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이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만약 잘못하면 묵향이 병사들을 몽땅 다 죽여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병사들의 숫자가 4천이라고는 하지만 묵향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저놈들을 다 죽여 버리도록 그냥 놔둘까? 하는 생각도 해 봤었다. 아마도 묵향은 매우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저런 쓰레기 같은 호비트들이라도 아직까지는 아르티어스에게 충분한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르티어스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울컥하는 마음에 4천 명이나 되는 같은 종족을 죽인 후, 묵향이 안아야 할 마음의 부담이었다.
“호비트들끼리 죽고, 죽이는 거다. 그런 것에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너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오늘 처음 본 호비트들이 아니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발끈하며 소리쳤다.
“뭐라고요? 저게 안 보입니까? 도대체가 저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저항하는 무리들과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고, 또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또 다 늙은 노인들을 죽이는 것까지도 이해해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저런 아이들까지 죽이다니……. 방금 전에도 봤잖아요. 이제 겨우 젖먹이인 애를 엄마의 품에서 뺏어내서는 목을 비틀어 버리는 광경을 말이에요. 도대체 저게 인간이 할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순간적으로 아르티어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흘렀다. 아르티어스도 그 광경을 묵향과 함께 봤지만, 아무런 느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천 년 전에 자신이 어렸을 때는 저것들이 하던 짓보다 더한 짓도 수없이 해 본 경험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아르티어스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상 최강의 생명체인 위대한 드래곤인 그의 시각으로 보자면 호비트와 개미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개미를 1백 마리 죽이는 것이나, 호비트를 1백 마리 죽이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묵향보다는 훨씬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병사들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잠시 머리를 굴린 후 묵향에게 말했다.
“저것도 다 저들의 삶의 방식이 아니겠냐? 네게는 네가 태어나고 자라며 배우고 또 만들어진 삶의 방식이 있듯이, 저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 거야. 보통 해적들은 아이들을 잘 죽이지 않지만, 그게 아이들이 가엾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냐? 만약 어린애를 노예로 팔아먹을 수 없다면 노인과 마찬가지로 쓸모없기는 마찬가지겠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또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잠시 생각해 봤다. 사실 자신의 경우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아주 색다른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철이 들면서 기억이 나는 것은 모두 다 마교에서 피를 토하며 했던 수련이 전부였다. 그다음은 암살자로서, 그리고 그다음은 검객으로서 키워졌다. 그런 특별한 삶 속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금까지 죽여 왔던가.
그가 여태껏 죽인 사람들이나, 또 앞으로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죽여야 될 사람들이 반드시 악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죽인 자들은 최소한 아이들이나 노약자와 같이 나약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모두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던 묵향은 뭔가를 생각했는지 곧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죽인 자들이 강력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강력했다는 말이지, 묵향에 비해 강력했다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묵향은 그런 이들을 파리 잡듯 몰살을 시킨 적도 있었다. 저 해적들이 노약자들을 학살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 자신과 저 해적들이 뭐가 다르단 말인가?
그리고 묵향이 여태까지 죽여 온 사람들이 모두 다 악인들이었나? 물론 만인으로부터 지탄을 받던 악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파의 거목이라는 뇌전검황을 벤 것도 자신이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많은 기사들도 자신의 검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묵향은 한숨을 푹 내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 말이 맞는 것 같네요. 난 저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죠.”
아르티어스가 왠지 허탈해하는 묵향을 다독거리고 있을 때, 사로잡힌 원주민 여인 몇 명이 음식물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병사들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병사들이 만들어서인지 요리들은 약탈한 가축들을 통구이 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원주민 여인들은 열심히 음식들을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앞에다가 차려놓은 후 황급히 물러났다.
음식이 다 차려지고 나자, 대족장 타르티가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는 예전에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성에 나타났을 때와 같이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뭔가 중얼중얼 읊어 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의식이 다 끝났는지 타르티는 납작 엎드려 아르티어스에게 경건한 표정으로 경배하고는 물러났다.
의식이 끝난 후, 아르티어스가 상 위에 놓여 있는 음식들을 집어먹기 시작하자 원주민 소녀 둘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와 묵향과 아르티어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 대족장 타르티가 시중을 들라고 시킨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따끈하게 데워 놓은 술을 잔에 따른다든지, 나름대로 열심히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출출했던 아르티어스는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술을 호쾌하게 마셔 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아르티어스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의 시중을 들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상대가 음식물은 물론이고 술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자신에게 뭔가 음탕스런 시선이라도 보내고 있었다면 혹 모르겠지만 상대는 다만 통째로 요리되어진 강아지 구이만을 슬픈 듯 멍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였다. 멀찍이서 그녀들의 행동을 힐끔거리고 있던 병사들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묵향에게 다가와 뭐라고 정중하게 말한 다음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소녀는 처음에는 잠시 반항하는 듯했지만, 이내 체념한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소녀가 끌려가고 난 후, 빈 자리는 또 다른 소녀에 의해 다시 채워졌다.
