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검을 뽑아 든 성기사단
드디어 마왕의 본거지를 습격하기로 결정된 그날. 코린트의 근위 기사단과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 그리고 다크 일행은 점심 식사 후 공간 이동하여 치레아 공국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치론에 도착했다. 마법사들이 크라레인시로 갈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진을 만들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각자 시간을 보내며 크루마와 아르곤에서 보내올 병력을 기다렸다.
다크 일행이 기다리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지면에서 4미터 정도 높이에서 빛이 번쩍하더니 크루마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네르바는 뛰어난 기사답게 지면에 우아하게 착지한 후 먼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드래곤들에게 차분히 인사했다.
“저것들은 뭐야?”
다크가 자신의 부하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미네르바는 ‘눈치도 빠르군’하고 생각하면서도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뭘 말하는 거지?”
“네가 데리고 온 떨거지들을 말하는 거다. 나는 분명히 마왕과의 싸움인 만큼 가장 실력 있는 기사들만을 거느리고 오라 말했을 텐데.”
“물론이야. 지발틴 기사단은 가장 우수한 기사들로 이루어진 크루마의 정예라구. 제2차 제국 전쟁 때, 반 정도를 잃었기에 4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내 말은 근위 기사단은 어떻게 했느냐는 말이야. 가장 우수한 기사는 근위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내가 바보야? 하여튼 잔머리 굴리는 데 있어서는 토지에르와 비슷하군.”
미네르바는 당치도 않다는 듯 깜짝 놀라는 척하며 항변했다.
“잔머리라니,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우수한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구. 얼마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셨지. 선황제께서 도저히 황권을 계속 이어 나가실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야. 선황제께서 황제 폐하의 위를 유지하고 계셨다면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올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신임 황제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뿐더러 현 황제 폐하는 원로원파와 친하거든. 그런 상태에서 근위 기사단을 빌려 달라는 부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내 처지를 이해해 줘. 그리고 내 처지가 이렇게 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너 때문이잖아.”
미네르바는 마지막에 그 책임을 슬그머니 다크에게로 밀어붙였다. 다크도 일단 지은 죄가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추궁하지는 않았다. 미네르바의 변명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네 부하들에게도 공간 이동할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고 해. 아르곤에서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공간 이동할 거니까 말이야.”
“알았어. 그런데 용케도 아르곤을 끌어들였군. 그 녀석들은 타국의 일에 절대 참견을 않기로 유명한데 말이야.”
“글쎄,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지만 별로 어렵지 않았어. 마왕이 나타났으니 병력을 좀 보내 달라고 했더니, 그쪽에서 쾌히 승낙했거든.”
“그래? 이상한 일이군.”
이때 루빈스키가 앞으로 쓱 나서면서 말했다.
“아르곤의 성기사단이 도착하면 그 즉시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아무래도 지금 대략적인 작전을 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키에리는 탐색하듯 루빈스키의 표정을 바라보며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좋은 작전이라도 있소?”
“예, 마왕이 끌어 모은 마물들의 수가 얼마나 엄청난지는 알 수 없지만, 알카사스에 구원차 달려가 본 제 경험으로 미루어 말씀드리지요.”
여기까지 말한 루빈스키는 모여 있는 각국이 자랑하는 기사들을 둘러봤다. 로체스터나 미네르바의 경우 아직까지 직접 마물들과 싸워 본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물들은 대단히 강력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 또한 엄청나지요. 그런 적들을 향해서 무모한 싸움을 벌여 봐야 득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만큼 속전속결이 가장 우선일 것입니다. 마왕군과 접촉하는 그 순간, 그들을 돌파하여 마왕과의 접전을 시작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마왕은 황궁의 지하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최단시간에 그곳까지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지요.”
키에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지하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아주 무모한 작전이요. 타이탄의 크기 때문에, 지하 같은 좁은 공간에서 적과 싸운다는 것은 무리요.”
