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7화 (383/930)

다음 날 아침,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날씨는 맑았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하지만 어젯밤에 비해서 많이 잔잔해졌다는 것이지 결코 파도가 낮다고는 볼 수 없었다. 병사들은 밤새 대기하느라 한잠도 못 잤기에, 저마다 여기저기에 몸을 누이고 쉬고 있었다. 대족장 타르티는 그 와중에서도 선단의 피해를 보고 받고, 이것저것 지시를 내린 후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왔다.

대족장 타르티는 뭔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길로 묵향을 한번 지그시 바라보더니, 아르티어스와 뭐라고 한참 떠들어 댄 후 다시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돌아갔다.

“무, 무슨 일이에요?”

“아, 별거 아니다. 저 녀석 눈치는 빨라가지고…, 아무래도 천신인 네가 뱃멀미를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내 한소리해 줬지. 그건 그렇고 너한테는 좋은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묵향은 힘겹게 고개를 들며 물었다.

“뭔데요?”

“타르티의 말이 혹시 폭풍으로 발전할까 봐 노잡이들을 배치해 두고, 대비하고 있었는데 생각 외로 파도가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더구나. 이것도 다 천신의 덕분이라면서 신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떠들어 대더군.”

파도가 생각 외로 심하지 않았다는 말에 묵향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세상에, 폭풍이 친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구요? 진짜 폭풍이 치면 어느 정도라는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 네가 궁금해할 줄 알았다. 사실 이 정도 파도로 끝난다면 네가 너무 서운하지 않겠냐? 안 그래도 심심하다고 그 난리였는데……. 나도 예전에 배를 좀 타 봐서 아는데 안타깝게도 며칠 동안은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거야. 흠,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단다. 진짜 네가 바라는 폭풍은 그다음에 올 테니까 말이다. 아마 그때가 되면 이 배가 날아다닐걸?”

순간 묵향의 얼굴은 샛노랗게 질렸다. 슬쩍 그런 묵향의 얼굴을 본 아르티어스는 내심 키득거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재미는 있었냐? 그렇게 심심하다고 난리더니 아주 기분 좋았겠구나?”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던 묵향은 밤새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르티어스의 빈정거림에도 대꾸할 힘이 전혀 없었다.

“젠장, 자꾸 말 시키지 마…, 우엑!”

힘겹게 말을 하던 묵향은 갑자기 뱃전을 잡고 한바탕 토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꺽꺽거리던 묵향은 기진맥진해졌는지 아예 갑판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그런 묵향을 바라보는 아르티어스의 눈가에 살짝 통쾌하다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언제나 이런저런 이유로 휘둘리기만 했던 아르티어스였기에 오랜만에 보는 나약한 모습의 묵향에게 신선함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사실 그것도 다 아르티어스가 해적 생활을 할 때 뱃멀미로 죽은 호비트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기에 느끼는 기분이었지만…….

갑판에 누워서 헉헉거리던 묵향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르티어스를 바라봤다.

“아, 아빠! 힐링 마법 좀 걸어 줘요.”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물론 내심으로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뱃멀미는 상처가 아니기에 아무리 힐링 마법을 쓴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 그저 익숙해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단다.”

“그, 그러면 아빠가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날아가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호오∼, 역시 뱃멀미가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구나. 네가 나한테 그렇게까지 우는 소리를 다 하고 말이다. 좋다! 사랑하는 아들의 그 정도 부탁도 내가 못 들어주겠냐?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의외의 말에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뭔데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르티어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건, 앞으로 이 애비의 말을 절대로 거역하지 말 것.”

“저, 절대로요? 그, 그리고 무엇이건 말이죠?”

잠시 생각해 보던 묵향은 비록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옥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그까짓 조건쯤은 들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뱃멀미로 초죽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승낙을 하려고 고개를 들던 묵향은 왠지 전신에 소름이 쫘악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르티어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순간 분노가 울컥 치미는 묵향이었다.

