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오, 그런 일이 있었군.”
혼자서 중얼거리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목욕을 해야겠구나.”
“왜요?”
“너하고 내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주장하는 개 코를 떼다 붙인 듯한 놈이 있어서 말이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러면서 묵향은 자신의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본 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자 벌컥 화를 냈다.
“어떤 미친놈이 그딴 소리를 합니까?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고요.”
“글쎄 그런 놈이 있다. 저 소녀를 생각해서 목욕을 해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묵향은 하나코를 힐끗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목욕하는 것 하고 저 계집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아예 그놈의 잘못된 코를 잘라 버리는 것이 손쉽고 빠르죠.”
“상관이 있지. 네가 목욕 안 하면 저 소녀의 목이 잘리거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묵향은 순간 얼마 전의 일이 기억났다. 아르티어스의 파이어 볼에 맞고 옷에 불이 붙었던 병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상관은 불을 꺼서 부하를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단칼에 병사의 목을 날려 버렸다.
부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일단 불을 끈 후에 부하의 상태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병사의 화상은 생각만큼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부하의 고통을 덜어 주자는 것이 아니라, 아르티어스를 제압하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처벌을 한 것일 것이다.
“여기는 목 자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놈들이 사는 곳인 모양이군요.”
“유감스럽게도 그게 사실이야.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봤지만, 이렇게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사는 호비트들은 이곳이 처음이다. 자, 목욕이나 하러 가자. 하녀의 목을 자르겠다고 선언한 그녀석의 목을 잘라 버린다면 우리도 그놈과 다를 게 없어지는 거잖니. 차라리 그냥 목욕 한번 해 주는 게 속 편하지.”
묵향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그러네요.”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하나코의 안내를 받아 목욕탕으로 갔다. 묵향은 하나코의 뒤를 따라가며 대단히 신기하다는 듯, 종종거리며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걸음걸이가 왜 저래요? 그냥 쭉 앞으로 걸으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종종걸음으로 걷는 거죠? 뒤따라가려니까 정말 속 터져 죽겠네.”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는 묵향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었다.
“옷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걸을 수밖에 없는 거다.”
“옷이 어때서요?”
“여기서 여자들이 입는 옷은 두 다리가 움직일 공간이 아주 적어. 그래서 저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거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묵향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저따위 옷을 입고 살 수가 있죠? 나 같으면 답답해서 걸을 때마다 짜증이 날 텐데.”
“뭐, 습관이 되면 괜찮지 않겠냐? 이곳에는 여자가 입는 옷은 저런 것밖에 없으니까 선택의 여지도 없겠지만 말이다.”
아르티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코의 옷을 가리킨 묵향은 다짐하듯 말했다.
“저따위 옷을 나에게 입힐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세요. 아무리 아빠라고 해도 그때는 참지 않을 거라구요.”
여태껏 묵향에게 여자용 옷을 많이도 가져다 입힌 아르티어스였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역효과일 줄이야. 아르티어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 묵향에게 이곳의 옷을 이것저것 입혀 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상상을 하던 아르티어스는 묵향이 자신의 생각대로 잘 어울리자 기분이 좋은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나코의 뒤를 따라가던 묵향은 왠지 온몸에 소름이 돋자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르티어스가 음흉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고 있는 것이었다. 묵향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짜증이 나서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 붙였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징그럽게 웃는 거예요?”
아르티어스는 시치미를 떼며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 아니다. 그냥 하나코의 뒷모습이 너무 예뻐서 말이야. 네가 보기에도 특히 엉덩이가 기가 막히지 않니?”
“젠장, 늙었으면 나잇값을 하셔야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빨리 따라오시기나 하라구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지만 약간 기분이 언짢은지 나직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젠장, 이제 겨우 4천 살밖에 안 되었는데 늙은이라니? 아직도 팔팔하구만.”
미로처럼 복잡한 실내를 앞장서서 한참을 걸어가던 하나코는 어느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살짝 뒤로 돌아서서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가 목욕탕입니다.”
