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이어진 광활한 대평원은 여행자에게 단조롭기는 했지만 왠지 모를 자연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했다. 느긋하게 평원을 감상하며 가던 아르티어스는 맨 앞에서 안내를 하던 다쿠다가 갑자기 말을 세우자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다쿠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손을 눈가에 대고 햇빛을 가리며 서쪽에 걸려 있는 해를 슬쩍 바라본 다음 아르티어스에게 공손한 어조로 뭐라고 말했다.
“뭐라고 그래요?”
묵향이 묻자 아르티어스는 광활한 대평원을 감상하다 흥이 깨져서인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서 야영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군.”
“뭐, 급할 것도 없으니 그렇게 하라고 하시죠.”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말하자 다쿠다는 재빨리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근처에서 작은 나무를 베어다가 가지를 쳐낸 다음 네 개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기둥의 끝부분을 네 개의 나무막대로 연결한 후 밧줄로 단단하게 묶었다. 이렇게 뼈대를 세운 후 그 위에 나뭇잎이 잔뜩 붙어 있는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간단하게나마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완성했다.
날씨도 좋았고, 또 기온도 야영을 하기에 딱 알맞은 상태였기 때문인지 다쿠다는 양옆에 벽을 세우는 것은 생략하고 근처에서 풀을 베어다가 바닥에 푹신하게 깐 다음 그 위에 두툼한 가죽을 깔았다. 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어 놓은 후 다쿠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말 등에 매어놓은 짐 꾸러미 중 하나를 풀어 그 안에서 말린 고깃덩어리와 찐 쌀을 꺼냈다. 쌀을 찐 다음 잘 말려 놓은 것이었기에 그것 또한 딱딱하기는 고깃덩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다쿠다는 작은 나뭇가지를 모아 고깃덩이의 끝부분을 꿰어 적당히 불에 구워 아르티어스와 묵향에게 찐 쌀과 함께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권했다. 돌덩이만큼 딱딱한 찐 쌀과 불에 구은 고기가 그날 저녁 식사의 전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다쿠다가 만들어 놓은 임시 숙소에 자리를 잡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다쿠다는 말들을 묶여 놓은 곳 바로 옆에 두툼한 천을 깔고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대평원의 싱싱한 풀 내음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잠을 자기에는 좋았지만 묵향은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아르티어스는 일찌감치 꿈나라로 가 버렸는지 가늘게 코까지 골며 팔자 좋게 자고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서 있지 않은 묵향으로서는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쉽게 잠을 잘 수 없었다.
‘도대체 중원에는 언제나 갈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살아서 중원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군.’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잠꼬대를 하며 자신의 배 위로 다리를 올리자, 묵향은 슬며시 아르티어스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놓고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수많은 수련을 통해 단련된 그의 육체에 노숙 정도는 별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옆에서 낮게 코를 골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기도 하는 아르티어스가 그에게는 더욱 성가시게 느껴졌다. 임시 숙소를 벗어나자 투명한 대기를 뚫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묵향을 반기는 듯했다. 그리고 수많은 별들 사이로 반달이 은은한 달빛을 뿌리며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달이군.”
묵향은 무심결에 한마디 내뱉은 후 밤이슬을 피할 수 있을 만한 나무 그늘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발걸음이 멈칫 멈추었고, 묵향의 놀란 시선은 다시금 화들짝 밤하늘을 쫓아 달려갔다.
“호…, 혹시……?”
정신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묵향의 눈시울은 어느덧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중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커다란 달. 달의 생김새가 아주 비슷한 것 같아서 다시금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이었는데, 달만이 아니라 별자리마저도 중원의 것과 똑같았다. 언제나 북쪽을 밝혀 주는 북극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주위에 자리 잡은 수많은 별자리들도 언제나 자신들은 그곳에 있었다는 듯 미약한 존재감을 희미한 빛으로 던져 주고 있었다.
“여, 여기가 중원이야! 크하하하핫! 바로 여기라구! 바로 여기야!”
한밤중에 묵향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려 대자 나무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다쿠다는 깜짝 놀라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소리에 깼는지 아르티어스도 숙소 밖으로 머리만 내밀며 짜증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
“야, 한밤중에 뭐가 좋아서 웃고 난리야! 잠 좀 자자. 잠 좀!”
묵향은 한달음에 아르티어스에게 달려가서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제대로 찾아왔다구요. 여기가 중원이에요!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중원이라구요.”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뭐? 이 녀석이 드디어 미쳐 버렸나? 중원이라는 곳이 이런 황무지였다는 말이냐?”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 살던 세상임에는 틀림없어요. 달의 모양이 똑같고, 또 별자리들도 똑같다구요.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여기가 틀림없다니까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말에 순식간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묵향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역시 나는 위대해. 그 엄청난 시간과 공간과 차원의 미로에서 겨우 두 번만에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내다니……. 크하하하핫!”
