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색 궤적을 그리며 빛과 같은 속도로 아르티엔이 지하로 사라지고 나서 잠시 후 지축을 울리는 듯한 대 폭발이 벌어졌다. 유성 소환 마법이 일으키는 폭발이 엄청나다고 하지만, 이건 그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력한 것처럼 보였다. 폭발 한 번에 크라레인이라는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엄청나게 거대한 구덩이만 남았으니까 말이다.
대 폭발의 충격파는 웬만한 마물들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상대하던 타이탄들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그랜드 마스터 정도 되는 막강한 검객들이 타고 있는 타이탄들은 강기로 재빨리 막아서인지 그래도 무사했지만, 제일 앞장서서 공격하던 아르곤의 타이탄들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그리고 폭발의 진원지인 황궁의 폐허 위에는 거대한 황금빛 광채와 함께 거대한 드래곤이 얼핏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은 특이한 모습을 한 존재가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후퇴하라!”
키에리가 부르짖듯 외치자 가장 뒤쪽에 쳐져 있던 미네르바가 거느리고 있는 지발틴 기사단이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몇 명 남지 않은 각국의 기사단들이 뒤따랐다. 다크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직격당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충격파를 안겨 줄 만큼 엄청난 폭발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열 개가 넘는다고 해도 절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연속해서 엄청난 폭발이 크라레인시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주위는 새하얀 빛줄기와 검붉은 화염이 만들어 내는 엄청난 충격파에 완전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마물들과 타이탄은 충격파에 휩쓸리며 마치 모래가 스러지듯 사라져 버렸고, 조금 전까지 수많은 마물들과 타이탄이 싸우던 전쟁터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공간마저 뒤틀릴 정도로 엄청난 공격을 주고받으며 신적인 존재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다크가 전속력으로 크라레인시에서 한참 도망쳐 나왔을 때, 그녀의 앞에 거대한 골드 드래곤이 날아 내려왔다. 순간적으로 그 드래곤이 아르티어스임을 알아본 다크가 크게 외쳤다.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버지가 마왕과 싸우고 계신 거다.>
“하, 할아버지가요?”
<아무래도 아버지가 제일 나중에 한 말이 걸리는구나. 뒷일은 키아드리아스에게 말해 뒀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너는 복수 따윈 절대 생각하지 말고 네가 살던 세상으로 빨리 돌아가거라. 정말 너를 사랑했단다.>
“아빠! 그, 그게 무슨 말…….”
다크는 아르티어스에게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아르티어스는 그곳에 없었다. 그녀가 재빨리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르티어스는 빛처럼 빠르게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폭발의 근원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대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마왕 정벌대는 충격파가 미치는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정신없이 도망쳤다. 하지만 거기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 폭발에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도망쳐 나온 마물들과 또다시 대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처음 폭발의 충격파로 가장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은 마물들 쪽이었다. 하지만 불칸이나 발록 등을 주축으로 하는 마족들은 대부분 살아남았고, 6천에 다다르던 엄청난 수의 마물들도 몇백 정도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일단 위험 범위 밖으로 대피하자마자 타이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크는 이동 마법을 사용하며 채찍이나 마법으로 자신을 공격하던 발록 세 마리를 상대로 엄청난 격전을 벌였다. 그녀가 간신히 그들 중의 한 마리를 해치웠을 때, 그녀의 앞에는 신장이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검붉은 색의 거대한 불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칸은 나타나자마자 다크를 향해 양손에서 검붉은 화염 덩어리를 뿜어내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크는 침착하게 마나를 잔뜩 주입한 방패로 막았지만 전혀 반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화염 마법 따위에 방패가 뚫릴 위험은 없었지만 주위에서 맴돌며 틈을 노려 채찍을 휘두르는 발록 두 마리의 공격에 겨우 몸을 빼내는 데만 급급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꽈꽈꽝.
