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현실은 한쪽 면이 30보 정도, 높이가 5보 정도쯤 되는 정사각형의 방 두 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과 방 사이는 문턱이 있었고, 위쪽 방 쪽에는 한 뼘 정도의 높이로 야트막한 단상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주는 그 단상 위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고, 그의 오른편에는 비단옷을 입은 젊은 무사가 영주를 호위하듯 서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가 들어온 아래쪽 방에는 여섯 명의 무사가 좌우로 셋씩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주는 여태껏 보아 왔던 이 지방 사람들과 같이 땅딸막하고, 옆으로 쫘악 퍼진 인물이었다. 이곳 특유의 복장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배 부분이 불룩한 것이 뱃살이 상당한 듯했다. 하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허리에는 고풍스러운 두 개의 검을 차고 있었다.
후지와라 영주는 오키타와 함께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오키타는 아래쪽 방에서 넙죽 엎드리며 후지와라 영주에게 정중히 절을 한 후, 고개를 들었다. 현재 그의 직위로는 위쪽 방 쪽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묵향과 아르티어스는 오키타가 하는 행동을 뒤에서 모두 지켜봤지만 따라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영주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 중앙에 털썩 앉아 버렸다.
경호대장 요시나가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방인들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검을 뽑아 들 듯하며 소리쳤다. 영주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검을 뽑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요시나가의 목이 떨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그가 설혹 영주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무엄하다! 어찌 감히 예를 올리지 않는 것이냐?”
요시나가의 호통에 아르티어스 좌우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경호 무사들의 눈빛 또한 흉흉하게 바뀌었다. 마치 요시나가의 명령만 떨어진다면 저 무엄한 이방인들을 당장이라도 밖으로 끌어내어 목을 벨 기세였다.
바로 이때, 영주의 제지가 있었다. 영주의 목소리는 생긴 것과는 달리 매우 굵고 사내다운 것이었다.
“멈춰라!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영주의 말에 요시나가는 반쯤 뽑았던 검을 즉시 집어넣었다. 잠시 요시나가를 눈빛으로 달랜 후지와라 영주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핫핫핫! 외국에서 오신 분들인데, 구태여 사소한 예의를 지킬 필요가 뭐가 있겠소? 자, 복잡한 격식은 잊고, 우리 술이나 한잔합시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데는 술이 최고가 아니겠소?”
후지와라 영주는 알현실 밖을 향해 외쳤다.
“술을 가져오너라.”
그러자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하녀의 대답이 들려왔다.
“옛!”
명령을 내린 후지와라 영주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의 좌우에서 마치 포위라도 하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경호 무사들에게 밖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호 무사들은 일순 당황했지만 후지와라 영주의 옆에 서 있는 요시나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체 없이 밖으로 물러났다. 무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후지와라 영주는 아르티어스에게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는 듯 껄껄 웃으며 호쾌하게 말했다.
“핫핫핫, 우리 쪽의 관습은 너무 딱딱한 것이 흠이오. 너무나도 체면을 중시한단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가벼운 술자리에서 오간 별 쓸데없는 대화를 가지고도 내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가끔 문제를 일으켜서 골치를 썩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사실 두 분은 이쪽 관습에 익숙하지 못한 외국에서 오신 분들이 아니오? 그러니 이쪽 예의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 미리 부하들을 물리지 못한 점, 내 사과하리다.”
후지와라 영주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짜식, 보기보다는 꽤 세심하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신기한 듯 알현실을 둘러보던 아르티어스는 방 밖에서 무사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고, 좌우 옆방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자 곧 후지와라 영주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까불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은근한 협박이었던 것이다.
아르티어스는 후지와라 영주를 같잖다는 듯 쳐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역시 호비트는 첫인상이 중요해. 처음 척 봤을 때 왠지 쪼잔하고, 소심한 놈인 것 같더니 그게 맞았군.’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내색은 하지 않고 후지와라 영주를 가볍게 떠보았다.
“호오, 그런 의미에서 경호 무사들을 물린 거라면 이 옆방에 있는 병사들도 물러가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겠소? 종이를 바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그들이 이쪽의 대화를 못 들을 리가 없지 않겠소.”
