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0화 (366/930)

이윽고 그 토실토실하던 오크들이 전부 뼈다귀로 바뀌었을 때, 단장은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드라군 사냥은 정말 오랜만이군. 드라군은 사냥하기는 아주 힘들어도 고기 맛은 아주 끝내 주지. 자네들은 먹어 봤나?”

주위를 천천히 살펴본 후 단장은 말을 계속 이었다.

“이런 피그 따위는 드라군에 비하면 정말 먹을 것이 못 돼. 아마 그 때문에 드라군이 거의 멸종당했는지도 모르지.”

그 말에 미노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그놈들이 드라군의 사체를 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12미터짜리 드라군 한 마리를 잡으면 고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우리들한테 조금 주는 것도 아까워서 하나도 안 주겠다고 하다니, 쩨쩨한 놈들.”

미노시가 투덜거리자, 노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설마, 본국에도 거의 멸종됐는데, 여기에 그렇게 큰 놈이 남아 있겠어? 10미터만 되도 수지맞는 거라구. 하긴 드라군 고기 맛을 한 번 본 사람은 절대로 못 잊지. 그것만 해도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그 가죽하고 뼈는 얼마나 귀하냐? 게다가 여기는 마법사들이 많다니까 그것으로 무기나 갑옷 따위를 만들어서 고가에 팔 수 있을 것 아냐?”

부하들의 잡담이 계속되자 단장은 약간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야야, 그건 놈을 잡았을 때 얘기고……. 일단 드라군을 포착하면 무엇보다 확실하게 한 번에 잡아야 한다. 놈의 발은 정말 빠르거든. 상처만 입히고 놓치면 아예 추격을 포기해야 하지. 내 경험에 의하면 놈의 발을 묶는 것이 이 사냥이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 거야. 너희들은 드라군이 나타나면 내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돼.”

이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작은 덩치의 라누마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는 매우 행동이 재빠르고 전투 실력이 탁월했기에 동료들 사이에서 돌격대장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앞에서 싸웠는데도 아직까지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단순히 빠르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단장, 여기서는 드라군이 보물도 모으는 모양이죠?”

단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말했다.

“글쎄… 하기야 대륙이 다르니까 그런 변종이 있을 수도 있겠지. 사실 별의별 데빌들이 다 돌아다니는 곳이니까 말이야. 여기 와서 싸워봤잖아. 이쪽 대륙의 데빌들은 덩치는 우리 쪽과 비슷하고 생긴 것도 마찬가지지만, 그 힘이 두 배는 되는 것 같더라. 거기에다가 수만 마리씩 여러 종류의 데빌들이 뭉쳐서 다니니까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웠잖아? 그걸 보면 이쪽 데빌들은 뭔가 좀 다른 모양이지.”

라누마는 설마 하는 듯 억지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물을 모은다면……. 설마, 테로돈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죠? 하하.”

서로 간의 오해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들은 드래곤을 테로돈이라고 부르고 있었고, 저쪽에서 말한 드래곤을 자신들이 말하는 드라군이라고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 드라군이라는 것은 이쪽 말로 렙터라는 초대형 파충류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하하, 당연하지. 어떻게 감히 테로돈을 자이언트 가지고 잡을 생각을 한단 말이냐? 이봐, 드라군이라고 한 것이 확실하지?”

단장도 불안감을 웃음으로 흘리며 호쾌하게 대답했지만, 아무래도 못 미더웠는지 미노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만큼 테로돈은 공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드래곤이라고 하더니 이쪽에서 못 알아들으니까 엄청나게 거대한 도마뱀이라고 했잖습니까? 이봐, 너도 그때 들었잖아. 그 녀석 발음이 좀 안 좋아서 그렇지 드라군을 드래곤으로 잘못 발음한 걸 겁니다.”

“그래? 자, 이제 잡담은 그만 하고 전진하자.”

“알겠습니다, 단장님. 자, 모두들 짐을 챙겨라. 이동한다.”