한순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이 번쩍이더니 귀청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위력의 충격파가 밀려왔다. 위험을 직감한 다크는 충격파에 견디기 위해 순간적으로 그것이 밀려오는 방향을 향해 커다란 청기사의 방패를 들이밀며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강기의 막을 펼쳤다. 이번에 밀려온 충격파는 다크가 생명의 위험까지 느꼈을 정도로, 여태까지 밀려왔던 것들과는 그 파괴력에 있어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충격파가 휩쓸고 가 버린 전장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거대한 대지는 자욱한 먼지 구름이 뒤덮여 있었고,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충격파에 휩쓸려 수십 미터를 튕겨 나간 상태에서 쓰러진 채, 반쯤 땅에 파묻혀 있던 청기사가 튕기듯 일어섰다. 방패는 왼팔과 함께 녹아 내려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지만, 그 외의 부분은 비교적 피해가 없는 상태였다.
청기사는 피해가 없는 오른팔을 놀려 거대한 검을 들어 올리며 불시의 공격에 대비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다크의 우려와는 달리 그 어떤 것도 청기사를 공격해 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엄청난 위력의 불덩어리를 뿜어내며 청기사와 격전을 벌였던 마족들도 군데군데 쓰러져 있었지만, 그들은 청기사와 달리 아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기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방어 준비를 갖춘 채, 쓰러져 있는 마족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방금 전까지 자신과 동료들을 괴롭히고 있던 발록에게 다가간 청기사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확실히 저세상으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발록의 모습이 조금씩 투명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을 통한 이동이라면 빛과 함께 번쩍 사라지거나 나타나야 할 텐데, 전신이 마치 투명한 유리처럼 변하며 그 거대한 몸체가 서서히 먼지로 화해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청기사는 주위의 마족들을 살펴보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 엄청난 충격파 속에서도 형체가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던 마족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발록처럼 서서히 먼지로 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기사의 머리를 들어 올린 채, 다크는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마족들이 사라지고 난 후, 그들이 방금 전까지 쓰러져 있었던 땅은 마족의 형체를 따라 깊게 파여 있었다. 그것을 보면 방금 전에 자신이 본 것이 꿈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다크는 청기사에서 뛰어내려 불칸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묵직한 불칸의 무게에 눌려 있던 흙은 불칸의 형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다크가 멍청하게 마족들이 사라지고 난 후 파여 버린 깊은 곳을 쳐다보고 있을 때, 카렐의 골든 나이트가 옆으로 다가왔다. 군데군데 녹아 내려 흉물스럽게 변한 골든 나이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더니 카렐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마왕 크로네티오가 죽은 모양이군. 그가 소환한 모든 마족들이 마계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이겼다는 말이야?”
“할아버지? 그러면 방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폭발들이…, 아르티엔 님이 마왕하고 격전을 벌인 것이란 말인가?”
다크는 불현듯 생각난 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 봤다. 하얗고 작은 손,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 있는 가슴……. 크로네티오가 죽었다면 자신은 남자로 변해야 정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또 어떻게 된 건가? 혹시 이 격렬했던 싸움의 승자는 크로네티오라는 말인가?
“아냐, 크로네티오가 이긴 것 같아. 그렇지 않다면 내 몸이 아직도 그대로일 수는 없잖아.”
그 말에 카렐은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마족들이 마계로 돌아간 것을 보면 크로네티오가 죽은 게 틀림없어. 물론 진짜로 그가 죽었다는 것은 아니고, 강제 소환일 가능성이 크지. 네 몸에서 저주가 풀리지 않은 것은 크로네티오가 살아 있다는 말이야. 물론 이곳이 아닌 마계에 말이야.”
“마계라고?”
“그래, 마족들을 죽인다, 즉 소멸시킨다는 것은 아주 힘들어. 마계로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이 고작이지. 그들은 이쪽 세상으로 나오기 아주 힘들기에,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의의가 있는 거야. 그는 어쩌면 다시는 이리로 못 올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젠장, 이렇게 하나의 기회가 사라져 버렸군. 그건 그렇고 싸워서 이겼으면 이리로 돌아와야 할 텐데, 왜 소식이 없는 거지?”
