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드렁한 태도로 병사의 말을 한참 듣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저쪽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초대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쉬어요? 어디서요?”
묵향의 질문에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글쎄다, 자신들의 영지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꽤 높은 놈이 살고 있는 곳이겠지, 뭐.”
“아빠 생각은 어떤데요?”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뭘 어떻게 해? 한 며칠 쉬어가 달라고 저렇게 사정을 하는데, 가서 푹 쉬어 주면 되는 거지.”
너무나도 태평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실 아무리 5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인 아르티어스에게는 눈에도 차지 않았던 것이다.
“킥킥, 아빠는 저 녀석들이 좋은 뜻으로 우리를 초청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포위하고 서 있는 저 병사들을 보시라구요.”
묵향이 슬쩍 주위에 서 있는 병사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아르티어스도 병사들을 한차례 훑어봤다.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은 무기를 겨눠 들고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병사들이 여기에 도착해 포위망을 구축한 뒤, 상관으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생긴 결과였다.
“쩝, 뭐 그래 봤자 별일 있겠냐? 위대한 드래곤이신 내가 있는데 말이다.”
“아빠는 몸속에 쌓인 마나가 거의 고갈됐다면서요. 아마 저놈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시답잖은 마법만 가지고는 곤란할 텐데……?”
계속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묵향을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힐끗 째려본 아르티어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에잇, 그래! 내 말을 정정하마. 호비트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 같은 내 아들이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거 욕이에요? 칭찬이에요?”
아르티어스는 별걸 다 따진다는 듯 내심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묵향에게 트집을 잡히고 싶지 않은지 표정 관리를 확실히 했다.
“물론 칭찬이지. 어차피 정보를 얻으려면 높은 놈을 만나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저쪽에서 초청을 해 주니 오히려 잘된 일이지.”
묵향은 왠지 미심쩍다는 듯 아르티어스를 꼬나보았지만 더 이상 말꼬리를 잡기도 그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러네요.”
“저들이 좋다고 했습니다.”
병사가 다가와 보고를 하자 고다마는 뒤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그래? 잘된 일이군. 오키타.”
“옛!”
“곧장 성으로 전령을 보내라. 수상한 야만인을 발견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시를 하던 고다마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자신이 직접 저들을 데리고 영주에게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저들의 목을 벤다든지 한다면 자신이 직접 하고 싶었다. 아니면 최소한 구경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쩌면 저렇게도 피부가 하얗고 매끄럽지? 저 가느다란 목을 자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리고 저 야만인들도 목을 자르면 붉은 피가 흘러나올까? 어쩌면 피가 파란색일지도 몰라. 젠장, 이 좋은 기회를 해적 때문에 날리다니…….’
고다마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후, 말을 이었다.
“오키타,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저들을 성까지 데려가 주겠나?”
“옛.”
고다마는 오키타에게 20명의 병사를 붙여 준 뒤,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둘러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소속된 미우다 영지의 동쪽에 위치한 고다이 영지에 해적들이 대규모로 상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해적들의 상륙 지점이 미우다 영지에서 2백 리가량 떨어져 있었기에 현재로서는 급박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언제 미우다 영지 쪽으로 방향을 잡아 노략질을 하러 쳐들어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고다마는 영주의 명령으로 동쪽 해안에 구축된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문도 못 여는 바보 드래곤
사내는 총총히 걸음을 옮겨, 무사들이 서 있는 앞에 도착했다. 무사들은 그 사내를 이내 알아보고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자인 듯한 무사가 앞으로 나서며 사내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메지마 상. 영주님께서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사의 목소리는 아주 정중했다. 사메지마라는 사내의 직책은 민정담당관이라는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었고, 그가 지닌 미우다 영지 내에서의 위치는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그는 후지와라 영주의 가장 총애를 받는 가신들 중의 한 명이었고, 언제 어디서나 영주와 단독 면담을 청할 수 있는 세 명의 고문들 중 한 명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이 정보를 총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사는 뒤로 돌아 서며 문 앞에서 크게 외쳤다.
“사메지마 상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낮지만 아주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고 해라.”
“옛.”
무사는 얇은 창호지로 도배된 문을 드르륵 열어 주며 사메지마를 향해 말했다.
“어서 드시지요.”
가볍게 무사에게 예의를 표한 사메지마는 실내로 들어서다 흠칫 했다. 영주의 오른쪽 옆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무사를 봤기 때문이다. 이제 서서히 백발이 늘기 시작하는 이 깐깐해 보이는 얼굴의 무사는 현재 미우다 영지의 모든 군사를 총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장군이었다. 그는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잔인했지만 아주 뛰어난 장군이었다.
사메지마가 그를 보고 흠칫 놀랐던 것은, 그는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해적들이 고다이 영지에 대규모로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한 것이 오늘 정오쯤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후지와라 영주는 타다마사 장군에게 동쪽 해안선을 지키라고 급히 파견했다.
그리고 미우다 영지의 전 지역에서 동쪽 해안선을 보강하기 위해 지원군이 계속 보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들을 총 지휘할 타다마사 장군이 왜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잠시 당혹스러워하는 사메지마의 귀에 후지와라 영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주 급박한 전갈이 날아왔기 때문일세.”
급히 정신을 차린 사메지마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후지와라 영주에게 예의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예? 급박한 전갈이라니요.”
“고다이 영지로 군사들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일세.”
“그,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해적들을 토벌하라는 것입니까?”
사메지마의 물음에 후지와라 영주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해 주었다.
“토벌이라기보다는 고다이 영지에서 쫓아내라는 것이지. 상황이 급박하니 당장 군사를 파견해 달라는 거야.”
