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5화 (391/930)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후지와라 영주는 가볍게 손바닥을 치면서 놀랍다는 듯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저, 정말 대단한 실력이오. 귀하가 자랑을 할 만도 하겠소이다.”

“뭐, 저 정도를 가지고…….”

야스다는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을 집어 거칠게 검집에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넙죽 엎드리며 후지와라 영주에게 비통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손님이라고는 하지만, 여자에게 패해 주군의 체면에 먹칠을 했습니다. 제게 셋푸쿠를 허락해 주십시오.”

셋푸쿠라는 말에 영주는 화가 났는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네놈이 셋푸쿠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에잇, 멍청한 놈, 코지! 당장 이놈을 밖으로 끌어내도록 해라.”

후지와라 영주의 노성이 터지자 곧바로 옆방에서 한 명의 무사가 달려 들어와 야스다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야스다는 끌려 나가면서도 후지와라 영주를 바라보며 비통한 음성으로 외쳤다.

“영주님, 제발 저에게 셋푸쿠를 허락해 주십시오. 영주님, 제발!”

여유로운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셋푸쿠라는 말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하녀의 기억을 통해 알고 있는 셋푸쿠라는 것은 할복자살(割腹自殺)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사로서는 대단히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리고 셋푸쿠를 했을 경우 그가 지은 모든 잘못은 없었던 것으로 처리되었다.

아마도 저들은 묵향이 사내가 아닌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녀의 기억을 통해 읽은 이 나라의 여자에 대한 대접은 거의 인간 이하였다. 그런 여자에게 패한 무사에게는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배를 갈라 자살하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아르티어스는 도대체 저 호비트가 어떤 방식으로 배를 가를 것인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애써 호기심을 억제했다. 한동안 편안하게 이곳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르티어스는 내심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며 후지와라 영주에게 말을 건넸다.

“말씀하는 도중에 끼어드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지만…, 뭔가 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저 아이는 ‘여자’가 아니라 내 아들이라오.”

순간 후지와라 영주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묵향을 바라봤다. 저렇게 이국적인 아름다운 미인이 아르티어스의 아들이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 아들이오?”

“예, 아들이죠. 그리고 제 아들놈의 밑에 있는 수하들의 숫자만 수만 명은 족히 된다고 들었소. 조그마한 무술 수련장과 마교를 동급으로 취급하시면 곤란하지요.”

아르티어스의 말에 후지와라 영주는 내심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 수만 명이란 말이오?”

수만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다면 그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영주급 정도의 실력자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순수하게 무술만 닦는 문파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올라갔다면, 그 무술 실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영주는 새삼스레 아래쪽에 앉아서 태연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미소년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후지와라 영주는 알현실 밖을 향해 외쳤다.

“야스다에게 들라 하라.”

잠시 후, 야스다는 창백한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알현실로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후지와라 영주는 못마땅하다는 눈초리로 야스다를 쏘아보며 외쳤다.

“뭣 하고 있는 것인가? 당장 저 소년에게 대련을 하는 영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알현실 밖에서 아르티어스와 후지와라 영주 사이에 오고 가는 말을 들었던 야스다로서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셋푸쿠로서도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치욕적인 패배가, 이방인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뒤바뀔 수 있단 말인가? 야스다는 소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계집에게 패했다는 치욕감은 사라지고 오히려 고수와 겨뤄 봤다는 만족감이 묻어 나왔다.

“대련을 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묵향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인사를 하며 하는 말이었기에 좋은 뜻으로 해석했다. 그렇기에 그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로 해 봐야 통하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후지와라 영주는 서로 간에 사과와 답례가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본 후, 분위기 전환을 위하여 일부러 호탕하게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으핫핫핫! 내가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선택한 것 같소. 역시 사람은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소. 귀하 아들의 실력을 얕잡아본 점 사과드리오.”

“별말씀을…….”

이방인들을 바라보는 후지와라 영주의 눈빛에는 순간 월척을 낚았다는 듯한 득의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었던 후지와라 영주는 간자를 하나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후지와라 영주는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내 사죄의 표시로 귀하의 아드님께 몸종을 하나 붙여 드리고 싶소. 몸종이 없으면 여행을 다니시기 불편하시지 않겠소. 그리고 이곳 야마토에서는 몸종을 거느리지 않는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오.”

“흠, 몸종이오?”

후지와라 영주는 알현실 밖을 향해 조금 큰 소리로 외쳤다. 옆방에 있는 부하들에게 들으라는 뜻이었다.

“가서 마사코를 데려 오너라.”

그러자 얇은 창호지 문 뒤편에서 “옛”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후 영주는 아르티어스에게 약간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원래가 집안에는 종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고, 특히나 계집종은 아주 쓸모가 많지요. 식사와 옷가지를 챙겨 줘야 할 테고, 식사를 할 때나 술을 마실 때도 옆에서 시중을 들게 할 수 있소. 그리고 밤에는 잠자리 시중까지 들게 할 수 있으니 아주 다목적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내 오늘의 비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에게 계집종을 한 명 선물하고 싶은 것이오.”

아르티어스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예의를 표했다.

“아들놈을 대신해 감사를 드리오.”

“별말씀을……. 꽤 총명한 아이니 쓸 만하실 거외다. 그리고 좀 쉬시면서 시간이 되면 무역을 하시면서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나 가끔 들려줬으면 좋겠소.”