“정말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치사하다니? 세상에 어디 대가 없는 부탁이 존재하든? 쯧쯧, 그러니 내가 너에게 평소에 누누이 말했잖니. 넌 좀 세상을 더 배워야 한다고 말이다.”

“빌어먹을, 아빠는 내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인지 알고나 있는 거예요? 웬만한 사람들이 이 정도 오래 살면 늙어 죽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구요. 그런데 배우기는 뭘 더 배워요? 젠장, 더럽고 치사해서! 이젠 됐어요!”

매몰차게 소리친 묵향은 그 후로도 계속 뱃멀미에 시달려야만 했다. 처음 뱃멀미를 할 때만 해도 묵향은 이런 고통도 다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자위하며, 명상이나 운기조식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뱃속이 뒤집히는 판국에 무슨 명상이고, 무슨 운기조식이라는 말인가? 결국은 뱃전에 뻗어서 힘없이 늘어져 있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참을 만했다. 하지만 뱃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낸 후, 노오란 위액까지 토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구역질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내장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르티어스가 이렇게 뱃멀미 심하게 하는 놈은 처음 봤다고 투덜거릴 정도였지만,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는 화를 낼 기력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아르티어스는 저 멀리 수평선 위에 아련히 보이는 희뿌연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묵향은 그 말을 듣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우웨에에엑! 우웩!”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 한바탕 토한 묵향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들어 아르티어스가 가리키는 부분을 힘없이 바라봤다. 며칠 사이에 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퀭하니 들어간 눈에, 핏기가 가신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그리고 두 뺨은 홀쭉하게 야위어져 있었다.

멀리 뭔지 모를 물체가 수평선 저편에 어슴프레 보이고, 갈매기 떼가 날아다니고는 있었지만 그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심한 구토에 머리가 완전히 텅 비어 버린 듯했고, 코끝에 느껴지는 짭짤한 소금기가 더욱 그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묵향은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정도의 기운조차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망할 놈의 배에서 내리고만 싶었다.

수평선에 육지가 그 모습을 보이자 각 배의 병사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모두들 아래쪽 선실에 놔 뒀던 무기들을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분으로 가지고 온 창과 화살 다발을 꺼내더니, 곧이어 각자가 완전 무장을 갖추었다.

병사들의 등에는 둥그렇게 생긴 두툼한 가죽 방패가 메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장은 모두 동일하지는 않고 세 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배에 타고 있는 병사들의 반 정도는 커다란 활과 화살을 준비해 뱃전으로 뛰어갔고, 그 외의 병사들 반은 2미터 정도 되는 창을,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커다란 칼을 들고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대족장 타르티가 조심스럽게 아르티어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뭔가 잘못을 했는지, 송구스런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뭐라고 말하자 아르티어스는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그러자 대족장은 환히 웃는 얼굴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상륙 준비를 하기 위해 선실로 내려갔다. 뱃전에 널브러져 있던 묵향이 불안한 표정으로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뭐, 뭐라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그런 묵향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응, 며칠 전 심한 파도 때문에 목적한 곳에서 많이 남쪽으로 밀려내려 왔다고 하길래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는 상태인데 그놈이 목적한 곳까지 갈 필요가 없을 것 같길래 말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묵향은 더 이상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죽을 것만 같이 고통스러운데 배를 타지만 않는다면 이곳이 어딘들 상관이 있겠는가?

“어디에 상륙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빨리 배에서 내리게 해 달라구요.”

“그러냐? 뭐 그럼 잘됐군.”

아르티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선상을 내려봤다.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약간이기는 하지만 왠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뱃멀미로 고생하는 묵향을 놀리는 재미도 배를 내리는 순간 끝나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무장이 다 갖춰지고 난 후, 선실 아래쪽에서 대족장이 당당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족장은 배가 요동치는 가운데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며 뱃전에 늘어선 병사들에게 뭔가 기나긴 연설을 시작했다. 연설하는 중간 중간에 탱게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천신께서 함께하시니 힘을 내라는 뭐 그런 식의 연설인 모양이었다.