“하지만 그에 따른 이점도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마물들의 덩치는 웬만한 타이탄보다도 큽니다. 그런 만큼 좁은 공간이 우리 쪽에만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까지 들은 미네르바는 눈치 챘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어받았다.
“그러니까 좁은 지역이 방어에는 유리하다는 말이로군요. 일단 침투해 들어간 후, 소수의 기사들이 마물들을 막고 있는 동안 나머지 기사들이 지하로 내려가서 마왕을 해치우자는 말이죠?”
“바로 그렇습니다.”
루빈스키 대공이 이런 작전을 짠 것은 황제의 구출에 대한 목적이 더 컸다. 다크와 다른 기사들이 마왕을 상대하고 있을 때, 자신은 근위 기사단을 이끌고 황제를 구출할 수 있는 것이다. 루빈스키에게는 마왕 토벌보다도 황제의 구출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니, 일단 그렇게 작전을 수행하기로 합시다.”
일단 간단한 작전 토의를 끝낸 후, 그들은 아르곤에서 도착할 기사단을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도착할 것 같았던 아르곤의 기사단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다리다가 짜증이 난 다크는 키에리에게 투덜거렸다.
“이 자식들 혹시, 무서워서 꽁무니를 빼 버린 거 아냐?”
포도주를 마시며 다크가 투덜거리자 키에리는 그녀를 달랬다.
“그건 아닐 걸세. 아르곤은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 마법사가 없으니까 말이야. 아마도 그 때문에 도착이 늦어지는 것 같군.”
“마법사가 없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이동한다는 말이야? 설마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오거나 달려서 온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물론 그건 아닐세. 아르곤 제국은 아주 부유한 국가지. 그들은 그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와이번을 사 모으고 있지.”
“와이번? 아, 그 드래곤 닮은 도마뱀?”
키에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부터는 그것들을 기사단에 대량으로 배치해서 부족한 기동력을 보충한다고 들었네. 아마도 날아서 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로 하지.”
“그걸 잘 알면서 왜 아르곤 제국에 미리 마법사를 보내지 않은 거야?”
“이쪽에도 준비할 것이 많아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네.”
“지금이라도 아르곤에 마법사를 보낸다면?”
“글쎄…, 와이번 타고 날아오는 중일 텐데, 지금 마법사를 보내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지.”
다크는 신경질적으로 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렇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군.”
바로 그때, 카렐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뭐지? 뭔가 엄청나게 많이 날아오는 것 같은데…….”
다크가 시선을 돌렸을 때, 동쪽 하늘 위에는 수백 개의 점들이 찍혀 있었다. 아직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 그것이 뭔지 알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전투 준비를 해 두는 것이 좋겠군. 마왕이 눈치 채고 부하들을 보낸 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다크의 말에 키에리가 일어서며 말했다.
“마왕군이라면 북쪽에서 내려올 가능성이 크겠지만, 뭐 만약이라는 것도 있으니 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겠지.”
코린트, 크루마, 크라레스의 연합군이 전투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때, 하늘 위의 점들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확실하게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아르곤 제국의 성기사단이다!”
로체스터 공작이 상대의 복장이나 문장을 보고 외치자, 모두들 꺼냈던 타이탄들을 돌려보냈다. 그런 와중에 수백 마리나 되는 와이번들이 서서히 착륙을 시작했다. 와이번 위에는 두 명씩 타고 있었는데, 그런 와이번 4백여 마리가 일제히 착륙하자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대부분 와이번들이 등에 메고 있는 안장이 가죽에 금실이나 은실 따위를 써서 멋을 낸 정도였지만, 그중 몇 마리는 아예 도금을 했는지 안장 전체가 금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금색 안장이 달려 있는 와이번에서 내린 유려한 외모의 남자가 천천히 로체스터 공작에게로 다가오자, 그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본 듯 상당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시옵니까, 교황 성하!”
“오오, 로체스터 경. 경이 보낸 공문을 받자마자 10개 성기사단을 이끌고 서둘러서 달려왔다네. 짐이 직접 성전에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될 줄이야, 이것도 다 샤이하드 님의 은혜로다.”