모두들 전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붉고 푸른 빛 덩어리들이 엄청난 기세로 주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덩어리가 지면에 닿은 즉시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쾅!”

사방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모두들 그 폭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허둥지둥 피하기 바빴다. 그런 가운데 행동이 재빠른 라누마와 미노시가 타이탄을 꺼냈다.

“이봐, 놈들은 몇 명 안 되는 것 같다. 미노시! 자이언트로 빨리 앞에서 막아.”

“맡겨 주십시오, 단장님.”

미노시가 타이탄으로 동료들의 앞을 가로 막았을 때, 라누마는 이미 단장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단장은 미노시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세밀히 전방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자신들을 향해 공격 마법을 퍼붓고 있는 상대를 발견했다.

“어? 귀가 뾰족한 거 보니 저거 샬로테 아냐? 왜 샬로테가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그 말에 미노시가 타이탄에 탄 채 답해왔다.

“글쎄요, 혹시 저것들 숲의 파수꾼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니까 몇 마리 남지 않은 드라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저러는 게 아닐까요?”

“에이,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별것들이 다 사람 고생시키는 군.”

“저도 돌진할까요? 상대는 몇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니, 라누마 혼자서도 충분해. 혹시 저것들 외에도 있을지 모르니까 자네는 자이언트에 탄 상태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

“옛.”

하지만 라누마는 엘프를 단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한 채 돌아왔다. 산꼭대기까지 재빨리 돌진해 올라갔지만, 상대는 어디로 튀었는지 흔적조차 모호할 정도로 모습을 감춰 버렸던 것이다.

“젠장.”

타이탄을 돌려보낸 후 투덜거리면서 라누마가 털레털레 걸어오는데, 방금 전 엘프가 사라졌던 곳에서 또 다른 근육질의 잘생긴 금발의 사내가 엘프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미노시가 말했다.

“단장님, 아무래도 저놈들… 혹시, 경쟁자가 아닐까요?”

“경쟁자? 아하, 그러니까 저놈들도 드라군 사냥을 하기 위해 여기 왔다는 말인가?”

“예, 안 그러면 갑자기 우리들을 공격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저놈들은 우리들을 내쫓고 드라군을 독식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새로 나타난 상대를 보자 다쿠다가 앞으로 쓱 나섰다. 그는 크로우 용병단원들 중에서 가장 키가 컸고, 또 머릿속까지 근육질일 정도로 우람한 몸매를 과시하는 사내였다. 그는 저쪽에 자기처럼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가 있다는 것을 본 순간 치밀어 오르는 호승심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건들거리면서 상대를 도발했다.

“이봐, 네놈도 힘 좀 쓰게 생겼는데, 나하고 한판 할 용기가 있냐? 응?”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었기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지, 금발의 사내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뭐라고 하는 거야? 빌어먹을 놈들. 인상을 봐서는 분명 내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잠시 혼자 씩씩거리던 금발의 사내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자 우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외쳤다.

“이리로 올라와라. 내 지옥이 뭔지 가르쳐 줄 테니.”

다쿠다는 상대가 건방지게 뭐라고 씨부렁거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올라오라면 내가 못 올라갈 줄 알아?”

다쿠다는 잠시 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장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그 육중한 몸매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산꼭대기를 향해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곧 이어 시작된 육중한 사내들끼리의 육박전. 힘으로는 금발의 사내가 조금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기술 쪽은 다쿠다가 한 수 위였다. 한동안 탐색전을 벌이던 다쿠다는 이윽고 빈틈을 잡고 그 육중한 근육질의 주먹으로 금발 사내의 면상을 직격했다.

“퍽!”

상대를 얕보고 있던 금발 사내의 머리가 충격 때문에 확 튕겨질 듯 젖혀졌다. 그리고 곧 그림으로 그린 것 같던 잘생긴 그의 코가 찌부러진 것이 보였고, 거기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금발 사내는 슬쩍 코를 만져 보다가 손에 붉은 액체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이런 벌레 같은 자식! 죽여 버리겠다.”