하나코의 안내를 받으며 문 안으로 들어서자 작은 방이 나왔다. 그 방에는 또 다른 소녀가 한 명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중하게 아르티어스와 묵향에게 절을 한 후, 선반에서 깨끗한 수건 두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먼저 이쪽에서 옷을 벗으시고, 반대편 문으로 나가시면 탕이 있습니다.”
그 소녀는 탈의실처럼 보이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 아르티어스는 그 소녀의 말대로 탈의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묵향도 아무 생각 없이 아르티어스의 뒤를 따라 탈의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바로 이때 그 소녀는 묵향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손님은 저쪽입니다.”
“뭐라고?”
그러자 그 소녀는 아르티어스가 들어간 남성용 탈의실 바로 옆에 있는 여성용 탈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님께서는 저쪽 탈의실을 이용해 주십시오.”
그제서야 묵향은 상대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기야, 비좁은 곳에 둘이 들어가서 옷을 벗을 이유가 없지.”
묵향이 옷을 벗고, 뒤쪽에 나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여태껏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욕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긴 나지막한 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욕조가 놓여 있었다. 중원과 저쪽 세상에 있을 때는 시냇물로 씻거나 아니며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통에서 목욕을 해 본 경험밖에 없었던 묵향으로서는 목욕탕에 있는 욕조의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욕조는 장정 20여 명이 함께 들어가 목욕을 할 수 있을 만큼 컸고, 이미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우와, 엄청나게 큰 욕조군. 들어가서 수영을 해도 되겠는데.”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아르티어스가 옆에 서며 동감한다는 듯 맞장구쳤다.
“참내, 이건 물 낭비야.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 크기면 되지. 이렇게 큰 탕이 필요할까? 원, 오우거가 목욕할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글쎄요, 초대형 욕조 하나만 있는 것을 보면 여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방식인 모양인데요. 안 그래요?”
“뭐,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구나. 자 오랜만에 아들하고 오붓하게 함께 목욕이나 즐겨 볼까? 흐흐흐.”
욕조에 들어서던 묵향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목욕물이 엄청나게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거 물이 조금만 더 뜨거웠다면 아예 사람 잡겠는데요?”
“글쎄다, 어쨌건 들어가 있으니 기분은 괜찮군.”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탈의실 쪽의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웬 여자 둘과 덩치 좋은 중년 남자 둘이 들어왔다. 원래 목욕이라는 것은 혼자서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묵향에게 그것은 가히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물론 과거 자신의 노예였던 세린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했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묵향이 여자였을 때였지 않은가? 그리고 목욕하는데 무슨 시중을 들 것이 그렇게 많다고 저렇게 떼거리로 몰려 들어온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목욕탕에 들어온 중년 남자들은 한쪽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여자들은 앞으로 나서며 묵향과 아르티어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들은 나지막한 탁자를 가리키며 간드러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에 사는 여자들은 모두 다 일부러 목소리를 곱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하나코의 기억을 읽은 아르티어스는 그녀가 왜 그리로 오라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묵향에게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가서 누워.”
“왜요?”
“여기서는 목욕 후 안마를 받거든. 해 봐라, 아마 그런대로 기분 괜찮을 거다.”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아는지 의심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빠는 이런 식으로 목욕해 보신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물론 내가 받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말을 배운 그 하녀의 기억에는 이런 것들이 있더군. 그래서 아는 거지.”
그제서야 묵향은 알겠다는 듯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엎드렸다. 아무리 하녀라고는 하지만 여자 앞에서 벌거숭이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 왠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녀는 묵향의 등에 꼼꼼하게 향유(香油)를 발랐다. 한참 동안 부드러운 손길로 묵향의 등 구석구석에 향유를 바른 그녀는 묵향에게 뭐라고 말하며 돌아누우라는 손짓을 했다. 묵향이 그냥 가만히 엎드려 있자 옆에 있던 아르티어스는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말했다.
“빨리 돌아누우라고 하잖아!”
“젠장, 뭘 돌아누워요? 그냥 내가 바른다고 말 좀 해 줘요.”