말을 하던 교황은 마음의 격동을 참기 어려운 듯 감격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언제 출발할 건가? 아직 다 안 온 것 같은데…….”
“다 도착했사옵니다, 교황 성하. 기습을 통한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기에 각국의 최고 정예 기사단들만 모여 있사옵니다.”
“이게 다라고? 신성한 성전에… 겨우 이게 다라고?”
허탈한 듯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교황은 이윽고 결심한 듯 외쳤다.
“이렇게나 마왕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다니…, 어쩔 수 없군. 짐이 직접 지휘하는 수밖에. 경들은 빨리 출발 준비를 서두르라. 내 직접 마왕에게 신께서 존재하심을 알리겠노라.”
그런 다음 교황은 자신과 함께 온 성기사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 신의 뜻을 펼친다는 자신의 기분에 도취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광기에 어려 있었고, 그것을 듣고 있는 성기사들의 태도 또한 광신도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교황의 뒷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다크가 로체스터 공작에게 소곤거렸다.
“저 멍청한 녀석은 뭐야?”
“아르곤의 지배자, 즉 교황이오.”
“그런가? 나는 교황이라고 해서 상당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저건 겨우 그래듀에이트를 통과했음직한 형편없는 놈이잖아.”
다크의 말에 로체스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부터 교황은 검술 실력 같은 객관적인 자료로 뽑는 것이 아니오. 신앙심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선출되는 것이지요.”
다크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아, 신앙심. 그래서 저 모양이군. 이쪽 기사들의 실력도 한눈에 못 알아보는 주제에 숫자만 믿고 까부는 것을 보니 말이야.”
“어쩔 수 없지 않소. 전쟁터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아 주길 바라오. 마법사들의 일이 좀 더 늘어나겠군. 그건 그렇고, 저 많은 와이번들도 공간 이동을 시켜야 하나?”
로체스터 공작은 미간에 줄을 그으며 중얼거렸다.
마왕 정벌대는 크라레인시 외곽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저마다 타이탄들을 꺼냈다. 아르곤에서 교황과 법왕 두 명이 더해진 10개 성기사단이 가세한 상태였기에 타이탄의 수는 엄청난 것이었다. 교황은 자신의 전용 타이탄 ‘아르곤’을 꺼냈다. 아르곤은 실전용이라기보다는 교황을 위한 의전용으로 제작된 너무나도 아름다운 타이탄이었다. 어깨까지의 높이가 5.6미터나 되는 이 타이탄은 출력은 1.5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드래곤 본과 와이번 본을 대량으로 사용했기에 무게는 67톤밖에 나가지 않았다. 교황은 타이탄의 검을 높이 빼 들며 외쳤다.
“샤이하드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천천히 아르곤의 검이 크라레인시를 향해 세워졌다.
“신의 뜻을 받들어 모두 돌격하라!”
4백여 명의 성기사들이 오라 소드를 뽑아 들고 괴성을 질러 대며 와이번에 탄 채 하늘을 날아서 돌격하는 가운데, 3백여 대의 타이탄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다크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이건 전쟁이 아니라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군. 영광은 무슨 얼어 죽을 영광.”
“신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저런 믿음이 생기는 것이겠지. 마왕이나 마족 같은 미지의 적에게 생기는 두려움도 저런 믿음이 희석시키는 거야. 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신념이 굳게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키에리가 빙그레 웃으며 다크에게 말했다.
“하지만 승리는 신념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지.”
아르티엔, 마왕과 대 격돌
거의 4백여 대의 타이탄이 크라레인시로 돌격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수없이 많은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마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이쪽의 공격을 이미 눈치 챘는지 크라레인시 쪽에서 마주 달려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 앞서서 달려오는 마물들의 흉측한 모습만 보일 뿐, 그 뒤에 달려오는 마물들은 자욱한 먼지에 가려서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 이게 뭐야? 주력 부대가 알카사스에 가 있다고 하더니 언제 다 돌아온 거야?”
