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2년 뒤
(크라레스 제국의 수도 재건)
마왕의 주력 부대 침공을 받았던 알카사스가 군사적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면, 크라레스는 수도였던 크라레인시가 전쟁의 주 무대가 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최강의 드래곤이었던 아르티엔이 격전을 벌이면서 수도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수도 재건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황제 또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다크는 루빈스키 대공에게 다음 대를 이을 황제가 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대신 그는 황제의 유일한 혈족인 아리아스 폰 그래지에트 황자를 후계자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선황제의 모습과 체취가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아리아스를 황제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결정이었다. 제1황위 계승자였던 엘리안 황자가 크루마에 세뇌를 당해 황위 계승권을 잃어버린 후, 새로이 황위 계승권을 이어받은 둘째인 아리아스가 아니라 황제의 먼 친척이었던 타일러와 데이비드였다. 타일러는 수도에 남아 있었기에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고, 데이비드는 아리아스와 함께 타이렌 제국으로 피난 가 있었기에 명백히 제1황위 계승권을 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도 심약한 탓에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던 아리아스를 다음 황제로 선택한 루빈스키의 결정은 조금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빈스키가 아리아스를 다음 황제로 결정했고, 또 다크가 그 결정에 찬성했다. 이제 크라레스에 단 둘만이 남아 있는 대공들이 아리아스를 밀고 있는데, 어떻게 데이비드가 자신에게 제1황위 계승권이 있다고 깝죽댈 수 있겠는가.
아리아스가 황제가 된 후, 크라레스는 두 명의 대공들을 주축으로 해서 눈부신 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치레아 대공의 도움이 아주 컸다. 물론 그녀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크라레스 제국은 파괴된 크라레인시에서 동쪽으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해야 했다. 그리고 그 수도를 방어할 만한 초대형 방어 마법진도 건설해야 했다. 황궁은 물론 도로, 병원, 공장 등등 별의별 것들을 모두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에 걸쳐 코린트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고, 마지막에는 대마왕 크로네티오와 전쟁을 벌이면서 수도까지 통째로 날아가 버린 크라레스에 그럴 만한 여력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크라레스는 겨우 2년 만에 수도 건설 작업을 대충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실 속사정을 알고 나면 전혀 기적이 아니었다.
수도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아르티엔의 레어에 쌓여 있던 엄청난 금은보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걸 꿀꺽하고 싶었던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다크의 부탁 때문에 피눈물을 삼키며 포기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황궁의 내부 장식을 담당할 우수한 장인은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솜씨 좋은 드워프들을 잡아 오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그리고 수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데는 수백 명의 우수한 마법사들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 또한 아르티어스 어르신 혼자서 간단히 발동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없었다면 2년 만에 수도를 어느 정도 재건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집무실은 작업 효율의 극대화라는 명목으로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만큼 넓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의 1백여 명에 가까운 관료들이 저마다 책상에 앉아서 꽁지가 빠지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아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책상에는 서류 더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기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정면에서는 아예 볼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르티어스의 얼굴을 언제든지 훔쳐볼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은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책상 옆에 또 다른 책상 하나를 놔두고 거기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단 말씀이야.”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편안하게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에서 포도주를 즐기며 ‘작업 감독’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책상에는 다론이 앉아서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호비트는 쥐어짜면 짤수록 일을 열심히 한다는 진리 말이지. 그걸 치레아에서 미리 깨달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이걸 모두 혼자서 처리해야 할 거 아냐? 역시 늙으나 젊으나 인생을 편안하게 즐기려면 배워야 한다니까.”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며, 황궁 앞의 거대한 정원에서부터 짙은 꽃향기를 실어 오고 있었다. 할 일도 많았지만, 스트레스를 풀 대상도 많았다. 수틀리면 한 번씩 쥐어짰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영 굼뜬 움직임을 보이던 호비트들도 이제는 눈빛까지 완전히 달라졌지 않은가? 잠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왠지 공포를 수반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바로 그때,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리며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레아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이, 이런!”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후다닥 일어섰다. 그런 다음 자신의 널찍한 책상으로 달려가더니 그곳에 앉아 있는 다론의 멱살을 다짜고짜 움켜잡았다.
“헉! 왜 그러십니까, 어르… 으아악!”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다급한 김에 다론을 창밖으로 집어 던진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서류를 검토하는 척했다.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다크가 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적인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다크는 쓱 들어오더니 아르티어스 옆에 서서 방글거리며 말했다.