다크는 저 멀리 보이는 엄청나게 큰 구덩이를 보며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말이 구덩이지,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그것은 이제 흔적도 없어진 크라레인시가 차지하고 있던 면적보다도 더 넓은 것 같았다. 아르티엔과 대마왕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격돌로 인한 결과였다.
그런 다크를 보며, 카렐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아르티어스를 기다리는 틈을 이용해서 다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아까 자네가 마수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간 다음 쓴 기술이 도대체 뭔가? 마수 1백여 마리를 한꺼번에 소멸시킬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지닌 기술 말일세.”
“아아, 그거? 아직 기술 이름을 정한 것은 아니야. 예전에 아주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던 선배와 한 번 겨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그런 기술을 쓰더라구. 그래서 나 나름대로 응용해서 한 번씩 써먹고 있는 거지.”
“정말 대단하더군. 그런데 전에 나하고 대결하면서 왜 그걸 쓰지 않았나? 아마, 단번에 승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건 너무 위험해서 아무한테나 쓸 수는 없거든. 너를 죽여야 되는 상황도 아닌데, 그런 강력한 기술을 쓸 이유가 없었지. 그건 그렇고, 너무 늦어.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나는 할아버지에게 가 볼 테니까, 너는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 좀 해 줘.”
“알았어.”
다크는 아르티엔과 대마왕의 격전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거대한 구덩이에 도착했을 때, 구덩이의 저 아래쪽에 황금빛 찬란한 드래곤 두 마리가 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크는 밑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의 우려대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드래곤 한 마리는 몸체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은 성장기를 마친 후 노화기에 들어가 있는 동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이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드래곤 본이라고 불리는 금속성 물질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아르티엔처럼 거의 수명을 다해가는 드래곤의 경우 그 몸은 드래곤 본과 마나의 덩어리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렇게도 심한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아르티엔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아르티어스가 정신없이 몸을 흔들자 아르티엔은 힘겹게 눈을 떴다.
<괜찮아요, 괜찮죠? 헤헤, 걱정했잖아요.>
말을 하는 아르티어스의 얼굴은 흘러내리는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미 아버지가 더 이상 살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는 것을 아르티어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헤헤, 괜찮다고 말 좀 해 봐요. 드래곤 역사상 최강이라는 아버지가 이따위 마왕 하나 때문에 누워 있다는 게 말도 안 되잖아요. 그렇죠, 아버지? 헤헤, 괜히 나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아버지, 제발 말 좀 해 봐요.>
아버지의 몸을 꽈악 안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몸과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르티엔은 힘겹게 눈을 떠 그의 아들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헉헉, 우, 울지 말고……. 너, 너를 지, 진정으로 사랑해…….>
겨우 말을 이어 가던 아르티엔은 끝내 말을 끝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순간 아르티어스는 지금껏 몰랐던 아버지의 마음이 한순간에 왈칵 가슴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의 짓궂은 음성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장난 그만 치고 눈 좀 떠 봐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는 말 잘 들을게요. 제발, 제발 눈 좀 떠 봐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르티어스의 음성은 어느덧 처절한 절규로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발!>
정신없이 아버지의 몸을 흔들며 울부짖던 아르티어스는 아버지의 몸에서 마나가 급속도로 흩어지는 것을 보며, 그가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오오!>
엄청난 기세로 퍼져 나가는 아르티어스의 절규. 지상의 모든 것을 복종시킨다는 드래곤 로어가 울려 퍼지자 아르티어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다크조차 눈을 찡그렸다. 있는 힘껏 기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다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두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오열하던 아르티어스는 조용히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대자연의 품에 돌려보내고 돌아오마.>
“아, 아빠…….”
다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르티어스는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거대한 몸집째 공간 이동해 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대자연의 품에 돌려보내기 위해서…….
아르티어스가 사라진 곳을 다크가 망연히 바라보며 서 있을 때, 카렐과 로체스터 공작이 달려왔다. 카렐은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렇지 못했다. 아르티엔과 대마왕의 격돌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에 휩쓸리며 생긴 상처인 듯, 옷의 이곳저곳에서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로체스터 공작은 그 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위대한 승리였소. 대마왕을 처치하는 데 이 정도의 피해로 끝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대의 도움 덕분이오. 아무튼 감사드리오.”