“아아악!”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에 묵향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그였지만, 그곳을 한 번 바라본 것만으로도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시중을 들고 있던 소녀가 목이 없는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피 묻은 도를 닦고 있는 병사가 보였고, 그의 발치에는 소녀의 목이 나뒹굴고 있었다.
“내 이놈들을!”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살기에 찬 눈빛으로 묵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아르티어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만약 저 녀석을 죽인다면, 그놈과 뭐가 다르냐? 그 소녀는 너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했기에 불성실의 죄를 물어 그자에게 죽임을 당한 거야. 그렇다면 너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 저 녀석을 무슨 이유로 죽이고자 하는 거냐? 잘못을 정확히 따진다면 그건 네 잘못이다. 네가 그녀의 시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묵향은 고개를 획 돌려 아르티어스를 바라보며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냉정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죠? 물론 제가 잘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런 묵향을 바라보며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저놈들은 아직 쓸모가 있거든.”
“어떤 쓸모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말을 묵향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자 할 수없다는 듯 차분히 설명을 해 주었다.
“만약 이곳이 우리가 생각한 중원이 아닐 때를 대비해서 다시 돌아갈 배편을 준비해 둘 필요가 있거든. 물론 지금 여기서 저놈들을 쓸어버리면 네 속이야 편하겠지만 그럼 돌아 갈 배편을 새로 구해야만 한단 말이야. 그러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네가 정 저놈들을 없애고 싶다면, 나중에 쓸모가 없어진 후에 해도 늦지는 않을 게다. 안 그러냐?”
“좋아요. 그럼 빨리 떠나자구요.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가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다구요.”
“아, 알겠다. 그놈의 성질하구는. 아차, 잠시만 기다리거라.”
아르티어스는 한쪽에서 따로 자신의 심복 부하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대족장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돌아왔다.
“그럼 가도록 하자꾸나.”
하지만 묵향은 꼼짝도 하지 않고 대족장과 그 부하들이 모여 있는 곳을 노려보며 살기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대요?”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구나. 아마 얼마 안 있으면 이곳 영지의 병사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맞서 싸워 봤자 피해만 생긴다고 하더군. 그래서 이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른 마을을 털며 시간을 보내다가 한 달쯤 후에 다시 이리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아르티어스의 말에 그제서야 묵향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흉흉한 눈빛으로 미루어 보아 한 달 뒤 대족장 타르티와 그의 부하들을 결코 가만 놔둘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요? 잘되었군요. 그럼 빨리 가죠.”
“그러자꾸나.”
묵향은 더 이상 그들의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서 경공술을 전개한 것이었기에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묵향의 몸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런 모습에 주위의 있던 병사들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하지만 정작 병사들보다 더 기겁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이미 달려가 버린 지도 모르고,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는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은은한 서기가 어린 그의 얼굴은 마치 신이 하강한 듯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르티어스는 주위를 한번 쭈욱 훑어본 후 준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듣거라!”
이미 주위에 있던 모든 둥루젠 병사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예, 탱게르!”
“한 달 후에 이곳으로 오거라! 만약 내가 그때까지 오지 않는다면 3일간 기다린 후 돌아가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나이다, 탱게르!”
병사들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아르티어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내심 묵향이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며 존경하기를 바랐던 그였지만, 결과는…….
“역시 뒷마무리는 깔끔…, 허걱! 어, 어디 갔지?”
당황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저 멀리 달려가고 있는 묵향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치 새가 날아가는 듯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그 모습은 순식간에 하나의 점으로 보일 정도로 작아져 갔다.
“제, 젠장. 더럽게 빠르구먼. 저런 놈이 무슨 호비트야? 괴물이지.”
아르티어스는 투덜거리며 급히 대족장이 선물한 금이 든 궤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들이 달려가고 있는 곳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마법을 이용하여 최대한 몸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또 근력 증가의 마법에다가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마법 등등 아르티어스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묵향의 뒤통수뿐이었다.
“같이 가자! 에구구구! 헥헥!”