마물들의 엄청난 숫자에 놀란 다크가 어이없어하자 키에리도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글쎄, 아무래도 저쪽에서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후퇴했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크와 키에리가 수군거리고 있을 때, 이미 전투는 시작된 상태였다. 선두에 선 아르곤의 성기사단은 엄청난 수의 마물들이 나타났는데도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하늘을 나는 여러 종류의 마물들은 와이번을 타고 있는 성기사들과 공중에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땅에서는 타이탄과 마물들 간의 치열한 격투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 돌격하라.”
다크의 청기사, 키에리의 게레리아, 카렐의 골든 나이트가 앞장서서 돌격하자 로체스터가 코란 근위 기사단을 지휘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알카사스 전선에서 돌아온 루빈스키 대공이 지휘하는 크라레스의 스바시에 근위 기사단이 바짝 뒤따랐다. 미네르바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제일 나중에서야 지발틴 기사단에 돌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4백여 대의 타이탄들과 4백여 명의 용기사들이 거의 5천에 이르는 마물들과 대 격돌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악.”
“쿠어, 쿠어억.”
곧 처절한 비명과 마물들의 울부짖음이 전쟁터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땅은 순식간에 그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으며, 피비린내는 역겨우리만큼 진하게 풍겨 나왔다. 사방 여기저기에는 처참하게 박살 난 마물들의 시체와 파괴된 타이탄이 나뒹굴고 있었고, 이미 공포와 광기에 사로잡힌 기사들의 눈빛은 마물과 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미쳐 있었다.
일단 격전이 벌어지고 나자, 아르곤의 성기사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50여 대의 타이탄들이 고철이 되어 나뒹굴기 시작했고, 그다음부터 그들은 전투가 아닌 살기 위한 발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물들의 겉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은 튼튼한 것이었다. 또한 어마어마한 힘으로 휘둘러지는 마물들의 각종 무기들은 타이탄의 장갑판까지도 관통할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마물들의 중앙을 돌파해 나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세 명의 그랜드 마스터를 주축으로 하는 3국 연합군이었다. 그들은 아르곤의 기사단과는 달리 마물들과의 혼전 중에도 철저하게 지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 명의 그랜드 마스터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마물들을 간단하게 처리하며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각 기사단 단위로 로체스터, 미네르바, 론카르트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그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오랫동안 레어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호비트들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성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물들과 거의 동급으로 싸우다니 말이다.”
아르티엔의 감탄에 아르티어스는 히죽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예? 헤헤, 굉장하죠. 특히나 저 앞에서 싸우고 있는 다크는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마물들이 앞을 가로막을 엄두도 못 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오며 마물들의 후방에서 거대한 발록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갑자기 허공에 그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거대한 채찍을 날렸다. 다크의 청기사는 채찍을 간단하게 방패로 튕겨 낸 후 무시무시한 강기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시퍼런 광채가 하늘을 꿰뚫으며 통과하는 그 순간, 이미 발록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다크는 상대를 놓쳤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여태껏 세 명이 삼각형의 형태로 적당하게 길을 개척하는 정도의 격투를 벌이다 갑자기 다크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키에리와 카렐은 당혹스러웠다. 키에리가 다급하게 다크를 따라 달려 나가려는 순간, 카렐이 제지했다.
“잠깐! 뭔가 이상하오. 이렇게 분별없이 앞으로 튀어나갈 리가 없는데 말이오. 잠시만 상황을 지켜보기로 합시다.”
그리고 그들은 곧이어 엄청난 대 폭발을 보고야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지만 청기사를 중심으로 가공할 만한 마나의 폭풍이 일어나더니 반구형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그녀를 공격하던 발록 두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엄청난 충격파에 휩쓸려 모래처럼 부서져 날아갔다.