다크는 로체스터 공작의 치하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말했다.
“뭐, 내가 한 일도 아닌데……. 그런데 키에리는?”
로체스터 공작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중상을 입은 채, 지금 치료를 받고 있소.”
“중상이라고? 설마? 마지막에 닥친 충격파가 아무리 강력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가 중상을 당했다는 말인가?”
“그 혼자라면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는 강력한 충격파가 닥친다는 것을 눈치 챈 순간, 마물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던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소. 그가 총력을 다해서 폭넓은 방어막을 펼친 덕분에 많은 기사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소. 대신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겠어. 역시, 키에리는 대단한 무인이야. 내가 만난 몇 안 되는 진짜 무인……. 그는 그렇고, 미네르바는?”
로체스터 공작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전쟁에 승리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부하들을 이끌고 크루마로 돌아갔소. 크루마의 기사단은 가장 뒤쪽에 쳐져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피해도 가장 적었소. 그런 만큼 그대가 돌아와서 피해를 확인하기 전에 내빼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다크는 로체스터 공작이 지은 그 씁쓸한 표정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크 또한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짓이 영 얍삽하기 그지없단 말씀이야…….’
“그게 그녀한테는 어울리지. 하지만 그런 얄미운 짓을 하는데도 미워할 수는 없군.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크루마를 위해 최선을 다한 거니까 말이야.”
이때 카렐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카렐은 조심스럽게 다크의 표정을 살피면서 물었다. 카렐은 이 자리에 아르티엔과 아르티어스가 다크와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들이 없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자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나? 자네와 함께 계시는 줄 알았는데…….”
다크의 표정이 갑자기 우울하게 바뀌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르티엔과는 정이 상당히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사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르티엔에게 깊은 정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기에 그녀의 슬픔은 아주 컸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태까지 그가 받아온 교육 탓이었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하지만 아무리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상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아르티엔의 죽음과 아르티어스의 슬픔은 그녀의 감정을 뒤흔들어 놨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그래서 아버지가 그분의 시신을 대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가셨지.”
그 말에 로체스터 공작과 카렐은 일순 할 말을 잊었다. 사실 이번 승리도 다 아르티엔의 덕분이었다. 격돌의 충격파만으로 이렇게 어마어마한 구덩이가 파였을 정도로, 대마왕의 힘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 그를 인간의 힘으로 없앤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실 신의 능력과 대등하다는 대마왕을 인간이 없앤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다크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려고 하다가 그만 뒀다. 너무 슬플 때는 오히려 위로의 말 자체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체스터 공작은 하늘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처음 라나라는 수녀가 로체스터 공작에게 신탁을 가져왔을 때, 그녀는 영웅의 등장을 예고했다. 마왕을 없앨 수 있는…….
그녀는 영웅을 찾고자 신탁을 따라서 케락스시로 왔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해 로체스터 공작은 그 영웅이 다크라고 확신했었다. 그만큼 다크가 지닌 힘이 독보적이라고 할 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족들과의 전쟁을 치루면서 정작 대마왕과 격돌하여 그를 없앤 것은 아르티엔이었다.
‘맞아, 신탁이 가리켰던 영웅은 아르티엔이었어. 치레아 대공의 할아버지……. 그를 이 마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한 것이 다크였고……. 아아∼ 참으로 신의 뜻은 오묘하구나.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아시고, 그 모든 순서를 안배해 놓으신 것을 보면 말이야.’
수십 개의 유성이 직격한 듯 황폐해진 대지와 어마어마한 구덩이를 제외한다면 방금 전까지 벌어졌던 사투(死鬪)는 마치 거짓인 것처럼 느껴졌다. 원래 전투가 끝나고 나면 적의 시체들이 남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보니 뭔가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게 되는 것이다.