“어쭈? 너 하녀 목이 날아가는 거 구경하고 싶냐? 죄도 없는 하녀가 너 때문에 죽는다면 꿈자리가 아∼주 좋을 거다. 그럼, 아주 상쾌하겠지.”
아르티어스의 이죽거림에 묵향은 하는 수없이 투덜거리며 돌아누웠다. 아르티어스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자기 때문에 하녀의 목이 날아간다면 별로 기분이 유쾌할 수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지금 남자의 몸이라고는 하지만 그전에는 여자의 몸으로 오랫동안 살기도 했지 않은가? 거기에다가 이 나이에 손녀뻘도 안 되는 애들한테 몸 좀 보여 준다고 해서 뭐 어쩌겠는가하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묵향이었다.
“에잇, 젠장!”
묵향이 투덜거리며 돌아눕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는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받은 명령으로는 분명히 손님이 남녀 한 쌍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묵향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깜짝 놀란 것이다. 더군다나 감히 상상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이었으니……. 하녀는 아마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가와서는 더욱 은근한 손길로 묵향에게 열심히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밀한 부분까지 그녀의 손길이 슬쩍슬쩍 미치자 묵향의 안색은 똥이라도 씹은 듯 찡그려졌다.
한동안 열심히 향유를 바르던 하녀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성과 함께 뭐라고 말을 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르티어스는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쑥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고 있던 묵향은 번쩍 눈을 뜨고 왜 웃느냐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젠장, 갑자기 왜 웃어요? 어라? 저 여자는 향유를 바르다 말고 왜 저래?”
“큭큭큭, 와핫핫핫핫!”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이제는 아예 숨이 넘어간다는 듯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한동안 웃던 아르티어스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묵향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킥킥, 하녀의 말이 너의 그것이 아주 훌륭하다는구나! 와핫핫핫.”
아르티어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 자신의 사타구니를 바라보았다. 하녀의 손길에 자극을 받았는지 그의 신체 일부가 크게 팽창해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묵향은 얼른 몸을 뒤집어 엎드리며 내심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자극을 받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저 망할 계집애는 혼자 보고 말지 그걸 밝혀 가지고 망신을 줘? 젠장, 이럴 줄 알았다면 목이 달아나게 그냥 놔두는 건데. 그리고 아빠도 그래! 말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면서 계집하고 맞장구를 치며 나를 비웃어? 성질나는데 남자 모습으로 확 바꿀까 보다.’
하녀들이 향유를 바르고 뒤로 물러서자 여태껏 꿇어 앉아 있던 사내들 중의 한 명이 일어섰다. 그는 묵향의 몸을 천천히 안마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목욕 후에 받는 안마. 거기에다가 안마를 하는 사내는 성에 소속된 인물이라서 그런지 정말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묵향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신의 근육들이 풀리며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난생 처음 안마를 받아 본 묵향은 기분 좋은 감탄사를 내지르며 말했다.
“오우, 이 정도면 목욕을 하루에 한 번씩 할 만도 한데? 정말 기분 좋군…….”
하지만 이런 목욕을 무려 일곱 번씩이나 한 후에야 영주를 만나게 될 줄은 묵향도, 아르티어스도 이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묵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옷을 찾았지만, 옷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빠, 옷이 없어졌어요. 이거 어떤 새끼가 훔쳐갔지? 잡히기만 하면…….”
묵향보다 조금 늦게 목욕을 마치고 뒤따라 나오던 아르티어스는 아들의 말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없어진 게 아니라, 세탁을 하기 위해 가져간 거야.”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투덜거렸다.
“뭐라고요? 허락도 안 받고 남의 옷을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
“흠, 뭐 여기 방식이 그러면 그러려니 해야지. 자, 대신 여기 있는 이 목욕옷을 입어라.”
묵향은 아르티어스가 집어 준 목욕옷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중얼거렸다.
“어라? 이거 가운하고 비슷하게 생겼네.”
“생긴 것만 비슷한 게 아니라 용도도 비슷한 거다. 자, 가자.”