순간 후지와라 영주의 안색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지만, 곧 그는 더욱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물론이오. 하지만 영주를 호위하기 위해 옆방에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래된 관습이자 그들의 임무지요. 그렇기에 그들을 물러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오. 대신 그들은 이 방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여기서 오고 간 대화를 ‘들을 수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소. 그러니까 두 분에게 무례를 범할 문제의 소지는 없다는 말이지요. 이상하게 들릴 줄은 알겠지만 이쪽 관습이 그러니 이해해 주시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아르티어스는 후지와라 영주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미 하나코의 모든 기억을 본 아르티어스였기에 영주가 잔대가리를 굴려 한 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실 저따위 무사들이야 몇 명이 있건 아르티어스에게 있어서 한주먹 거리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열심히 잔대가리를 굴리는 영주와의 대화가 의외로 재미있었던 아르티어스는 환히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호오, 그런 관습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소. 영주님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하오.”
그 후, 후지와라 영주와 아르티어스는 따뜻하게 데운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가 이런 쓸데없는 대화나 나누자고 아르티어스를 청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후지와라 영주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일대를 여행하고 있었다고 부하에게 들었소. 그래, 여행의 결과는 만족스러우셨소?”
아르티어스는 후지와라 영주가 왜 여행이라는 말을 꺼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둥루젠 말을 주고받았던 병사가 자신의 눈빛에 질려 상대가 여행을 한다고 대충 얼버무렸다는 것을 아르티어스가 알 리 없었기 때문이다. 후지와라 영주가 한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자 아르티어스는 그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아르티어스는 아직까지 영주가 무엇 때문에 자신들을 보자고 청한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쎄올시다, 아직 여행이 끝난 것이 아니니…….”
중간에 말을 멈춘 아르티어스가 영주의 눈치를 슬쩍 살피자 후지와라 영주는 내심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결코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후지와라 영주는 내색하지 않으며 마치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핫핫핫, 내가 너무 성급했던 같소. 사실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의 신분만 아니리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나라들을 가 보고 싶을 정도로 난 여행을 아주 좋아하오. 그러다 보니 대국 상인인 것 같다는 부하의 보고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분명 무역을 하다보면 겪었을, 수많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거야 그렇지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은 했지만 아르티어스의 심사는 편치 못했다. 그러니까 저 영주 놈은 자신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나 해 달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위대하신 드래곤인 자신이 저런 뚱땡이를 위해 이야기꾼 노릇이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영주는 그런 아르티어스의 마음도 모르고 계속 말을 건넸다.
“내 수하에게 듣기로는, 그대가 화염의 술을 쓴다면서요?”
아르티어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후지와라 영주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계속 물었다.
“화염의 술은 닌자의 최고급 기술들 중의 하나라고 들었는데, 귀하는 어디에서 그것을 배웠소?”
아르티어스는 이미 후지와라 영주가 말하는 화염의 술이라는 것이 자신이 전에 쓴 파이어 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녀의 기억 속에는 전설에나 회자되는 닌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이다.
화염의 술은 그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닌자의 기술들 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영주는 파이어 볼에 대한 보고를 듣고 그것이 화염의 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상대가 원하면 그까짓 1사이클 정도의 마법은 얼마든지 가르쳐 줄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값을 끌어올리기 위해 슬쩍 튕겨 보는 아르티어스였다.
“당신이라면 그걸 알려 주겠소?”
후지와라 영주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소. 그렇다면 내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는 평범한 대국의 상인 같지는 않단 말이오. 도대체 정체가 뭐요? 혹시 나를 속일 생각일랑은 그만 두시오. 무역을 하는 평범한 상인이 고도의 닌자술을 익힐 리는 없지 않소?”
아르티어스는 대국(大國)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후지와라 영주가 말하는 대국이라는 것이 혹시 아들 녀석이 말하는 중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대국이라는 게 중원, 그러니까 송을 말하는 것이오?”