“비교적 한가하신 것 같네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분개한 목소리로 따졌다.
“뭐야? 네 눈에는 내가 한가한 것처럼 보이냐? 이렇게 많은 서류 더미가 쌓여 있는데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열심히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크에게 그런 잔꾀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거 글씨체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아빠가 글씨를 이렇게 못 쓰지는 않잖아요.”
아르티어스가 당황해서 다크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기겁을 한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서류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얘야, 그건 그렇고, 이것 좀 봐 주겠냐? 하수도를 건설하는데 말이다. 이걸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떨까하는 안이 올라와 있거든. 내 생각에는 조금 돈이 많이 들더라도 배관을 곧바로 강에다가 연결할 것이 아니라, 그사이에 작은 늪지대를 만들고 그리로 연결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말이다. 그렇게 하면 강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아빠 좋을 대로 하세요.”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다급히 다크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다크는 간단하게 대답하면서 창가로 걸어갔다. 그런 다음 창밑을 바라봤다. 아르티어스 어르신의 집무실은 2층에 있었기에 아래쪽으로 아름답게 꽃이 핀 황궁의 주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창밑에는 큰 대자로 뻗어 있는 다론의 뒤통수도 보였다.
“저 녀석은 누구죠?”
“누, 누구 말이냐?”
아르티어스는 당황한 듯했지만, 곧이어 정색을 하고는 창가로 걸어갔다. 밑을 내려다보니 다론이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 아르티어스는 짐짓 화가 난 듯 외쳤다.
“아니, 저 녀석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저기 숨어서 낮잠을 퍼자고 있었군. 내 이놈을 당장…….”
“아빠가 집어 던진 거잖아요. 그리고 간이 붓지 않고서야 누가 감히 저기서 낮잠을 자겠어요?”
“…….”
아르티어스가 아무 말도 못하자, 다크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이제 아랫사람들 교육도 대충 끝나지 않았어요? 아빠가 없어도 모두들 열심히 일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글쎄, 하지만 내가 감독을 안 하면 모두들 꾀를 부리니까 하는 말이지.”
“꾀 안 부릴 거예요.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안 그래도 뭔가 약점을 잡힌 것 같았기에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물어봤다.
“뭔데?”
“저쪽에 앉아 있는 가스톤 있잖아요.”
다크는 저 뒤쪽에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스톤을 가리켰다.
“저놈을 빼달라고? 안 그래도 인력이 모자라는데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잘 교육시켜 놓은 녀석을 빼 가면 나보고 어떻게 일하라는 거냐?”
“안 되면 젊고 튼튼한 놈으로 한 명 더 뽑아 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저 가스톤에게 마법 교육 좀 시켜 주세요.”
아르티어스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하다가 곧이어 생각을 고쳐먹고 희번득이는 눈빛으로 가스톤을 쏘아보며 음흉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르티어스의 눈길을 슬쩍 훔쳐본 가스톤은 부르르 떨더니 재빨리 서류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제자? 아르티어스는 절대로 호비트를 제자 따위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가 아니라 공인된 스트레스 발산 대상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원래가 수련이라는 것은 약간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니까.
“마법 교육이라……. 흐흐흐, 알겠다. 누구 부탁인데 내가 거절하겠느냐? 단기간에 호비트들이 말하는 대마법사라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
그가 의외로 간단하게 승낙하자, 다크는 믿어지지 않는지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럴 수 있어요?”
“내가 누구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냐? 걱정 마라. 확실하게 교육시켜 주지.”
“그럼 부탁드려요. 저는 그동안 팔시온과 미디아의 검술 교육을 좀 시켜야겠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내가 직접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말이죠. 철저하게 단련시켜서 마스터 정도로 만들면 홀가분하게 여행이라도 돌아다닐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물론이지.”