묵향과 아르티어스가 목욕탕 밖으로 나오자, 처음에 그들을 안내해 왔던 하나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촉촉하게 물기에 젖은 묵향과 아르티어스의 아름다운 모습에 잠시 황홀한 듯 바라보더니, 갑자기 정신이 든 듯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곳에서의 첫 식사는 묵향에게 있어서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목욕을 끝낸 후 하나코가 식사를 가져오자, 묵향은 가장 먼저 대나무로 만든 작은 젓가락을 집어 들며 추억에 잠겼다.
“호오, 여기서도 젓가락을 쓰네? 그런데 중원에서 사용하던 것보다는 길이가 엄청 짧구만.”
하지만 일단 젓가락이 가져다준 추억에서 깨어나자, 곧이어 밥상에 놓여진 음식들이 묵향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묵향은 기도 안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게? 이게 뭐야?”
소꿉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자신의 앞에 놓여진 작은 밥상에는 조그만 그릇들이 옹기종기 다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밥 한 공기와 국 한 그릇. 그리고 구운 작은 생선 한 마리가 담긴 접시 하나. 얇게 무를 썰어 놓은 접시 하나. 마지막으로 작은 열매 같은 것이 담긴 접시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한 입에 다 털어 넣어도 될 정도로 양이 작았다.
“이걸 먹고 어떻게 배를 채우라는 말입니까? 안 그래요?”
묵향이 분개해서 말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이미 하녀의 기억을 더듬어 본 그는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오히려 묵향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여기 사는 놈들은 다 이렇게 먹어.”
“그래요? 젠장! 어쩐지 여태까지 본 놈들이 몽땅 다 키가 작달막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군.”
묵향은 투덜거리면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밥을 젓가락으로 뜨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쌀이 좀 이상한데요? 무슨 쌀이 이렇게 끈기가 있죠? 원래 잡으면 후두둑 떨어져야 정상인데…….”
“여기 쌀은 모두 다 그러니까 투정하지 말고 먹어. 저 먼 옛날부터 여기 사람들은 이런 밥을 먹고 살았으니까 말이다.”
“젠장, 아빠가 태어났던 그 세계는 딴 건 몰라도 먹는 것 하나는 별로 불만이 없었다구요. 어떤 면에서는 중원의 요리와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었거든요.”
묵향이 계속 투덜거렸지만 아르티어스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거기로 돌아가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중원이라는 곳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잖니?”
아르티어스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묵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열심히 음식을 먹어 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음식 같은 사소한 문제로 중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생선 뼈다귀마저 다 씹어 먹은 후에야 묵향은 아쉬운 듯 밥상을 물렸다.
“젠장, 괜히 입맛만 버린 것 같네. 뭐라도 더 먹어야 양이 찰 텐데.”
식사가 끝나자 하나코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가져왔다. 묵향은 차를 보고 반가운 듯 입을 열었다.
“이야, 여기서도 차를 마시네? 이게 얼마만이냐?”
단숨에 차를 마셔 버린 묵향은 빈 잔을 하나코에게 내밀며 외쳤다.
“한 잔 더!”
잔을 받아 든 하나코는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뭐라고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당연히 알 수 없었던 묵향은 아르티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며 묵향에게 설명해 줬다.
“쯧쯧, 차는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야. 천천히 향을 음미하면서 마셔야지, 무식하게 냉수 마시듯 벌컥 들이켜다니.”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무슨 같잖은 소리를 하느냐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뭘 그렇게 따지고 그래요? 보니까 건더기도 없는데 그냥 마시면 되지.”
원래 중원에서는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식후에 차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수나 다름없었다. 물론 상류층의 사람들은 예의를 따지며 차를 마시겠지만 묵향과 같은 서민들은 편하게 차를 마셨던 것이다. 묵향은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투덜거리며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한참을 누워 있던 묵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라? 처음에 봤을 때는 꽤 양이 작아 보였는데, 제법 든든하네. 거 참, 이상하군. 이게 보기보다 양이 많은 건지, 아니면 아까 사슴을 먹어서 그런 건가?”
배가 부르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묵향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