로체스터 공작의 지시에 따라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과 신관들, 그리고 예비로 데리고 왔던 기사들이 도착한 후 전투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의 구출과 치료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서 각 국가가 입은 전체적인 손실도 확실하게 집계되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앞장서서 만용을 부린 결과로 아르곤의 성기사단의 피해는 최악의 상태였다. 교황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성기사가 전사했던 것이다. 일부 살아남은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동료들이 마물들과의 접전에서 거의 학살당하다시피하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도망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료들의 시체와 타이탄의 잔해를 바라보며 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동료들을 내버리고 뒤로 도망친 자들의 말로일 것이다.
코린트의 코란 근위 기사단의 경우는 아르곤과 정반대였다. 그들 또한 아르곤의 기사단처럼 가장 앞쪽에서 마물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예상외로 피해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아르곤 제국과 비교했을 때 피해가 적다는 말이었지, 실상은 최악의 피해를 당한 상태였다.
적기사Ⅰ 세 대가 대파(大破)당했고, 적기사Ⅱ는 22대가 대파당했다. 그리고 심지어 키에리가 사용하던 게레리아(적기사Ⅲ)마저도 대파당한 상태였다. 타이탄의 경우 웬만한 피해는 자가 복구해 버리기에 대파를 당했다는 말은 곧 그 생명을 마쳤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고철이 된 타이탄이라도 시간과 노력만 들인다면 다시 재생산해 낼 수 있기에 타이탄이 몇 대가 대파당하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사들의 피해였다.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진 키에리를 비롯한 여덟 명이 중상을 당한 상태였다. 중상을 당했다고 해도 마법사나 신관을 통해서 치료를 하면 언젠가는 현역에 복귀시킬 수 있었기에 그건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웬만해서는 살려 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마법을 통한 치료술은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살려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총 37명의 특급 기사들 중에서 여덟 명이 전사했고, 행방불명도 열한 명이나 되는 형편이었다. 최후에 덮친 충격파는 타이탄마저도 갈가리 찢어 놓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런 만큼 행방불명은 곧 전사를 뜻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로체스터 공작이 제임스 후작에게서 피해 보고를 받으며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 루빈스키 대공 역시 그에 못지않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크라레스의 근위 기사단도 코란 근위 기사단 못지않은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를 이렇듯 절망적으로 빠뜨린 것은 근위 기사의 생존자 수가 겨우 네 명, 근위 기사단 소속의 청기사 전기(全機) 대파(大破)라는 치명적 피해가 아니었다. 다크와 자신의 청기사가 아직도 살아 있었고, 또 알카사스에 남겨 둔 기사단의 전력 또한 건재한 상태였다. 처음부터 그는 대마왕을 상대하면서 이 정도 피해는 각오하고 움직인 상태였기에 기사단원이 넷씩이나 생존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도가 저렇듯 완전히 흔적도 없이 가루가 되어 버릴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수도의 지하 어딘가에 황제 폐하가 계실 가능성이 컸다. 크라레스의 전 국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위대한 황제가…….
다크는 어마어마하게 푹 파여 버린 구덩이를 향해 절망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루빈스키 대공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기운을 내. 기사단은 다시 재건하면 될 거 아닌가?”
루빈스키는 힘 빠진 어조로 대답했다.
“기사단을 재건해서 뭘 한다는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는 이제 시신조차 건질 수 없게 되었는데 말이야. 흑흑흑……. 폐하! 소신의 불충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크흐흑흑흑!”
급기야 루빈스키는 쓰러지듯 주저앉아 오열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제야 황제가 저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다론의 보고가 떠오른 다크 또한 망연한 표정으로 구덩이를 바라봤다.
황제가 죽었다. 크라레스의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코린트에 억압받는 국민들을 생각해서 언제나 간소한 음식만을 먹으며 마음 아파 하던 인자했던 황제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 토지에르와 그가 모두 죽음으로써 다크와 크라레스 제국을 연결해 주던 끈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크의 관심사는 이제 황제의 죽음에서 딴 곳으로 돌려졌다.
‘연결? 무슨 연결? 그렇지! 이리로 쳐들어온 것은 마법서를 획득하고 마왕을 죽임으로써 저주에서 벗어나려던 목적이 아니었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크는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이런 빌어먹을! 마법서도 가루가 되어 버렸잖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