곧이어 금발 사내는 손에서 희뿌연 오라를 뿜어내기 시작했고, 도저히 근육과 뼈로 이뤄진 손으로는 만들기 힘든 동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퍼버벅!

한동안 북 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금발 사내가 엄청난 힘으로 다쿠다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 동안 다쿠다를 두들겨 패던 그는 이미 기절해 있는 다쿠다를 발로 차서 산 밑으로 굴러 떨어뜨렸다. 그런 다음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 올라오고 있는 용병 기사들을 향해 엄청난 마법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엄청난 폭발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위로 돌격했던 기사들이 재빨리 뒤로 도망쳐 내려왔다. 단장은 한심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전장의 사신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은 우리가, 한낱 마법사 한 놈 때문에 쫓겨 내려온다는 말이냐?”

그 말에 노미가 옆에서 발끈한 듯 대답했다. 아무래도 단장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상대는 엄청난 마법사입니다, 단장. 여태껏 수많은 전장을 돌아다녀봤지만, 저렇듯 폭발적인 마법 공격을 가해 오는 놈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상대는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이 불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멍청하기는, 모두들 자이언트를 꺼내라. 아무리 마법 공격이 강력하다고 해도 자이언트의 철갑을 뚫겠느냐? 모두 돌격하라!”

여기저기에서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광폭한 웃음을 터뜨리며 마법 공격을 가하고 있던 금발 사내도 약간 움찔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40여 대가 넘는 타이탄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마법사라면 위압감부터 느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더욱 기고만장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그가 서 있던 산 정상은 푸른빛에 뒤덮이고 말았다.

“저게 뭐냐?”

모두들 갑자기 일어난 괴이한 사태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그 광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존재. 50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장대한 체구의 레드 드래곤이 빛 무리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럴 수가! 테로돈이다! 모두들 피해라.”

단장의 명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 위로 돌진해 올라가던 타이탄들은 드래곤을 발견하자마자 기겁을 하고는 모두들 재빨리 뒤로 돌아서 아래쪽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맹렬히 돌격할 때의 폭발적인 기세와는 달리, 온통 흩어져서 도망치는 그들의 표정은 겁에 질려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보던 레드 드래곤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몸이 완전히 부풀어 오를 때까지 숨을 들이쉰 레드 드래곤은 그 정점에서 입을 쩌억 벌리며 폭발적으로 숨을 토해 냈다. 입속에서 시뻘건 광채가 맺히는가 싶더니, 한순간 어마어마한 붉은빛의 다발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뒤쪽으로 쳐졌던 타이탄들부터 엄청난 열기에 먼지처럼 흩날리는 것이 보였고, 곧이어 그 모습조차도 검붉은 화염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엄청난 대 폭발…….

모든 것이 끝난 후 산 정상에는 금발의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화산이 대 폭발이라도 일으킨 듯 주위는 온통 잿더미로 화해 있었고, 여기저기에서는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는 산불이 났는지 검붉은 연기가 화염과 함께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반쯤 녹아 버린 타이탄의 잔해가 방금 전에 있었던 말도 안 되는 붉은빛 다발의 위력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한참 동안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하고 있던 그는 찌부러진 코를 쓱쓱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래도 시야가 확 트여서 좋긴 하구먼. 젠장, 그런데… 아르티어스에게는 뭐라고 변명을 하지?”

신탁의 영웅은 누구?

아직도 여름의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태양이 맑게 갠 하늘 위에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겨울의 영향 때문인지 한낮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꽃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거대한 정원에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화려하면서도 포근한 평화로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여인은 그런 대지의 축복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습관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벌써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데,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데나 여신님, 저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나는 그 커다란 갈색 눈망울로 잠시 드높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며 다시금 시선을 정원으로 옮겼다. 수많은 화초들이 가을을 맞이하여 저마다 자신만의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들의 아름다움이 눈길에서만 머물 뿐, 가슴속까지 와 닿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저씨가 싫다고 했어도 따라갔어야 했어. 그래야…….”

