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너는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는 거야. 나는 내가 익혔던 검술의 한계를 깨닫고 그 형식을 버렸어.
하지만 너는 검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것 같아. 왜냐하면 네 검술은 너보다 한 차원 높은 나까지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완벽했거든. 그게 바로 함정이라는 거지.”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말에 다크는 조금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어.”
“뭐가?”
“너의 몸은 이미 그랜드 마스터의 것이야. 나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어. 단전에 가득 차 있는 그 엄청난 마나… 도저히 마스터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강함이지. 정신은 마스터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그랜드에 들어서 있다? 이건 도저히 말도 안 돼.
의식이 그 정도까지 성장하지 못했다면 한계 이상으로 성장한 무의식과 충돌하면서 정신 이상이 되어야만 하는데, 너는 의식이 뒤떨어져 있는 채로 무의식이 스스로 동작하여 육체를 재구성했으니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겠어?”
카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다크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오래전에, 적의 계략에 빠져서 기억의 끈을 한순간 놓친 적이 있었어. 그런 다음 다시 기억을 되찾았을 때, 뭔가 나도 모르지만 내 무공은 한 단계 더 진보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어. 나는 그게 마나를 거의 무한대로 쓸 수 있게 해주는 ‘북명신공’이라는 무공의 영향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생사경’이 가까웠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지. ‘생사경’은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서는 무술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강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거든.”
“놀랍군. 너는 그런 식으로 해서 의식과 무의식의 충돌을 교묘하게 피한 것이야. 너의 육체가 그랜드로 탈바꿈하고 있을 때, 네 의식은 저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거지. 정말 하늘의 도움이 아니면 그런 행운을 누릴 수 없었겠지. 그 계략이 정신 이상이 됐어야 할 너를 구했다고 봐야 하겠군.”
“그, 그런가?”
다크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자신이 목표로 하던 생사경은커녕, 현경에조차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네가 연구하고 있다는 그 검술을 기억 속에서 한시바삐 지워 버리는 것이 좋을 거야. 그것이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리고 자아까지도 완전하게 지울 수 있을 때, 완벽한 자유라는 것이 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이때 다크는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래전, 나이아드에게 잡혀서 정령계에 갔을 때… 내공을 거의 끌어올릴 수 없었던 그때, 자신도 모르게 발휘되었던 어떤 무공.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는데, 바로 그것이 현경의 무공인 모양이었다. 그는 그때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응용해서 발출할 수 있는 무상 검법도, 나이아드도 관심 밖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의식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현경의 발치를 슬쩍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다크는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과거 자신이 국광의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 그때 몽고 벌판에서 수많은 몽고 병사들을 상대로 혼자서 분투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자신은 황궁의 무공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벌 떼같이 달라붙던 적들을 베고 또 베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정도로 그는 수많은 적을 상대로 무아의 상태로 싸웠다. 황궁의 무학이 가지는 단순함, 그것을 수많은 상대를 향해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 줬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 된다는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적은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그는 적이고 아군이고 초식이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자신이 아는 모든 수법을 동원해서 공격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안정하게 흘러가던 기의 유통이 원활하게 풀리며 전개되었던 어검술…….
다크는 카렐과 대화하던 상태 그대로 멍하니 굳어 버렸다. 이때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있던 아르티어스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이봐, 다 싸웠으면 들어와야 할 것 아냐. 네 마누라가 식사 준비까지 다 끝냈는데 말이야.”
한참 카렐을 향해 말하던 아르티어스는 멍하니 앉아 있는 다크의 눈앞에 자신의 손을 쓱쓱 휘둘러 보더니 카렐에게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무슨 짓을 한거지? 얘가 왜 이렇게 정신이 빠져 있느냐구.”
카렐은 천천히 일어서면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있는 모양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한 과정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그거 좋은 거야?”
“물론이죠. 최고의 검객으로 성장하려면 저런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 되거든요. 언제 끝날지 모르니 안으로 들어가서 향기로운 차라도 한잔하시며 기다리시죠.”
“그럴까?”
카렐을 따라서 들어가며 아르티어스는 궁시렁거렸다.
“젠장, 더 이상 강해지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야. 음식 향기가 그럴듯하다고…….”
드래곤과 드라군의 차이
말토리오 산맥을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울창한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천천히 나가고 있었는데, 복장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사냥꾼들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숲 속의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전진하고 있었기에 속도는 상당히 느린 것이었다. 이때 제일 앞에서 걸어가던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말했다.
“젠장, 엄청나게 광활하군. 이봐!”
“옛, 단장님.”
“그 흉폭한 드라군(Dragoon)이 있다는 곳이 여기가 맞기는 맞는 거야?”
단장의 질문에 부단장 겸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미노시가 즉시 대답했다.
“옛, 여기가 틀림없습니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저쪽 마법사들이 우리 쪽 마법사들에게 좌표 설명을 정확히 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공간 이동을 마친 지점에서 북쪽으로 30킬로미터쯤 북상했으니 슬슬 드라군의 서식지에 들어설 때가 되었습니다.”
미노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단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드라군의 서식지면 발자국이라도 하나 눈에 띄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고, 정찰 보낸 놈들은 아직 안 돌아왔나?”