묵향은 뱃멀미 때문에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태였기에 대족장의 연설이 단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는 아르티어스 대로 육지를 바라보며 수심에 잠겨 있었다. 만약 저기가 자신들이 찾던 중원이라면 아들과의 관계는 또다시 어떤 상황으로 변하게 될지 걱정도 되었고, 또 심하게 뱃멀미를 하고 있는 아들을 그동안 놀려먹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은근히 그 보복도 두려웠던 것이다.

대족장이 기나긴 연설을 하고 있는 동안 수평선 저 너머에 보이던 희뿌연 것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섬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쭉 뻗은 해안선을 갖춘 육지로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대족장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서도 갑판에 서서 점점 커져가는 육지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갑판에 서 있었던 것은 점점 커지는 육지를 바라보기 위함도 아니었고, 대족장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속을 뒤집어 놓는 뱃멀미 때문이었다. 밀폐된 선실로 내려가면 오히려 멀미가 더욱 심해진다는 것을 요 며칠간의 호된 경험으로 깨달았기에 갑판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대족장은 길고도 긴 연설을 끝낸 후 아르티어스를 향해 납죽 엎드리며 천신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병사들도 무기를 높이 쳐들며 대족장을 따라 천신의 이름을 외쳐 대기 시작했다.

“탱게르! 탱게르! 탱게르! ……”

하지만 그 외침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옆의 배에서도 탱게르를 외쳐 대기 시작했고, 또 그 옆의 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에는 선단에 승선하고 있는 모든 병사들이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탱게르를 소리 높여 외쳐 대고 있었다.

잔인한 해적들

모든 병사들이 탱게르를 외쳐 대며 소란을 떠는 동안 선단은 천천히 해안선을 따라서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해안에 마을이 보이자 그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겨우 50호(戶)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어촌을 목표로 1백여 척의 배가 돌진해 들어 간 것이다. 곧이어 앞서 가던 배의 선수 부분이 해안의 모래사장에 걸리자, 그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모두들 탱게르를 외치며 앞 다투어 배에서 뛰어내렸다. 일부는 모래사장 위에 뛰어 내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물 위로 뛰어 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옷이 물에 젖는 것 따위는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허리나 아니면 무릎까지 잠기는 바닷물을 박차고 괴성을 질러 대며 육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우와와와와!”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뱃전에서 보니, 육지에 있던 사람들은 선단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고 있는 모습이 또 가관이었다. 앞머리는 면도칼로 박박 밀어 버렸는지 반들반들 했고, 남은 머리카락을 괴상한 모양으로 위로 틀어 올려 상투를 만들어 놨다. 그리고 사내들은 웃통을 벗고 있었고, 아랫도리만을 꼭 어린아이 기저귀 차듯이 가리고 있는 놈도 있었다.

그들이 허둥대며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모습을 같잖다는 듯 바라보던 아르티어스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는 둥루젠보다 더 야만족들이 모여 사는 모양인데?”

그 말에 묵향은 창백한 안색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그 지독한 고생을 해서 겨우 도착한 곳이 중원이 아니었기에 그의 얼굴에는 짙은 허탈감이 어려 있었다.

“그런 거 같네요.”

“아무리 날씨가 좀 따뜻하다고 해도 하고 다니는 꼴이 저게 뭐냐? 사내놈들은 완전히 벌거벗다시피 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고 아무리 신과 함께 하고 있다지만 야만족들이라서 그런가? 거 상륙 한번 화끈하게 하는군. 이건 꼭 전쟁하러 온 것 같잖아.”

묵향은 아직도 속이 안 좋은지 아르티어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일단 좀 내리자구요. 도무지 속이 울렁거려서 못 살겠어요.”

아르티어스는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꾸나.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자, 빨리 내리자.”