잠시 생각을 해 보던 후지와라 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당신들이 중원이라고 부르는 곳은 여태껏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진 드넓은 땅이지 않소. 우리 야마토와는 달리 몇백 년마다 국가 이름이 계속 바뀌니, 이쪽에서는 그냥 대국이라고 부른다오. 그러면 모두 다 알아듣지요.”
‘호오∼, 이걸 어쩐다?’
후지와라 영주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 외로 중원은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송을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차원 이동에 따른 시간차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만약 묵향이 이 사실을 안다면 굉장히 좋아하겠지만 한동안 망설이는 아르티어스였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새로운 풍물을 보면서 아들과 좀 더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원은 이제 바로 코앞인데, 여기서 시간을 조금 지체한다고 큰일이야 나겠어?’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한 아르티어스는 약간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영주에게 말했다.
“설마 화염의 술을 보고 그렇게까지 생각을 할 줄은 몰랐소. 사실 무역을 하다 보면 호신술도 필요하지 않겠소. 대국에서 내가 거래하던 고객 중에서 엄청난 세력을 지닌 인물들도 있었는데, 화염의 술은 그들 중 한 명에게 배운 것이오.”
후지와라 영주는 구미가 당긴다는 듯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며 급히 되물었다.
“엄청난 세력이라고요?”
“그렇소. 중원에는 무예를 광적으로 숭상하는 무림이라는 집단이 있다는 것을 영주께서는 혹시 알고 계시오?”
아르티어스는 차원 이동을 하기 전에 아들에게서 대충 중원의 일을 들은 게 있기에, 그것에 약간 살을 덧붙여서 후지와라 영주에게 얘기한 것이다. 후지와라 영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조금은…, 그런 소문은 들은 것 같소.”
“바로 그 무림에 있는 문파들 중에서도 가장 큰 문파의 수장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그 지닌 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두들 마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는 문파의 수장을 말이오.”
후지와라 영주는 마교가 무술인들이 모인 도장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아르티어스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국에도 닌자를 키우는 도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후지와라 영주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곳 야마토에서의 닌자들은 작은 촌락을 구성하여 그 기술을 전수했다.
그렇다 보니 닌자들은 아주 폐쇄적이었고, 또 그 수도 아주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의 말을 들어 보니, 대국에서는 아예 도장까지 차려놓고 닌자를 대량으로 육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량으로 육성한다 해도 그런 고급 기술을 상인에게 까지 가르쳐 줄까? 의심스러워지는 후지와라 영주였다.
“흠, 하지만 그들이 어찌 그렇게 굉장한 닌자술을 상인인 귀하에게 가르쳐 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려.”
아르티어스는 그까짓 1사이클 화염 마법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계속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여기서도 둥루젠에서처럼 신을 사칭한 연출을 한번 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러면 오랜만에 하는 유희가 너무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뭘 모르시는구려. 내가 알고 있는 마교라는 단체가 지닌 힘은 웬만한 나라는 일순간에 쓸어버릴 만큼 가공할 만한 것이오. 그렇기에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필요하지요. 그건 귀하도 독립된 영토를 다스리는 영주시니까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오.”
후지와라 영주는 약간 미심쩍은 듯한 눈길로 아르티어스를 보았다. 물론 영토를 다스리는 데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동감을 하고도 남았다. 그 역시 현재 그것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몇십 명의 무술 도장 같은 것이 어떻게 국가급의 무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인가?
아르티어스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한 후지와라 영주의 말에 손가락으로 묵향을 가리키며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좋소,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데, 그럼 우리 아이한테 시험을 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지 않겠소? 비록 저렇게 연약해 보여도 마교 내에서는 꽤 알아주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오.”
후지와라 영주는 저 아래쪽에서 열심히 술을 마시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닭 한 마리 잡기 힘들 듯한데, 그 엄청난 무력 단체에서 인정받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동안 묵향을 바라보던 후지와라 영주는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도 없다는 듯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야스다!”