그때, 그녀의 눈에 뭔가 휙 하고 건물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기사? 아니야. 기사가 마음먹고 움직인 거라면, 나라도 알아 챌 수 없을 정도로 빨랐을 거야. 그렇다면?’

라나는 재빨리 몸을 놀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엔 대공 관저를 호위하기 위한 약간의 병사들만 남아 있을 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대공 직속에 2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들은 거의가 다 아르곤 국경이나 말토리오 산맥 쪽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제2친위 기사단이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도 모두 전선으로 이동해 버렸기에 텅 비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사람과 싸우는 것에 대한 교육을 정식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그녀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보통 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곧장 그 침입자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던 것이다.

‘첩자인가? 아니면 마법사?’

그녀가 정체불명의 인물을 향해 쏜살같이 거리를 좁히고 있을 때, 상대는 살그머니 대공의 침실과 집무실 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원하는 뭔가를 발견할 수 없었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뭔가 궁리를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 사내와 돌진하고 있던 라나의 시선이 뒤엉켰다. 정체불명의 인물은 멈칫하더니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뭔가 마법이라도 쓰는 것인지, 상당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무녀로서 근육 강화의 신성 마법을 쓰고 있었기에 쫓아가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서라!”

하지만 도망치는 놈이 서라고 한다고 서겠는가? 상대는 뒤를 힐끗거리며 열심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쫓고 쫓기는 추격이 시작되었다. 라나는 있는 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괴한과의 거리를 조금도 좁힐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괴한은 대공 관저에서 한참을 벗어나 숲에 이르자 드디어 라나에게 공격 마법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한은 라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지 처음부터 그녀를 목표로 하지 않고, 그 주변에 마법을 직격시켜 그녀로 하여금 포기하고 돌아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꽝.

주위에서 불꽃이 작열하며 굉음을 울렸지만, 그녀는 이를 악 물고 악착같이 상대를 쫓아갔다. 한참을 더 달리자 도망치는 상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괴한은 공격 마법과 속도 증가의 마법을 한꺼번에 쓰는 것이 힘에 겨운 것이 분명했다. 그것에 힘을 얻은 라나는 더욱 용기를 얻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거기 섯!”

이때 괴한은 다시 한 번 라나를 향해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라나의 주위를 향한 위협 공격 정도가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는 나무를 향해서였다.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이 박살 나면서 맹렬한 기세로 쓰러졌다. 그것도 괴한이 어떤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라나와 그 괴한의 사이로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무는 바로 지척에서 쓰러져 내리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옆으로 돌아간다면 괴한을 놓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나무의 위쪽으로 뛰어오를 수도 없는 상태였다. 완전히 나무가 주저앉은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높았다. 또 속도를 줄였다가 다시금 지금의 속도로 달릴 수도 없었다. 라나는 이를 악 물고 더욱더 힘껏 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괴한을 추격하려면 나무가 쓰러지기 전에 그 밑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쿵!

“꺄아악!”

굉장한 소리와 함께 라나의 비명이 숲 속에 울려 퍼졌다. 간발의 차이로 나무 밑을 통과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라나가 나무에 깔려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괴한은 속도를 멈추고 섰다가 이쪽으로 몇 발자국 다가오는 듯하더니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곧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발길을 되돌렸다.

“젠장, 젠장, 제엔장!”

괴한은 라나에게 다가와서 마법을 사용해서 굵은 가지들을 잘라 내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소?”

라나는 상대가 아주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무에 깔린 것을 보고 도망치지 않고 돌아와서 도와주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에 잠시 망설인 것으로 보아 도망쳐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 덕분에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라나는 잠시 상대를 관찰한 후 말을 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는 사내의 얼굴은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라나는 더욱 아리송함을 느꼈다. 그녀가 국가의 일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법사를 첩자로 부려먹지는 않는다는 상식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생해서 키운 마법사를 첩자나 정탐꾼 정도로 소모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노릇인 것이다.