한참 동안 묵향과 기쁨을 나누던 아르티어스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돌연 맥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젠장, 그나저나 하필이면 여기일 줄이야. 좀 더 돌아다니면서 즐겼어야 하는 건데……. 하기야, 나도 어디가 어딘 줄을 몰라 대충 찍은 좌표가 중원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한참 기뻐하던 묵향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잠시 후에 그가 한 말의 뜻을 깨닫고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따졌다.
“엥? 뭐라구요? ‘하필이면’이라니요. 그리고 ‘재수가 없다’구요? 전에는 차원의 미로 운운하며 제대로 찾아가는 것은 엄청 어렵다고 얘기했었잖아요. 혹시 아버지는 여태까지 이리저리 차원 이동 하는 것을 설마 놀러 다니고 있는 걸로 생각하신 거였어요?”
무심결에 속마음을 중얼거린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자 손사래까지 치며 적극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 무슨 소리냐? 너도 봤잖아, 내가 엄청나게 고생한거 말이다. 마법책을 숙지하고 수많은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내가 얼마나 머리를 굴려야 했는지. 단지 나는 혹시나 우리가 목적지를 찾지 못했을 때, 네가 너무 실망해할까 봐 그렇게 얘기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어떻게…….”
“험험, 뭐 사소한 말실수를 가지고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냐. 어찌 되었든 네가 말하던 중원에 왔잖니,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지, 뭐.”
잠시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던 묵향은 시간이 지나자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의심이 계속 들었다.
“그 외에도 또 뭐 숨기고 계신 거 아니에요?”
묵향이 의심스럽다는 듯 묻자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실토했다.
“차원이 제대로 맞아도 시간이 다를 수가 있지. 또 차원과 시간이 맞아도 공간이 다를 수도 있고 말이다. 공간이야 좀 다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찾아가면 그만이지만, 시간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가 있거든. 그러니까 운 좋게 네가 살던 차원과 공간이 맞는다 해도 시간대마저 똑같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네가 살던 세상에서 1백 년 전에 떨어질지, 아니면 1천 년 후에 떨어질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번 갔던 곳을 또 간다면 혹 모르겠지만……. 아무리 내가 드래곤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을 가는 것 아니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불안감을 조금 느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 강도는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르티어스라는 최후의 버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드래곤이면서 그것도 못해요? 언제나 전지전능을 외쳐 대면서……?”
묵향의 질책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무리 우리들 드래곤이라고 해도 시간을 지배하지는 못한단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퍼했겠느냐? 겨우 몇 시간 앞이었지만, 그 시간을 되돌려 놓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 물론 무리하게 방법을 찾아보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위험 부담은 너무나도 커. 몇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고 마법을 썼는데, 몇만 년 앞으로 가 버릴 수도 있고, 또 몇만 년 뒤로 갈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은 차원과 맞물려 있기에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영영 차원의 미아가 되어 버릴 우려도 있거든.”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잠시 불안해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중원이라고 기뻐할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을 잊지 못해 되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자신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돌아온 중원에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차라리 저쪽 차원에서 미네르바와 투닥거리며 사는 편이 훨씬 괜찮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과 허탈감에 휩싸였던 묵향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아르티어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온 것은 정말 운이 너무나도 좋아서 얻어진 결과라는 겁니까?”
“헛! 왜 그렇게 노려보냐? 사실 말하자면 원래 운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내 추리가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것도 많은 작용을 한 것이지.”
아르티어스의 입에서 추리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튀어나오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추리라니요? 어떤 추리요.”
“네가 살던 곳에는 마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없다고 했지?”
“그랬죠.”
“그런데 너는 차원 이동을 당했고 말이다.”
“예.”
아르티어스는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신이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천천히 묵향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쪽에서 누군가가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간 것일 거라고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살던 그 세상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설명이 되지 않거든. 그렇기에 그 정확한 단서를 파악하는 데 다론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던 마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거지. 일단 그것을 확보한 상태에서 정확한 계산만 할 수 있다면 내 마법으로도 네가 살던 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거다. 물론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이렇듯 두 번째는 훌륭하게 성공한 것이 아니겠냐? 하지만…, 내가 직접 이곳으로 와 본 것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완벽한 계산과 그에 따른 마나의 콘트롤까지 가능하겠냐? 약간의 오차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
묵향은 그제야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오차’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도. 떨리는 음성으로 묵향이 물었다.
“그 오차가 어느 정도일까요?”