서로 간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아르티어스의 음성은 아예 들리지도 않을 것만 같았다. 아르티어스는 아예 달려가기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서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도무지 달려서는 쫓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투덜거리며 천천히 하늘로 날아 오른 후 급격히 가속하여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젠장! 땅바닥을 달려가는 놈을 쫓아가기 위해 날아가야만 하다니…….”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사라진 후 한참이 지나자 대족장은 살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르티어스의 장엄한 모습에 놀라 얼마나 세게 땅바닥에 처박았는지 그의 얼굴은 온통 흙투성이였다.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주위를 살펴 본 타르티는 방금 전까지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던 천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자신감을 얻은 듯 조금 더 고개를 들어 눈알을 굴려 대며 이리저리 살펴봤다. 물론 그 모든 행동은 혹시나 천신께서 아직 남아 계시다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인 상태로 이뤄지고 있었다.
대족장은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천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모두 듣거라! 탱게르의 명을 받들어 나 타르티가 명령하노라!”
그 말에 아직도 겁에 질려 있던 병사들은 목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탱게르! 탱게르! 탱게르!”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로 천신의 이름을 외쳐 대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타르티의 가슴은 야망으로 가득히 부풀어 올랐다.
‘흐흐흐, 저 두 분의 탱게르만 잘 모신다면 둥루젠의 일통만이 아니라 천하를 제패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야. 드디어 내 평생의 숙원인 진을 깨부수고 둥루젠의 천하를 열 때가 왔음이다. 크하하하핫.’
한참을 호탕하게 웃던 타르티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병사들의 외침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자, 타르티는 근엄한 음성으로 외쳤다.
“자, 빨리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라. 탱게르께 선택받은 우리들 앞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우와와와와! 탱게르! 탱게르!”
탱게르를 연호하는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것을 보던 타르티는 웅심이 치솟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탱게르와 함께 하는 우리를 막을 자가 감히 그 누가 있겠는가! 크하하하핫!”
연신 호쾌하게 웃고 있는 타르티의 눈에는 벌써 천하를 호령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던 것이다. 한참 동안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타르티는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아르티어스 앞에만 서면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이 왜소해지는 타르티였지만 지금은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대족장의 풍모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해리바, 네게 선단을 통솔할 권한을 주겠다. 내가 본대를 이끌고 진격하면, 너는 해안선을 타고 본대를 따라 오도록 해라. 사로잡은 노예들과 식량을 배로 운반하고 출항 준비를 서두르도록 해라.”
“옛,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행로를 잡으시겠습니까?”
타르티는 잠시 생각에 잠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한 달 동안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일단 출발 준비를 시킨 것이다. 하지만 파도에 밀려 예상했던 목적지에서 많이 남하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 계획했던 행로는 지금으로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보통 대규모로 출정을 하게 되면 내륙지방 깊숙이까지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통상의 경우 노략질은 해안을 따라가며 진행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만 선단과 함께 이동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로잡은 노예나 약탈한 것들을 배에 적재하여 이동 속도를 높일 수도 있었고, 대규모의 적군이 나타나면 도망치기에도 편했다. 아무리 적군이 대군으로 몰려온다 하더라도 정찰만 확실히 하여 미리 포착할 수만 있다면 잽싸게 배에 탄 후에 대해(大海)로 빠져나가 버리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가야 좀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남쪽으로 내려갈까……. 허, 참. 고민되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주술사도 데려오는 건데 잘못했어.’
이렇게 택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 주술사에게 천신의 뜻이 어떤지 물어본 후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지금 주술사도 없고, 또 천신도 없다. 천신이 워낙 갑작스레 떠나는 바람에 어디로 행보를 잡으면 될 것인지 물어볼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타르티는 잠시 고민하더니 해리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해리바! 자네는 어디로 진격했으면 좋겠나?”
타르티의 질문에 해리바는 잠시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이렇게 민감한 사안을 일개 부하에 불과한 자신이 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사실 해적질이라는 것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소득과 피해가 결정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아니던가. 만약 자신이 가자고 한 방향에 적의 대군이 기다리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보통 이런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주술사에게 조언을 청하는 것이 뒤탈이 없었다. 그렇기에 해리바는 잠시 고민한 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타르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대한, 점을 쳐 탱게르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해리바의 말이 그럴 듯한지 대족장 타르티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했다. 그러자 해리바는 곧 부하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애 밴 여자 하나를 끌고 오너라.”
“옛.”
몇 명의 부하들이 포로들 중에서 임산부를 찾아내기 위해 떠난 후, 해리바는 은근한 어조로 타르티에게 말했다.
“배를 갈라서 아들이 나오면 북진, 딸이 나오면 남하…, 어떻습니까?”
대족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 하더니, 곧이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탱게르께 둘 중 하나를 물어보는 게 꽤 좋은 방법인 듯했기 때문이다.
“어∼, 그거 좋은 생각이군. 아주 좋은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