묵향은 배에서 뛰어내려 모래사장에 착지하자 그제서야 살 만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는 있었지만, 거의 며칠 동안 생고생을 하고 난 후유증 탓인지 아직까지도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좀 살 만하지?”

“예, 신기하게도 육지에 올라선 것뿐인데, 멀미가 그치는 것 같군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신기해할 것도 없다. 원래 뱃멀미라는 것이 그래. 유독 멀미가 심해 고생하던 놈도 육지에 발만 올려놓으면 그 순간 멀미가 그치거든. 하지만 그 반대 경우인 희한한 놈들도 있었지.”

“반대라구요?”

“응, 배만 타면 펄펄 나는데, 육지에만 올라가면 맥을 못 추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꼭 뱃멀미 하듯이 뱃속도 울렁거린다나? 그걸 육지 멀미라고 하더군. 아주 오랜 시간 배를 탄 호비트들에게 일어나는 특이한 증상이지.”

묵향은 이제야 살 만한지 아르티어스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해 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하고 있는 꼴도 그렇지만, 여기저기 지어져 있는 집들도 중원식이 아니었다.

“젠장! 홀딱 다 벗고 사는 것을 보면 여기가 남만(南蠻)인가? 아니지.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돼. 중원의 서남쪽이 남만,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가면 색목인이 산다고 책에서 봤는데……. 어어? 그런데 저게 뭐죠? 여기는 평범한 마을이 아니었나요?”

묵향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해적들이 상륙하자 마을에서는 일대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해적선이 나타나는 그 순간, 요란한 타종 소리와 함께 노인들과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 쪽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일부 건장한 사내들도 보였다. 여기까지는 묵향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70여 명의 어촌민들이 무기를 들고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들어 놓은 진짜 무기를 가지고 말이다.

묵향은 순간 마교의 분타를 떠올렸다. 50여 호의 가옥에서 70여 명이 넘는 사내가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은, 마을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무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평범한 마을이 아니라 어딘가의 비밀 분타 같은 것이었나?”

묵향이 한눈에 척 봐도 잘 제련된 길고 늘씬하게 생긴 검을 가진 자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검보다는 창을 가지고 있었다. 어부들은 마을 입구에 장애물을 이용하여 수 명씩 짝을 이루어 대형을 유지하며 용맹스럽게 저항했다. 여기저기에서 피가 튀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겨우 수십 명이 수백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해적선단의 또 다른 배들이 하나 둘 해안가에 정박하기 시작하자 해적들의 수는 급속히 불어나고 있었다.

해적들이 무기를 들고 반항하는 어부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살육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해적들은 될 수 있으면 어부들을 생포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한참 전투 광경을 보고 있던 묵향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거 참, 괴상한 마을이네요.”

“별로 괴상할 것도 없다. 내가 태어난 곳의 호비트들도 저 정도의 무장을 하고 있었거든. 너도 봤잖냐? 치안 상태가 허술한 곳일수록 자체적으로 무장을 하는 것을 말이다. 그쪽에서는 보통 트롤이나 오크 같은 몬스터들 때문에 무장을 했었는데, 아마도 여기서는 저놈의 해적들 때문에 무장을 하는 거겠지.”

묵향은 아르티어스의 말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쉽게 납득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해적질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일단 마을의 저항을 분쇄한 후, 병사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과 그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며 먹을 것이나 사람들을 찾아내어 끌고 왔다.

“으아악!”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으며, 뭐라고 하는 말인 줄은 모르겠지만 심하게 발악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묵향은 그 비명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곧 알 수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위치였지만, 묵향의 시야에 들어 오는 곳에서 원주민 병사들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 몇 명이 높게 쌓인 짚단들을 뒤지다가 그곳에 숨은 사람들을 찾아냈다. 마을 처녀 하나가 서너 명의 아이들과 함께 숨어 있었던 것이다. 처녀는 한사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거친 병사들의 완력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병사는 먼저 처녀를 끌어내고,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도 끌어냈다. 그런 다음 병사들은 낄낄거리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짚더미 속에 숨어 있던 남은 아이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피가 튀었고, 아이들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아이들이 죽는 광경을 보고 기절해 버린 처녀와 아이 한 명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하게 해안가로 돌아왔다.