“글쎄……. 공간상의 오차가 생길 여지도 있겠지만, 시간적인 오차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 하겠지. 나로서도 그 정도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더 이상은 모르겠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의 마음은 천근이라도 되는 양 무겁기만 했다. 답답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쉰 묵향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밝은 달이 둥실 떠 있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기쁘지가 않은 묵향이었다.
계속되는 사기 행각
대평원을 가로지른 아르티어스 일행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다른 촌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쿠다가 멀리 보이는 이동식 천막들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자, 그것을 다 듣고 난 아르티어스가 묵향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일대가 쑤젠 족장의 영토라고 하는군. 이 근처에 퍼져 있는 48개의 크고 작은 촌락들을 이끄는 녀석이래. 그리고 저기에 보이는 저것이 그 중 하나인 샤이푸 촌락이라는군. 오늘은 저기에서 묶는 것이 좋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러죠, 뭐.”
“그건 그렇고, 아들아.”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자 묵향은 흠칫 놀라며 뒤로 급히 물러섰다.
“왜 갑자기 그렇게 부르세요? 소름 돋치게 시리…….”
“사실 이 근처에서 너를 알아볼 호비트도 없고, 또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삶에 지장받을 놈도 없지 않냐? 그러니까…….”
뭔가를 바라는 듯 은근한 아르티어스의 말을 묵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도 말라는 듯 단숨에 거절했다.
“싫어욧!”
“에이, 그래도…….”
싫다고 했는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렸는지 아르티어스는 계속 묵향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묵향의 반응은 한마디로 웃기지 마라였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 망할 크로네티오의 저주에서 벗어나서 한시름 놨더니, 또 그 저주받을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겁니까? 안 해요! 아니, 절대로 못 해요.”
“허, 거∼참!”
잠시 난감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르티어스는 작전을 바꿨다. 아예 안면 몰수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반항하는 아들놈에게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불효막심한 놈! 호비트라는 것들은 효도라는 것도 모르냐? 애비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네가 잘될 줄 아느냐? 자고로 애비의 말을 안 듣는 놈치고, 그 뒤 끝이 좋았던 놈은 대륙 전체를 뒤져 봐도 단 한 놈도 찾을 수 없을 거다. 아이구, 아이구, 내가 세상 헛살았지. 어떻게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믿고 의지하며 그 험한 차원의 미로까지 따라나섰누. 내가 멍청한 놈이지…….”
서글픈 듯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가슴 한쪽이 약간 찔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매몰차게 거부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약해져 말끝이 떨리는 묵향이었다.
“그,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거예요.”
“그래, 너 잘났다! 이 망할 녀석아. 내 귀여운 천사를 단 한 번만 보여 달라는 데도 싫다니, 그래 너 혼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다음부터 아르티어스는 묵향과의 대화를 아예 끊어 버렸다. 아니,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샤이푸 촌락에 도착하자마자 다쿠다는 촌락 중앙에 위치한 조금 커 보이는 천막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네 명의 촌로들과 함께 돌아왔다.
촌로들은 아르티어스를 보자마자 경건한 표정으로 절을 하며 뭐라고 외쳐 댔고, 아르티어스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여 줬을 뿐이다. 그런 후 그들은 뭐라고 장시간 대화를 나눴는데, 그사이에 묵향이 한 일이라고는 멀뚱멀뚱 서서 아르티어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대화가 끝나자 촌로들은 한쪽 구석에 위치한 그래도 비교적 깨끗한 천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배불리 식사를 한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편안한 기분으로 쉬고 있을 때였다. 천막 밖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촌로 한 명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들어와 연신 절을 하며 아르티어스에게 뭔가를 간구하는 듯한 말을 계속하였다. 아르티어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촌로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촌락 한쪽 구석에 위치한 거대한 천막이었다. 급히 만든 흔적이 역력한 천막 안에는 수십 명의 환자가 드러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웃 촌락에까지 연락이 되어 근처에 있는 환자들이란 환자들은 모두 다 몰려온 것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환자들과 함께 이웃에 있는 촌락민들까지 모두 몰려왔는지 한산했던 작은 샤이푸 촌락은 이제 3백여 명의 원주인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촌락민들의 아르티어스에 대한 경외심은 그가 한 명, 한 명 환자를 치료하면서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들것에 실려 왔던 한 환자가 아르티어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빛 무리에 휩싸이자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고 극에 달했다. 수많은 촌락민들이 경외심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콧방귀를 뀌었지만, 어쨌건 아르티어스의 신을 사칭하는 행위는 그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환자 치료가 끝난 후 대규모 축제가 벌어졌다. 물론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는 촌민들이 3백여 명 정도 모인 만큼 말이 대규모지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봤을 때 그건 화려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촌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서 축제 준비를 했다.