“글쎄요. 올 시간이 넘었는데 말입니다.”
단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 설마… 벌써 드라군하고 싸움이 붙은 것은 아니겠지? 지원 부대를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놈이 숲 속 깊숙이 도망가면 찾기도 힘든데 말이야.”
이때 미노시가 왼쪽 숲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쪽에서 옵니다.”
미노시의 말을 증명하듯, 숲을 헤치고 10여 명의 기사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크 다섯 마리를 잡아서 길쭉한 장대에 묶어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그것을 본 미노시는 가장 앞장서서 오는 사내에게 벌컥 화를 냈다.
“이봐! 뭐 하다가 이렇게 늦은 거야?”
그 말에 맨 앞에서 걸어오던 사내가 등에 지고 있던 장대를 내리면서 말했다. 그는 노미란 이름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검객이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능숙하게 일을 처리했기에, 보통 정찰대 혹은 전위 부대를 이끌고 선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다가 보니까 포동포동한 피그 대여섯 마리가 겁도 없이 달려들잖아. 잘됐다 싶어서 잡아 왔지, 뭐.”
노미의 대답에 미노시는 한꺼풀 꺾인 어조로 질책했다. 그만큼 노미가 잡아온 오크는 아주 맛있는 별식이었던 것이다.
“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드라군의 서식지니까 조심했어야지.”
말을 마친 미노시는 단장의 허락을 받은 후 모두에게 식사 준비를 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어디에서 몬스터가 출몰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들 중의 몇 명은 경계를 서야만 했다. 오크들을 통나무에 꿰어 불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통구이를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구수한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훨훨 타오르는 불 위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저마다 입맛을 다셨다. 오크 통구이는 아주 맛있는 별미들 중의 하나로 용병단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이쪽 대륙 놈들은 음식 아까운 줄을 모른다니까. 식량이 남아도는지, 그 많은 피그들을 잡아 놓고도 그냥 버리다니 말이야. 안 그래?”
단장의 말에 엄청난 거구를 자랑하는 다쿠다가 지글거리는 오크의 넓적다리를 탐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음식 함부로 버리면 벌 받는데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단장님?”
다쿠다의 말에 단장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런 후 그는 알카사스 놈들의 괴상한 행동에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맞아, 전투가 끝난 후에 배도 고프고 해서 피그 다리통 하나 잘라 구워 먹으려는데, 자식들이 영 못 먹을 걸 먹는 것처럼 구역질난다는 듯 쳐다보잖아. 에이, 재수 없는 자식들.”
이윽고 고기가 다 익은 듯하자, 정찰을 담당했던 노미가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단장님, 고기가 다 익은 것 같은데 빨리 먹지요.”
그는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크의 넓적다리를 잡자, 행여 딴 놈이 잡을세라 재빨리 자신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그 반대편 다리를 움켜잡았다. 그런 후 다소 여유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 술 가진 거 없나?”
“위험한 드라군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시겠다니, 제정신이야? 아차 실수하는 날에는 아무리 자이언트에 타고 있다고 해도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나! 나도 예전에 한 번 방심했다가 그놈한테 물려서 자이언트의 발목이 박살 난 적이 있어. 그놈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힘도 엄청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 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식사나 해라.”
단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부하를 질책한 후 넓적다리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르티어스의 레어에서 한쪽 눈두덩이가 퍼렇게 변색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던 어스무스 그랜딜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마법 경보음을 듣고 놀라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얼스웨이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예, 공작 전하. 적들이 어르신의 영토 안으로 침입한 모양입니다. 여기에 있는 상황판에 따르면 영토 외곽에서 폭넓게 포진하여 올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큰일이군. 빨리 가 보세.”
“예.”
레어 밖으로 슬쩍 나가서 정찰을 한 후 그들은 적들의 규모와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에 의견 일치를 봤다.
“아무래도 브로마네스 어르신께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들보고 얼씬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는데……. 허∼참, 난감하군.”
어제 브로마네스가 찾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는 오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양손을 번쩍 드는 것이었다. 꼭 아이들이 벌을 받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브로마네스를 보고,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도 잊고 키득키득 웃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그 둘은 브로마네스한테 그야말로 비 온 뒤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그 후 브로마네스는 방 하나를 정해서 그곳에서 그 짓을 하면서 엘프들에게는 그 방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랜딜 공작은 문 가까이까지 슬그머니 다가간 후 조용히 불렀다.
“저, 어르신.”
용기를 내어 불러 봤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렀다.
“어르신!”
곧이어 짜증이 가득 담긴 브로마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
“뭐냐?”
“침입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레어가 떠나갈 듯 노기에 가득 찬 브로마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망할 녀석들! 네놈들이 처치하면 될 거 아냐! 좀도둑 몇 놈 가지고 또다시 나를 귀찮게 하면 너희들을 먼저 파묻어 버릴 테다.”
그랜딜 공작은 기겁을 해서 물러났다. 그런 후 얼스웨이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힘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그 지옥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저놈들과 싸우는 편이, 어르신께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물론입니다, 공작 전하.”
“그럼, 가자.”
“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