해안가에는 곧 열세 살 정도에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녀로 가득 찼다. 마을의 청년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과 창을 들고 거칠게 저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힌 후에는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의 우울한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공허하기만 했다.

묵향은 병사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다.

“이들이 해적인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옆에 서 있던 아르티어스도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쯧쯧, 하여튼 호비트란 것들은……. 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몬스터를 봤지만 자신들의 동족을 이토록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아마 호비트를 따를 것들이 없을걸!”

노예로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쳐 죽이며 길길이 날뛰는 병사들의 피에 굶주린 듯한 얼굴에서 지금까지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험한 파도를 헤치고 나온 뱃사람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숨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그러다가 발견한 사람이 힘없는 늙은이거나 아이들이면 가차 없이 죽여 버렸고, 건장한 젊은이라면 꽁꽁 묶어서 해변가 모래사장으로 끌고 왔다.

대족장 타르티는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함께 온 부하들과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뭐라고 외쳤다. 도중에 신을 뜻하는 ‘탱게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묵향은 이제 더 이상 대족장의 꼴도 보기 싫은 상태였다.

싸움을 하다 보면 상대를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적의 사기를 꺾기 위해 일부러 잔혹하게 적을 죽이기도 했다. 그 대상에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전장 근처에 살고 있는 일반 백성도 포함되었다.

옥영진 대장군의 휘하에서 몽고 침략전을 겪어 본 묵향은 패전한 쪽의 아녀자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늙어서 노예로 쓸 수 없는 자들을 죽여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아이들을 저렇게 처참하게 죽여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낄낄거리면서 말이다. 엎드려 있는 대족장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묵향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아르티어스는 황급히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허허헛, 저 녀석이 식사를 마련해 준다는구나. 뱃멀미도 심하게 했으니, 뭘 좀 먹어야 힘을 차릴 수 있을 것 아니냐?”

사실 대족장은 식사 준비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천신의 도우심으로 오늘 두둑한 수확을 올리게 되었음을 감사한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오늘의 수확을 축하할 겸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싶다며 허락을 구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묵향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식사 준비를 한다고 둘러 댄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잡아끌며 말했다.

“자,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저기 앉아서 기다리자꾸나.”

무려 4천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상륙한 후라 그런지, 작은 어촌 마을에 대한 노략질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어촌 마을의 해변가 모래사장에는 2백 명에 가까운 포로들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포로들만이 아니었다. 마을에서 약탈한 각종 물품들도 쌓이기 시작했다.

볏짚으로 만든 커다란 가마니들이 차곡차곡 쌓였는데, 그 속에는 대부분 쌀이 들어 있었다. 그 외에도 콩이나 수수, 보리 같은 곡식이 들어 있는 작은 자루도 있었지만, 말린 생선 같은 어촌에서 흔히 장만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닭이나 소, 개 같은 가축들도 병사들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은 일단 마을의 약탈이 끝나자 느긋하게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가축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굽거나 삶았다. 곡식 종류는 장기간 보관할 수 있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가축들은 보관하기도 어려웠고 배로 옮기기도 힘들었다. 사료를 공급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 배설물을 처리하기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곡식은 배로 실어 나르고, 가축은 눈에 띄는 대로 잡아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적개심을 가지고 병사들이 하고 있는 꼴을 노려보고 있던 묵향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바로 여기서 나타났다. 사로잡힌 포로들 중 사내들 일부는 기회가 오면 도망치려는 듯한 저항의 뜻을 조금씩이나마 내포하고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여인들의 그것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사로잡힌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순순히 병사들의 지시에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여인들은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요리까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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