아르티어스와 다크가 마음잡고 가스톤과 팔시온, 미디아를 교육시키기 시작한 지 5년이 흐르자, 다론은 여태까지 숨겨 놓고 있었던 마법책을 다크에게 건네줬다. 다론은 처음에는 조국의 안위를 생각하다 보니 다크에게 그 책을 건네줄 수가 없었다. 다크가 떠나 버린다면, 약체화된 크라레스를 코린트나 크루마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에르 대신 수석 궁정마법사가 된 다론은 다크에게 마법서를 건네주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에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 것도 참기 힘든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선뜻 그렇게 하지 못했다. 조국의 안위도 문제였지만, 대마왕과의 격전 때 수도가 통째로 파괴되면서 마법서는 소멸되었다고 다크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뒤늦게 그 책을 건네줬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마음을 모질게 먹고, 다크에게 마법서를 건네줬다. 제국도 안정기에 들어간 상태였고, 두 명의 마스터가 새로이 추가되었기에 조국의 미래는 이 애물단지들이 없어도 밝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에게 쥐어 터지는 것도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면, 그래도 한 번에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책을 건네준 그날 다크에게 밤새도록 두들겨 맞았지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응, 그동안 즐거웠어. 그런데 가스톤은?”
“이상하네. 어제 말했는데… 어, 저기 오는군.”
다크는 가스톤을 보면서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옛날부터 살이 별로 없었지만 5년간 못 본 사이 가스톤은 아예 미라처럼 깡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독기가 서린 듯 불을 뿜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다크는 가스톤의 교육을 아빠에게 부탁한 것이 잘한 일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 한동안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과 간단하게 작별을 나눈 후, 아르티어스는 마법서를 들여다보며 뭔가 궁리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음을 정한 듯 쓱쓱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문을 외우기에 앞서 옆에 서 있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이별이로구나, 아들아.”
아르티어스는 눈물 어린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다크를 바라봤다. 그 모습 하나하나까지도 머릿속에 기억해 두려는 듯. 그러다가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크를 와락 안으며 사정했다.
“제발 나도 같이 가자, 응? 아버지도 돌아가신 지금, 나한테는 너밖에 남아 있지 않잖니.”
다크는 자신을 안은 채 슬픔에 젖어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아르티어스의 말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자기 때문에 아르티엔이 죽은 것은 빼놓고라도, 여태껏 이렇게 정이 든 아르티어스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크는 손을 내밀며 다정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려요, 아빠.”
아르티어스의 얼굴이 눈물에 젖은 채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새하얀 빛이 번쩍이며 서서히 그들의 모습을 감춰 버렸다.
숨겨진 뒷이야기
아르티어스가 다크와 함께 그의 고향으로 돌아간 지 20년하고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이런 제기랄! 그 자식은 왜 공간 이동 좌표도 잘 모르는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사는 거야? 덕분에 물어물어 찾아오느라고 힘만 들었잖아.”
사실은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레어에 있는 엘프들을 족쳐서 공간 이동 좌표가 기록된 책을 강탈한 것이었다. 하지만 브로마네스로서는 아르티엔이 있을지도 모르는 대공 관저의 상공에 공간 이동할 배짱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치레아 공국의 수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나타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친구인 아르티어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설마 어르신이 그놈과 함께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한참을 수도 쪽으로 걸어가던 그는 수십 명의 말 탄 병사들의 행렬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행인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열심히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러 대고 있었다.
“흥! 무슨 개선식이라도 하는 모양이군. 호비트라는 것들은 도대체가 자기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이때 옆에서 개선식을 지켜보고 있던 행인들이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후작 각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야. 엄청나게 많은 오크들을 한번에 토벌하셨다고 하더군.”
“저 오우거같이 우람한 덩치를 봐. 그딴 오크들 따위 한주먹이면 끝장나지 않겠어? 하여튼 이 일대에 몬스터들이 씨가 마른 것도 다 이해가 가는 일이지.”
“이 사람아, 후작 각하만 굉장한 줄 아나? 저것 봐. 후작 부인의 덩치도 만만치 않지? 예전에는 여자의 탈을 쓴 오우거라고 불렸다고 하더라구. 저 모습만 척 봐도 그 무서운 마도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셨다는 게 이해가 간다구.”
행인들의 대화를 듣던 브로마네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도 전쟁? 웃기고 있네. 무슨 얼어 죽을 마도 전쟁이야. 발록이라도 한 마리 튀어 나왔나 보지?’
비웃음을 흘리며 발길을 돌리던 브로마네스는 병사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골드 드래곤 두 마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히벌쭉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브로마네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허 참, 그놈 취향 한번 희한한 놈일세. 자신을 저렇게 그려 놓고 싶을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던 브로마네스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니지, 어르신이 계신데 감히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저 둘 중에 하나는 어르신임이 분명한데 말이야.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아르티어스의 성격이 어디서 왔겠어?”