후지와라 영주에게 이런 식의 압력을 가해 올 수 있는 것은 미우다 영지 남쪽에 위치한 겐페이 영지를 다스리는 미나모토 다카우지 영주뿐이었다. 미나모토는 3만에 가까운 정예 병력을 가진 겐페이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였다. 그리고 미나모토 대영주는 후지와라 영주의 첫째 아들을 볼모로 잡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 결혼까지 시켜 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돈지간의 맹방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나모토 대영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속국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메지마는 군사를 총지휘할 타다마사 장군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후지와라 영주는 그 전갈을 받자마자, 타다마사 장군에게 급히 돌아오라고 전령을 보냈음이 틀림없었다.
“간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해적들의 수는 거의 5천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또한 대선단을 함께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병사들만으로는 그들과 정면충돌을 하는 것은 너무 피해가 클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메지마의 말에 후지와라 영주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것을 난들 모르는 줄 아는가? 그러니까 자네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닌가.”
후지와라 영주의 신경질적인 질책에 사메지마는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간자들이 보고한 해적들의 진격 방향과 미우다 영지의 군사력 등을 따져 본 사메지마는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모내기철입니다. 그런 만큼 병사들을 소집하는 것에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핑계를 대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제가 이리로 오기 전에 들은 보고로는, 해적들은 지금 해안선을 따라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진격 속도로 미뤄 봤을 때, 그들은 늦어도 일주일 이내에 고다이 영지를 빠져나갈 것 같습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본 후 입을 열었다.
“흐흠, 좋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모내기만 가지고는 명분이 너무 약해. 병사들을 소집하여 영지 접경 지역까지 보내는데 하루, 그리고 해적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 이틀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모내기를 핑계로 댄다고 해 봐야 하루 정도를 더 얻어 낼 수 있을 뿐이야.”
사메지마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예, 바로 그 하루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영주님의 말씀대로 해적들이 도착하는 데까지 4일이 걸릴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 해적들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4일 동안 해적들은 이동할 테고,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최소한 하루, 어쩌면 2일 동안 행군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적들을 따라잡았을 때, 해적들은 거의 고다이 영지를 빠져나가기 직전쯤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군.”
“과연, 그렇겠군.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의 시간이라는 것은 엄청난 도움이 되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야모토 대영주는 그들을 격퇴할 것을 명령했어. 아무리 빠져나가기 직전의 적이라고 해도, 싸워야 한단 말일세.”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그때 타다마사 장군님께서는 단독으로 해적을 공격하지 마시고, 어떻게 해서든 고다이 영지의 군사들과 합동 작전을 벌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고다이 영지측에서는 쉽게 해적들과 전투를 벌일 엄두를 내질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5천이나 되는 해적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면 당연히 자신들의 군사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니까 말입니다.”
기가 막힌 계책이라는 듯 후지와라 영주는 무릎을 탁 치며 기뻐했다.
“오호라, 그러니까 선택권을 그쪽에 주자는 말이군? 그렇게 되면 그들은 거의 다 빠져나간 해적들을 때려잡자고 피해를 입느니 그냥 놔두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겠지?”
“예, 바로 그것입니다. 주군.”
후지와라 영주는 타다마사 장군에게로 시선을 돌려 명령을 내렸다.
“자네에게 병력 5천을 주겠다.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전투가 붙는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게.”
후지와라 영주가 동원 가능한 병력은 1만 2천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5천씩이나 되는 병력을 맡긴다는 것은 엄청난 신뢰의 표시였다. 타다마사 장군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힘차게 대답했다.
“옛, 주군!”
허리에 길고 짧은 두 개의 검을 찬 타다마사 장군이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 사메지마는 목소리를 낮추어 후지와라 영주에게 새로운 정보를 보고했다.
“주군, 방금 전에 전령이 아주 재미있는 보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뭔가?”
사메지마는 생각할수록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옛, 동쪽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던 고다마 장군이 이방인 남녀 둘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방인들이라고?”
“옛, 피부색이 새하얗고, 머리색도 색다른 이방인들이라고 합니다. 고다마 장군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한사코 여행 중이었다고 주장한답니다. 어쩌면 대국이나 혹은 다른 곳에서 온 간자(間者)인지도 모르지요.”
후지와라 영주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사메지마에게 물었다.
“흐음, 여행 중이라고?”
“옛, 주군. 전령에게 물어 보니 행색으로 보아 남자는 꽤 지체가 높은 것 같았고, 함께 있는 소녀는 하는 행동으로 보아 부인인지 하녀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어쨌건 그들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후쿠오카밖에 없을 테니, 일단 후쿠오카에 잠입해 있는 간자에게 그들의 인상착의를 알리고 조사해 보라고 일렀습니다. 아마 조만간에 연락이 올 것입니다.”
6살짜리 아이를 신부로 맞아들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소녀라고 한다면 물어보기 전에는 부인인지 하녀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메지마의 빠른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지 후지와라 영주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럼 확실한 정보가 나올 때까지 귀빈으로서 잘 대접하도록 해라. 하지만 감시는 철저히 하도록!”
“옛, 아주 감시가 용이한 방으로 배정을 해 놨으니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혹시 이방인 소녀가 하녀일 경우를 대비하여 따로 머물 방도 마련하라 일러두었습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용의주도한 사메지마의 조치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궁금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주도 이방인은 여태껏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 이방인이라…….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만나 볼까? 아주 기대가 되는군.”
사메지마는 영주의 말에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들 중의 한 명이 화염의 술을 쓴다고 합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사메지마에게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화염의 술이라고?”
“옛, 고도의 수련을 쌓은 닌자들이나 쓰는 술법이기에 주군께서 친히 그들을 만나신다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뭔가 생각해 보던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자네는 정보나 좀 더 모아 보도록!”
“옛,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