그 기술을 보고 모두들 경악했다. 특히나 그 기술에 자신의 부하들이 치명타를 입었던 로젠이나 까미유는 그때의 공포스럽던 기억에 몸을 부르르 떨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저런 엄청난 기술을 사용하는 자가 적이라면 공포의 대상이 되겠지만, 아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더욱 사기충천하여 마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오! 저런 기술도 있었나? 저 아이는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지금 그런 얘기하실 때입니까? 아버지, 저 엄청난 마나의 회오리를 보라구요. 아무리 저 아이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저런 짓을 몇 번만 하면 거의 몸이 거덜난다구요. 그리고 저런 기술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마물은 겨우 1백 마리도 채 안 죽었잖아요? 안 되겠어요. 저 아이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걱정이 된다는 듯 굳은 안색으로 아르티어스가 앞으로 튀어나가려 하자 아르티엔이 가볍게 팔을 잡으며 말렸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냐?”
“예.”
단호한 아들의 대답에 아르티엔은 따스한 눈길로 다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놔둬라. 아무리 대마왕이라고는 하나 크로네티오의 힘은 그렇게 강하지 못하단다. 그가 호비트의 육체를 빌리고 있는 한, 과거와 같은 그런 엄청난 힘을 낼 수는 없다는 말이야.”
아르티엔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뭔가 알겠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렵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니 도와주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나는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싶단다. 우리 드래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룩해 낸 그런 영웅의 신화를 말이다. 더군다나 그 영웅이 우리의 사랑스런 다크라면 그 얼마나 기쁘겠냐? 너의 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금은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다크를 위해 좋을 것 같구나.”
아르티엔은 다크의 모습을 보며, 어릴 적 죽어라 말썽만 부리던 자식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끄응, 알겠습니다. 아버지 말씀은 언제나 옳으셨으니까요. 하지만 마왕이 아버지의 예상보다 월등하게 강하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도와줘도 괜찮겠죠?”
“그럴 가능성은 없다니까 그러네.”
아버지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누르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사랑스러운 아들이 위대한 대마왕 슬레이어로 탄생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다크가 작은 상처 하나라도 입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그였다. 바로 이때 거의 1천여 마리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마물들이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알카사스를 향해 진격해 들어가던 마물들로서 그곳에 있던 불칸이 대마왕의 소환 명령을 받고 부하들을 이끌고 급히 돌아온 것이었다.
불칸 휘하에 있는 발록들이 이동용 마법진을 여는 역할을 한 것인데,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닌 발록이라 하더라도 한번에 1백 마리 이상의 마물을 공간 이동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알카사스에 배치된 마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놈들로 추려서 이곳으로 이끌고 온 것이었다.
새로운 마물들이 가세하자 전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때 뒤에서 더 이상 남편의 안위를 무시할 수 없었던 키아드리아스가 급하게 본체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장 거대한 블루 드래곤으로 모습을 바꾼 후, 뒤쪽에서 달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 버렸다.
꽈꽈꽝.
푸른색 뇌전이 번쩍이며 대기를 관통하면서 엄청난 대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아르티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설마 힘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아르티엔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아르티엔은 한심하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힐끔 바라봤다.
“너는 저쪽 황궁에서 새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냐?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놈이 1천5백 년 전에 드래곤의 몸을 빼앗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강력하게 느껴지는 이 힘…, 주위를 압도하는 존재감…, 본신의 힘을 거의 태반이나 확보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가 있는 거지?”
아르티엔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마계의 지식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불가능이었다. 거의 신에 필적하는 그들이 이곳에서 이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소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낱 유희를 위해 소멸을 각오한다는 것은 아르티엔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서, 설마… 어둠의 대마왕이라는 녀석의 힘이 그렇게 엄청나다는 말씀이십니까?”
잠시 마왕이 있는 황궁을 노려보던 아르티엔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자신의 말썽꾸러기 아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허, 설마 내가 어릴 적에도 이렇게 철이 없었을까?”
아르티엔은 아들을 향해 애정이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눈길과는 달리 그는 아르티어스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으며 놀리듯 말했다.
“으이그, 이 닭대가리. 어릴 때는 말썽이라는 말썽은 도맡아 피워 애비 속을 썩였지. 이제 좀 커서 철이 들었나 싶었더니 하찮은 호비트에게 빠져 이 모양이라니. 내 자식이지만 한심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구나.”