주변을 살피며 조심조심 수도 안으로 들어간 브로마네스는 감히 대공 관저에 들어갈 생각을 못하고 술집에서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냥 돌아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던 브로마네스는 이윽고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레어에서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엘프들을 쥐어박으며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르티엔을 기다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르티어스 있나?”
으리으리한 대공 관저에 도착한 브로마네스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문에 서 있는 병사에게 나직하게 물었다. 그 말에 병사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대를 살펴봤다. 주위를 기웃거리는 것이 꼭 범죄형인 듯했지만, 아무래도 저 우람한 몸매에 귀족적인 얼굴, 게다가 화려한 의상을 걸친 상대를 함부로 대하기는 힘들겠다고 결론지었다.
“아르티어스? 이름만 말해서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는 것이 확실하오.”
‘이런…, 저런 말단 병사 놈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어쩐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브로마네스는 한 가지 이름이 더 생각난 듯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 다크라는 사람은 있나? 다크 폰 치레아라는 계집 말이야.”
그 말에 병사의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감히 대공 전하께 계집이라는 상스러운 용어를 사용하다니…….
“이런 무엄한 놈! 네놈을 당장 체포하겠다.”
브로마네스는 황당했다. 이놈의 버릇없는 병사를 한주먹에 박살 내 버린다면 속이 다 시원하겠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다간 어쩌면 어르신에게 들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혹시나 여기에 어르신이 계실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힘든 것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린 브로마네스는 짐짓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릴 적부터 친구라서 무심결에 버릇처럼 말한 것뿐일세.”
“예? 설마…….”
잠시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하던 병사는 뭔가 생각이 난 듯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상관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잠시 후 기사 하나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 전하를 뵈려고 오셨습니까? 저는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케빈 패터슨이라고 합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대공 관저의 거대한 응접실에 안내된 브로마네스는 열심히 주위를 살피며 혹시라도 아르티엔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한쪽 문이 활짝 열리며 근엄한 모습의 늙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치레아 공국의 궁정을 맡고 있는 카르토 백작이라고 합니다. 다크 폰 치레아 대공 전하를 뵈러 오셨다구요?”
“그렇소. 아, 그리고 혹시 아르티어스라고 알고 있소?”
“아, 르, 티어스!”
잠시 생각하던 카르토 백작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급히 반문했다.
“호, 혹시 골드 드래곤이신 아르티어스 어르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토 백작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육중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브로마네스가 가만히 보니까 낮에 개선식에서 앞장서서 말을 타고 가던 바로 그 사내였다.
“저는 현재 치레아 공국의 임시 총독을 맡고 있는 팔시온 폰 엘마리노라고 합니다. 아르티어스 어르신과는 어떤 관계이신지?”
“친구라네.”
그 말에 팔시온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치, 친구란 말씀이십니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위, 위대한 분이시여.”
팔시온은 곧장 뒤로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카, 카르토 백작! 당장 최고급 포도주와 음식을 준비하라고 이르시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브로마네스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팔시온은 그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그 후 음식들이 줄줄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브로마네스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의 음성이 들려왔다.
“후작 부인께서 영애와 함께 드십니다.”
브로마네스가 보니 웬 오우거 찜 쪄 먹을 만큼 등발이 좋은 계집 둘이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들어왔다. 워낙 우람한 그녀들이었기에 한 발씩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짙게 화장을 한 그녀들의 얼굴은 너무 급하게 화장품을 처발랐는지 차마 보기조차 끔찍했다. 브로마네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나직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차라리 오우거를 보는 게 낫겠군. 이건 고문이야.”
“오, 위대하신 분이시여, 제 사랑하는 아내인 미디아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저희들의 귀염둥이인 다이아나라고 합니다.”
팔시온의 소개에 따라 오우거 두 마리가 인사를 건넸다. 브로마네스는 차마 그녀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술만 연신 들이켰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브로마네스는 그제야 기회를 잡고,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혹시 아르티어스는 어디에 있나?”
“아르티어스 어르신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거든. 그런데 설마 여기에 아르티엔 어르신이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
브로마네스가 못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자 팔시온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마도 전쟁 때 일을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내가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레어에 처박혀 있었거든.”
그 말에 팔시온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모르셨군요. 얘기를 하자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그때…….”
