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메지마는 짐짓 아주 중요한 곳을 보여 준다는 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여기가 무술 수련장입니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은 사메지마의 안내를 받아가며 무술 수련장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영주의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곳이라서 그런지, 무술 수련장의 규모는 상당히 컸다. 궁술 수련장, 창술 수련장, 기마 수련장, 검술 수련장 등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각 수련장에서는 병사들이 무술 사범의 지도를 받으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나 아르티어스가 보기에 훈련에 여념이 없는 병사들의 실력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기마 수련장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말을 타고 달려가며 검을 휘둘러 장대 끝에 매달아 놓은 짚단을 베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훈련의 목적이야 뻔한 것이었다. 말을 타고 달려가며 적의 목을 베는 훈련일 것이다. 병사들이야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고도의 무공을 익힌 묵향에게 있어서 그건 아이들 장난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묵향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르티어스을 향해 궁시렁거렸다.
“여기 말고 딴 데를 좀 보여 달라고 해 봐요. 이거 영∼, 유치해서 못 봐 주겠네.”
“네가 보기에도 좀 그렇지? 네 밑에 있던 팔시온이나 뭐 그런 놈들 보다가 저 놈들 보자니 정말 한심하구먼. 알았다, 내 이 원숭이 놈에게 물어보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기마병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는 사메지마에게 아르티어스는 은근슬쩍 물었다.
“이봐, 사메지마 상. 이런 거 말고 좀 더 대단한 볼거리는 없나? 여기 있는 병사들의 실력도 꽤 좋은 듯하지만, 아무래도…….”
아르티어스의 말에 사메지마는 드디어 덫에 걸렸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사실 무술 수련장은 보안이 철저한 영지의 중요 거점 중 한 곳이었다. 수련장의 시설이나 병사들의 훈련 모습을 보면 영지 병사들의 질과 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저 둘의 표정을 봤을 때, 이 정도는 양에도 안 차는 모양이었다.
‘만약 이들이 간자라면 도대체 어디서 보낸 것일까? 미나모토? 이시와라? 아니야……. 그들이 저렇듯 눈에 띄는 이방인을 간자로 보낼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혹시 간바쿠가 보낸 것일까? 흠, 나중에 두고 보면 알겠지.’
사메지마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입을 열었다.
“핫핫핫, 아무래도 병사들의 훈련 모습이 귀하들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사사키 겐지 선생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사사키 겐지? 그자는 뭐 하는 사람이오?”
“예, 북진일도류의 달인이시지요.”
그제서야 아르티어스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북진일도류라. 혹시 어제 내 아들한테 패한 무사도 북진일도류를 배웠다고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거요?”
“아, 맞습니다. 바로 그 무사를 가르친 분이죠.”
사메지마가 말하는 자의 실력이 대충 짐작이 되자, 아르티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무사의 실력을 보아하니, 스승의 실력도 그리 뛰어난 것처럼 생각되지는 않는데…….”
“그 무슨 실례의 말씀을, 사사키 겐지 선생은 영주님께서 특별히 초빙해 온 아주 이름 높은 검객이십니다. 연 수입이 무려 5백 코쿠나 나오는 토지까지 하사하시고, 이곳 성내에 도장을 열게 하셨소. 그분이 여기 정착한 지 겨우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에 어제와 같은 결과가 나왔을 뿐이죠.”
아르티어스는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사메지마를 보았다.
“호오, 그렇다면 기대가 되는데?”
사메지마는 성안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무술 도장으로 묵향과 아르티어스를 안내했다. 무술 도장 안에는 20여 명의 청년들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목검을 휘둘러 대며 검술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을 보던 사메지마는 자부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여기에서 수련하는 대부분의 청년들이 우리 영지 내에서 촉망받는 인재들이지요. 모두들 뛰어난 집안의 자제들이거든요. 아마 10년도 채 안 되어 우리 영지를 이끌어 갈 기둥들로 성장하게 될 겁니다.”
묵향이 같잖다는 듯 빙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던 한 젊은이가 목검을 쥔 채 다가왔다. 그는 사메지마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물었다.
“사메지마 상이 아니십니까?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무술 수련장에서 왠지 자신들을 얕보는 듯한 아르티어스의 말에 자존심이 상했던 사메지마는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사사키 선생은 어디에 계신가?”