한동안 이곳에 얹혀 살 구실도 생겼고, 그사이에 저 영주 놈을 가지고 노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르티어스는 매우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하여간 주신다니 고맙게 받겠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한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묵향, 청혼을 받다

이방인들이 물러가고 난 후, 영주는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메지마를 불러들였다.

“어떻던가?”

사메지마는 자신이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듯 도저히 못 믿겠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놀라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만약 아루테에스라는 이방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군께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허∼참, 다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비극이야.”

후지와라 영주는 자신은 마음껏 거짓말을 하면서 남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주군.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백 번 조심해도 모자랄 일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마사코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아마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그들의 모든 것을 알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아이니까요.”

마사코는 미래에 대국과의 무역을 할 것에 대비해서 키운 다섯 명의 아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들은 집중적으로 대국어(大國語)와 고려어(高麗語)를 교육받았다.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무술 교육까지 받고 있었다. 필요시에는 어떤 때라도 간자(間者)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아이들 중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대국어를 익힌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그들 중에서 하나가 마사코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수많은 병사들이 엿듣고 있는 이 자리에서 떠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사메지마는 대략적으로 자신의 뜻을 영주에게 전한 것이다. 하지만 영주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말했다.

“흠, 하지만 마사코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좀 전에 그 이방인과 말을 나눠 보니 결코 녹녹한 인물이 아니더군. 처음에는 이쪽 말을 전혀 모르는 듯 능청을 떤 그들이 아닌가? 자칫하면 우리가 역정보에 걸려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말일세.”

사메지마도 후지와라 영주의 의견에 찬동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군.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 대국으로 보내든지 해서라도 정확한 정보를 알아 보게. 그들이 말하는 마교라는 것이 정말 그렇게 힘이 엄청난 단체인지 하는 것도 알 겸해서 말이야.”

영주의 말에 사메지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대단히 어렵습니다, 주군. 간바쿠가 새로운 무역법을 선포한 후, 사실상 무역은 고려만을 대상으로 이뤄집니다. 사람을 파견한다고 해도 고려에서 대국으로 들어갈 방법은 사실상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역을 독점하려는 고려에서 우리 야마토의 사람들이 대국 상인과 만나는 길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사메지마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시도해 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안 된다고 대답을 한 것이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자네는 완벽이라는 단어를 믿나?”

영주의 말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움츠리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죄송합니다, 주군.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후지와라 영주는 사메지마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대국 상인들과 접촉을 하게! 어쩌면 우리 후지와라 가문의 존폐가 달릴 수도 있는 사안이야?”

대답을 하는 사메지마의 음성에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사메지마로서도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 즉시 사람을 뽑아 파견하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최대한 빨리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 것인데…….”

“그건 내가 재무담당인 아사무에게 조치를 해 두겠네. 그까짓 돈이야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말이야. 그 대신 철저하게 정보를 입수하게. 서둘다가 자칫 천추의 한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일세.”

단호한 후지와라 영주의 명령에 사메지마는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복명했다.

“옛, 주군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메지마의 힘찬 대답에 흡족한 듯 후지와라 영주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천천히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그 다쿠라는 이방인이 계집이라고 보고하지 않았나?”

순간 사메지마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게…, 도무지 저로서도 이해가 안 가는지라……. 주군께서도 그 아름다운 미모를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허, 나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야. 혹시 그들이 내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일까?”

“설마, 감히 주군께 곧 들통 날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예의가 없는 야만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지 미간을 찡그리더니 사메지마에게 명령을 내렸다.

“흐음∼. 자네가 한번 조사해 보게.”

영주의 명에 사메지마는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옛, 그들이 벌써 몇 번인가 목욕을 했다고 하니, 그곳에 배치되어 있는 하녀에게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메지마는 마사코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방인들의 모든 것을 파해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마사코의 보고를 들은 사메지마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옛!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사메지마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마사코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의 용모로 봤을 때, 대국인이 아닌 서역인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둘은 자신들끼리 대화할 때는 서역 말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서 엿들어도 도저히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이런, 바보 같은! 그렇다면 너를 투입한 것이 허사가 아니냐?”

사메지마가 벌컥 화를 내자, 마사코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소녀를 처벌해 주십시오.”

답답한 듯 턱을 쓰다듬으며 좌우로 왔다 갔다 하던 사메지마는 잠시 후, 흥분이 가라앉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용서를 빌 이유는 없다. 한눈에 봐도 그들이 서역인임이 분명한데 서역어를 할 줄 모르는 너를 붙인…, 나의 실책이다.”

한참 말을 하던 사메지마는 황급히 말을 끊었다가 자신의 실수라고 덧붙였다. 그들에게 마사코를 붙인 것은 후지와라 영주였다. 하지만 그걸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후지와라 영주의 무능을 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창호지로 뚫려 있으니, 누군가가 엿들을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한다?”

사메지마는 이방인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메지마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마사코는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은 채로 끈기 있게 상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바로 이때 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정담당관님, 영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래? 알겠다,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옛.”

사메지마는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사라지자, 마사코를 향해 지금까지 생각해 낸 것 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것을 말했다.

“너는 곧장 가서 무술 수련장을 참관하실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고, 그들을 그곳으로 데려오너라.”

“옛!”

마사코가 방 밖으로 나가자, 사메지마도 영주에게 가기 위해 천천히 방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흐흐흐, 그렇다면 한번 덫을 놔 봐야겠군. 그런 다음 그놈들이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지 지켜보면 될 것이 아닌가? 그들 주위에 닌자를 네 명 정도 붙여 놓으면 충분할 거야. 만약 놈들이 간자라면 조만간에 그 꼬리가 잡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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