콰콰쾅!
갑자기 치레아 공국 대공 관저의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며 엄청난 괴성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브로마네스는 팔시온과 미디아, 그리고 그 오우거 같은 계집을 먼지 나게 두들겨 팬 후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아르티엔이 세상을 떠난 지금, 더 이상 자신을 핍박할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공간 이동을 하지 않고,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 채 자유롭게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른 것이다.
치레아의 대공 관저에서 그 거대한 몸집이 날아올랐기에 밑에 있던 수많은 호비트들이 자신을 보고 환성을 질러 대는 것이 보였다.
“응? 이곳은 다른 도시들과 달리 호비트들의 반응이 조금 특이하군. 드래곤을 보고 저렇게 좋아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야.”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드래곤은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다. 밑에 있는 호비트들이 수호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을 치며 구경하는 가운데, 브로마네스는 그 거대한 몸집으로 점점 더 하늘 높이 올라갔다.
얼마나 오랜만에 이렇듯 마음껏 날아 보는 것인가? 그놈의 포도주 아홉 병 때문에 무려 30년을 레어에서 벌 받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브로마네스였다.
미네르바의 가슴은 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흥분 때문에 폭발할 것만 같았다. 발밑으로 보이는 거대한 엘프리안시의 위용. 아직까지 주민들을 입주시키지 않았기에 빈집들로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과거 그 번영을 누렸던 엘프리안시의 전성기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대마법사 안피로스의 도시 방어 마법진의 설계도대로 외곽에 초대형 방어 마법진을 갖추는 데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금이 소모되었던가. 그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 새로운 황궁은 얼마나 웅장하고 멋진가. 모든 사람들이 서쪽 대륙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황궁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서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들여 건설한 것이다.
이제 일주일 후면 대 무도회를 시작으로 황제는 프루니아에서 이곳 엘프리안의 황궁으로 이주하게 된다. 황궁과 초대형 방어 마법진의 건설을 위해 그 어떤 시민들의 이주도 아직까지 허용되지 않았지만, 천도와 동시에 주민들의 이주도 시작될 것이다.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흥청거리는 엘프리안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엘프리안시의 한쪽에는 드넓은 공업 지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곳의 가장 핵심에는 타이탄 생산 공장이 들어설 것이다.
여태껏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예 기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다. 주변 국가들이 정예 기사들의 상당수를 마도 전쟁에서 잃었지만, 크루마는 아니었다. 이제 10년만 더 고생하면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할 것이다. 10년만……. 그것 때문에 강력한 군대와 기사단을 갖춘 서쪽 대륙 최강의 제국 크루마의 수도에 어울리게 엘프리안의 건설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참 상념에 잠기던 그녀는 밤하늘에 뭔가 이상한 그림자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시선을 그쪽으로 집중했다. 새?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도가 너무 높았다. 그리고 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컸다.
브로마네스는 오랜만에 찾은 자유를 만끽하며,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르티어스 때문에 이제는 사라져 버린 엘프리안 옆에 건설되어 있는 자신의 안락한 보금자리.
이제 더 이상 호비트들이 내는 신경 거슬리는 소음은 들려오지 않겠지. 그때 브로마네스는 보고야 말았다. 저 아래쪽으로 펼쳐져 있는 거대한 방어 마법진을 말이다. 그리고 그 방어 마법진의 중앙에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궁전. 아스라한 달밤에 보는 것이라서 그런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후후, 내가 처박혀 있는 동안에 건설한 것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또다시 슬금슬금 들볶아서 금은보화라든지, 최고급 포도주 따위를 마음껏 빼앗을 수 있겠는데?’
흐뭇한 마음으로 황궁을 바라보던 브로마네스의 눈에, 발코니에 나와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는 호비트 계집이 보였다. 그 계집을 보자마자 순간 브로마네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 저년은! 이런 망할 계집. 저년이 준 불량품 때문에 내가 30년씩이나 그 고생을 했는데. 딴 놈은 다 용서해도 저년만은 도저히, 아니 절·대·로 용서 못 해!’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대로 날씬해 보이던 브로마네스의 몸집이 한순간 돼지처럼 뚱뚱해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그의 입에서 폭발적인 붉은 광채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30년 동안 쌓이고, 쌓이고 또 쌓였던 수많은 울분과 함께.
『<묵향16 - 묵향의 귀환>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