촌민들은 축제에 쓰기 위해 튼튼해 보이는 백마(白馬) 한 마리를 잡았고, 황소 한 마리, 양 다섯 마리, 염소 다섯 마리, 개 열 마리를 잡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은 교통수단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황소는 농경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양은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따뜻한 가죽옷을 제공하는 원천이었고, 염소는 젖을 제공해 줬다. 또 개는 주인의 재산을 지키는 파수꾼이 아닌가. 닭, 오리 같은 식용으로 키우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물들을 잡아 요리함으로써 신께 대한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모든 제물(祭物)들은 신께 바치는 의식에 따라 우유를 먹였다. 우유는 흰색이기에 길상(吉祥)을 상징한다. 만약 제물이 우유 마시기를 한사코 거부한다면 그것은 제물이 상서롭지 못하다는 반증이기에 딴 것으로 바꾼다. 그런데 제물로 선택한 모든 동물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유를 말끔하게 다 마셔 버렸기에, 원주민들은 대단히 좋아했다. 일단 우유 먹이기가 끝나고 나자, 기원을 담은 주문을 외우며 제물의 이마와 등에 우유를 뿌린 다음 도살을 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여기저기에 불을 피워 그 고기들을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는 앞에 놓인 음식에 대해서 원주민들과 즐거운 듯이 얘기를 나누며 아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서 묵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고기들을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통역을 해 주지 않았기에, 무슨 고기인지 알 수도 없었을뿐더러 모든 고기들이 속은 거의 생고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고기들은 아예 생것으로 나왔다. 아르티어스에게 부탁해서 고기를 좀 더 익혀 달라고 말할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젠장!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이 더 낫겠다.’
홀가분하게 혼자 여행하는 것이 오히려 둘이 여행할 때보다 덜 외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묵향은 아르티어스와 결별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아르티어스의 말대로 시간적 오차가 의외로 클 수도 있었다. 사실 야만족들의 생활상을 보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과거로 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로서는 아르티어스의 통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또 다른 통역이 한 명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묵향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투덜거렸다.
“젠장, 계속 이러실 겁니까?”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슬그머니 묵향의 시선을 피하며, 옆에 있는 늙은 촌민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에 묵향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거칠게 말했다.
“이런 젠장! 내가 그런다고 재수 없게 그 계집으로 변할 줄 알아요? 빌어먹을!”
옆에 앉아 있는 촌로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묵향을 힐끔거리며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투덜거리자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경우 생고기도 아주 즐겨먹는 편이었지만, 아들놈은 육류에 대한 취향에 있어서 자신과 극을 달리기 때문이다.
동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욕구가 있다. 식욕과 수면에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욕이다. 성욕이야 자제력이 뛰어나다면 참아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식욕과 잠은 도무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며칠 버티기는 하겠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대로 되리라는 생각에 아르티어스는 가슴이 뿌듯해져 옴을 느꼈다.
그런데 슬그머니 미소 짓고 있던 아르티어스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묵향의 왼손이 갑자기 투명하리만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저게 무슨 마법이지?”
철을 화로에 넣고 충분히 풀무질을 해 주면 선홍색으로 아름답게 달아오른다. 그런데 어떻게 호비트의 손이 그렇게 달아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와중에 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상한 기운은 또 뭔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손에서는 사람을 억압하는 듯한 파괴적인 사이한 기운까지 함께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묵향 주위에 앉아 있던 촌락민들은 허겁지겁 묵향 주위에서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묵향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왼손으로 고깃덩이를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슬쩍 쓰다듬었을 뿐인데도, 고기의 겉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 버리는 것으로 보아 그 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잘되지 않자 묵향은 타 버린 고기의 겉 부분을 잘라낸 후 입속에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겉 부분은 다 탔잖아. 뭐, 하지만 탄 부분만 떼어내고 나니 그런대로 먹을 만은 하네. 그건 그렇고, 고기 구워먹기에 혈수마공(血手魔功)은 너무 파괴적인 것 같아.”
묵향의 투덜거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소 잡는 거대한 칼로 닭을 잡기가 힘들 듯, 혈수마공이 지닌 엄청난 양강(陽强)의 힘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어서 고깃덩이를 새까맣게 태우는 데는 제격일지 몰라도, 노릇노릇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까다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묵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열기를 발산하는 극양(極陽)의 무공은 혈수마공 하나밖에 배운 게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뭐라고 중얼거리며 잘 익은 부분만 잘라내어 먹고 있는 묵향을 바라보며 아르티어스는 오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내가 여기서 지면 드래곤이 아니다.’
아르티어스가 마음속 깊이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묵향은 인상을 찡그리며 탄 부분을 벗겨내고 먹을 만한 부위를 골라내려는지 고기를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 고기를 구우면서 공력을 조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묵향은 쉽게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후에야 묵향은 이쪽 차원에 와서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