“우이씨, 왜 또 닭대가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찮은 호비트라니요. 다크는 엄연히 내 아들이라구요. 젠장, 비록 내가 낳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만지며 투덜거리던 아르티어스는 걱정된다는 듯 다크를 좇아 연신 시선을 움직였다. 아르티엔은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다 마음을 굳힌 듯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힘을 숨기고 있듯, 저놈도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나. 너는 빨리 저 아이를 데리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쳐라. 그리고 혹시나 내가 죽는다면 너는 이 사실을 각 종족의 드래곤 로드들에게 알려라. 아마 모든 드래곤들이 힘을 합친다면 대마왕을 이길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에이씨, 농담 좀 그만 해요, 아버지. 각 종족의 드래곤 로드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충분히 이길 만큼 강한 분이 왜 자꾸 그러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모르셔서 그렇지 저도 제법 강하다구요.”
아르티엔은 투덜거리는 아들놈에게 빙긋 미소를 보냈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자부심도 어려 있었다. 자신의 예상보다는 아들이 훨씬 훌륭하게 자라 준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자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빨리 이곳에서 피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말을 끝내자마자 아르티엔은 곧장 황궁 쪽으로 날아갔다. 그는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서도 드래곤으로의 현신은 하지 않았다. 이미 마법의 극한을 본 그에게 있어서 겉모습을 바꾼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황궁같이 좁은 곳을 격전장으로 삼는다면 몸집이 작은 쪽이 훨씬 유리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몇몇 마물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황궁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는 아르티엔을 가로막았다.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의 앞을 막아선 마물들은 거의 타이탄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거대한 날개,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표피. 날카로워 보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그것들은 아르티엔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르티엔의 앞에 채 다가서기도 전에 뭔가에 베이기라도 한 듯 반으로 쫙 갈라지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다.
황궁 위에 도착한 아르티엔은 잠시 허공에 정지하며 손을 앞으로 쓱 뻗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에서 폭발적인 광채가 황궁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콰쾅!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폭발이 뒤따랐다. 잠시 후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지하 깊숙이까지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이 드러났다. 아르티엔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날아 들어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마왕이 있는 곳까지의 통로가 개척되어 버린 것이다.
아르티엔의 손에서 뻗어 나간 광채 속에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대마왕이 있는 곳까지의 통로를 개척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곧바로 대마왕을 향해 덮쳤었다. 하지만 그 광채는 대마왕에게 다다르지 못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에라도 막힌 듯 일정 거리 위에서 대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주위의 공간이 비틀릴 정도의 엄청난 대 폭발! 그 폭발로 인해 대마왕의 근처에는 거대한 공동(空洞)이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마왕은 아직까지도 호화롭게 만들어놓은 거대한 왕좌(王座)에 앉아 태연자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대마왕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곳을 향해 일격을 날린 아르티엔. 하지만 그는 그 정도의 공격에 대마왕이 피해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마왕의 주위 일정거리 안에 그 어떤 피해조차 없는 것을 보고 내심 신음성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한 위력의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방어막을 뚫지도 못한 것이다.
아르티엔은 싸늘한 표정으로 외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르티엔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대마왕은 그런 것쯤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그는 이미 눈앞의 이 골드 드래곤을 때려잡기라도 한 듯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큭큭큭, 이제야 나타나다니……. 하지만 예전처럼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걸?”
“웃기고 있군. 네놈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어. 이제 아예 네놈을 소멸시켜 주마.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말이야.”
“좋을 대로 해. 나는 대신 네 녀석의 머리통을 잘라 내 침실을 꾸며 놓도록 하지, 크흐흐흣.”
대마왕의 손에서 검붉은 광채가 뿜어져 나오자, 아르티엔 또한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마주 공격해 들어갔다. 그 둘의 몸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는 찬란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엄청난 위력을 내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둘이 부딪치는 순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대 폭발이 지하에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