“무슨 일로 대공 관저를 정탐하시는 것입니까?”

라나가 상대를 자세히 관찰한 것처럼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라나가 신성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잠시 노려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렇소. 말이 나온 김에 물어봅시다. 대공 전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 것이오?”

“전하께서는 지금 여행을 가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소, 휴∼∼.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겨우겨우 이곳까지 왔건만…….”

“대공 전하를 뵙기 위해 오셨다면 응당 정문의 경비병들에게 면회를 신청하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숨어서 안을 살피신 거지요?”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마도 그대가 무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을 죽였을지도 모르오.”

“예?”

“나는 마왕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치레아 대공 전하를 찾아왔소. 지금 크라레스 내부에는 마왕의 뿌리가 너무 깊게 내려있는 상황이라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왜 저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상대는 손가락으로 희뿌연 빛을 발하고 있는 라나의 손을 가리켰다.

“신성 마법 때문이오. 마왕을 따르는 자라면 절대로 신성 마법을 쓸 수 없을 테니까 말이오.”

“아, 그렇군요.”

라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후,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당신을 믿지요?”

그 말에 상대는 피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나를 믿건, 그렇지 않건 그건 당신 자유요. 왜냐하면 나는 이제 떠날 거니까 말이오. 그럼, 잘 있으시오.”

상대가 미련 없이 돌아서서 걸어가자 라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당신은 어떻게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아시게 된 거죠? 얼마 전에 코린트의 제임스 드 발렌시아드 후작님도 대공님께 마왕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러 오셨어요.”

그녀의 말이 상대의 흥미를 끈 것은 확실했다. 상대는 다시금 되돌아와서 당혹감을 감추며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이 정말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그건 저도 잘 몰라요. 나중에 카르토 백작님께 들으니까 코린트와 치레아 공국 사이에 동맹 및 불가침 협정이 맺어졌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약간 놀란 사내는 잠시 후 뭔가 깨달았다는 듯 되물었다.

“분명히 크라레스 제국이 아니라 치레아 공국과의 동맹이오?”

“예, 그렇게 들었습니다.”

“허 참, 그렇다면 그분께서도 크라레스를 의심하시는 것이 분명하군. 무녀님도 오래 살고 싶다면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코린트나 뭐 그런 딴 나라로 가시란 말이오. 지금 마왕이 그 힘을 키우고 있는 곳은 크라레스의 수도인 크라레인시요. 마왕의 꼭두각시가 된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이 땅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을 거요.”

“분명히 크라레스라고 하셨습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나는 뭔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크는 이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아데나 여신의 뜻인지, 자신은 이곳에 남아서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신탁에 의하면 그녀는 영웅을 도와야 할 사명을 지닌 자. 그렇다면 어쩌면… 이 남자와 다크를 만나게 하는 것도 그 사명의 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진짜 다크가 영웅임이 확실하다면 마왕의 세력권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힘을 기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왕의 토벌을 위해서…….

“지금 대공 전하께서는 키아드리아스라는 드래곤을 찾아가셨습니다. 아마 지금 그의 레어에 계시겠죠.”

“키아드리아스라……. 꽤 유명한 블루 드래곤을 찾아가셨군요. 참, 그런데 아르티어스 님도 함께 가셨습니까?”

상대가 아르티어스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고 있자 라나는 더욱 신뢰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예, 지금 바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분께 빨리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예. 그럼 이만…….”

상대가 인사만 하고는 떠나려고 하자, 라나는 다급한 어조로 사정했다.

“이보세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예? 하지만…….”

“저는 아데나 여신님을 섬기는 무녀인 라나 슈바이텐베르크 수녀라고 합니다.”

“아, 예. 저는 다론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그냥 다론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모두들 그렇게 부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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