그와 동시에 알현실 옆쪽의 문이 스르륵 열리며 웬 건장한 무사가 한 명 들어왔다. 그 무사가 나온 문 뒤편으로는 20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무사들이 단정하게 꿇어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야스다는 후지와라 영주에게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래, 자네가 저 소녀의 실력을 한 번 알아 봐 주겠나?”
지금까지 옆방에서 엿듣고 있던 야스다였기에, 주군이 뭘 원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즉시 대답했다.
“옛!”
아르티어스는 아래쪽에서 술만 마시고 있는 묵향에게 슬쩍 말했다.
“얘야, 저 녀석 손 좀 봐 줘라.”
“손 좀 봐 주라구요?”
묵향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는 듯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저 뚱땡이하고, 아르티어스가 둘이서만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에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도 그가 알아듣지도 못할 언어로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끼어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애꿎은 술만 열심히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묵향이 너무 의욕적으로 일어서자, 아르티어스는 다급한 표정으로 급히 말했다.
“제발, 적당히 해라. 응? 반쯤 죽여 놓고 대화하자고는 할 수 없잖냐?”
“에이, 젠장. 좋다 말았네. 알았어요.”
야스다는 후지와라 영주의 허락을 받아, 알현실에서 무술 대련을 하기로 했다. 알현실의 아래쪽 방은 대련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었기에 구태여 술자리를 밖으로 옮길 필요가 없었다. 그 둘의 비무는 거의 순식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빠른 시간에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빨리 끝나 버려 구경을 했던 후지와라 영주조차도 얼이 빠진 상태였다. 야스다는 자신의 경호 무사들 중에서도 제법 괜찮은 실력의 무사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그가 맨손의 소녀에게 순식간에 묵사발이 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후지와라 영주는 잠시 멍한 상태로 두 사람의 비무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비무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야스다의 몸에서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나름대로의 자신감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것은 그의 앞에 서 있는 소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야스다는 일단 예의상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무사들끼리 싸울 때 자신의 소개를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야스다는 약간 나직하면서도 장중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영주님의 경호대원 야스다라고 하오. 그리고 무술은 사사키 겐지 선생으로부터 북진일도류를 전수받았소. 오늘 영주님의 명령으로 그대와 공식 대련을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 설혹 그대에게 패해 쓰러진다 한들, 단 한점 후회도 없을 것이오.”
상대가 뭔가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묵향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아마도 여기서는 싸우기 전에 슬그머니 욕설을 퍼부으며 상대의 신경을 긁어 대는 것이 통상적인 순서인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못해 줄 것은 없었다. 묵향은 상대와 같은 표정, 같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먼저 기회를 줄 테니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빨리 손을 써! 네놈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내가 오늘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 하기야, 내가 진심으로 상대한다면 내년 오늘이 바로 네놈 제삿날이 될 테니 그건 참아 주지. 젠장, 아빠가 말리지만 않았으면 팔다리뼈 하나는 아작을 내 줄 텐데…….”
묵향이 은근슬쩍 상대를 도발하는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아르티어스는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자신도 저것이 욕설을 퍼붓는 것인 줄 착각하고 ‘파이어 볼’로 상대편 무사를 반쯤 구워 놨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쪽에서는 싸우기 전에 자기소개를 하는 특이한 관습이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을 처음 듣는 묵향이나 아르티어스는 ‘욕설’로 오해했던 것이고…….
야스다는 상대가 자신의 소개를 마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상대의 소개가 끝난 듯하자,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다음 검을 뽑아 상대를 향해 중단자세로 겨눴다. 하지만 검 뒤편으로 보이는 소녀는 바로 코앞에 진검(眞劍)이 겨눠져 있는데도 너무나 여유만만 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야스다의 기분을 더럽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뜨거운 맛을 좀 봐야겠군.’
야스다는 일단 상대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겸, 또한 자신의 실력도 과시할 겸해서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약간의 힘이 더 보태지자 검은 야스다의 의지를 담아 은빛 곡선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리고 야스다가 검을 날리는 그 순간, 묵향도 몸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야스다의 검은 방 한쪽을 구르고 있었고, 그 검의 주인은 이미 큰 대자로 뻗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