“스승님께서는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혹시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사메지마는 안타까운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는 못했다. 어쨌건 지금 두 사람은 영주의 귀한 손님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 여기 계신 손님들이 도장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다네. 두 분 다 영주님의 귀하신 손님이시거든.”
사메지마는 약간은 낙담한 표정으로 뒤로 돌아서려 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사사키 선생이 없다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사메지마의 표정을 오해라도 했는지 그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검술을 배우시려고 하시는 건가요? 스승님께서 안 계실 때는 제가 문하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젊은이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사키 겐지 스승은 이 일대뿐만 아니라 야마토 전역에서도 꽤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렇기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성내에 도장을 열기 전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젊은이는 스승이 여기에 자리를 잡기 훨씬 전부터 그에게서 배운 수제자였던 것이다.
“그건 아닐세. 둘 다 상당한 실력자들이니까 말이야.”
“실력자라구요?”
젊은이는 묵향과 아르티어스를 새삼스럽다는 듯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이방인임이 확실한 생김새. 특히나 황금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소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젊은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묵향과 아르티어스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셔서 천천히 구경하시지요. 혹시 구경하시면서 다과라도 드시겠습니까?”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과는 됐고, 술이나 있으면 주게나. 목이 컬컬하구만.”
아르티어스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그게 젊은이가 듣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젊은이는 노기를 억누르며 대답했다.
“술…, 이라구요? 실례하지만, 여기는 신성한 수련장입니다. 술 따위를 준비해 놓지는 않습니다.”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기분이 팍 상했다. 드래곤으로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여기 오니까, 왜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 놈들이 많은지……. 순간 아르티어스의 머리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심심해 죽겠는데, 이 싸가지 없는 놈을 제물로 삼아 재미나 보면 어떨까? 잽싸게 머리를 굴린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가? 별로 대단한 것을 수련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되게 까다롭게 구는구만. 역시 실력도 없는 것들이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단 말이야. 뭐 없다면 별수 없지. 그럼, 과자라도 주게.”
아르티어스의 말을 듣고, 젊은이는 더 이상 치솟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르티어스의 말은 도장의 문하생은 물론이고, 자신의 스승까지 싸잡아서 욕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늘같은 스승님을 욕하는 놈을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 있다는 말인가? 젊은이는 이들이 영주의 손님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렇게 잘났으면 실력으로 증명해 봐라!”
아르티어스는 젊은 호비트가 자신이 던진 먹이를 덥석 무는 것을 회심의 미소를 짓고 바라봤다.
‘역시 하녀의 기억을 읽은 것은 너무나도 잘한 일이었어. 호비트의 관습만 안다면 가지고 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단 말이야.’
아르티어스는 슬쩍 묵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얘야, 쟤가 방금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냐?”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왜 갑자기 화를 벌컥 내는 거죠?”
“네가 너무나도 예뻐서 첫눈에 반했다고, 혹시 자신하고 결혼할 수 없겠느냐고 묻더구나.”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더불어 아르티어스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몹시 궁금했다. 무슨 대답을 들으면 저렇게 화가 나서 펄펄 뛰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아빠가 뭐라고 대답했기에 저 자식이 저러는 거예요?”
“뭐라고 대답하기는, 이 녀석은 내 아들이기에 당신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지. 그랬더니 저놈이 펄펄 뛰면서 그러는구나. 사내자식이 재수 없게 계집애처럼 생겨가지고 사람 헷갈리게 한다고 말이야.”
능청스러운 아르티어스의 말에 묵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외쳤다.
“뭐, 뭐라구요?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누구는 좋아서 이 꼴을 하고 다니고 있는 줄 알아?”
그러자 아르티어스는 젊은이를 향해 능청스레 말했다.
“우리 애가 그러는데, 꼴값 떨지 말고 가만히 있으래. 쉽게 말해, 그 정도 얄팍한 실력을 믿고 까불지 말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거지.”
아르티어스의 말을 들은 젊은이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이방인의 말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치솟는 분노에 치를 떨던 젊은이는 이내 싸늘한 안색으로 이방인 소녀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메지마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사태의 진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는 일견 말려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말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소녀는 어제 영주의 무사를 박살 냄으로써 주군의 체면에 먹칠을 한 상태였다. 그것을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저 젊은이는 어제 싸운 야스다보다 몇 등급 높은 검객이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저 아름다운 미소년의 진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도 조금이나마 있었다.
사메지마가 묵인하고 있는 가운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젊은이는 목검을 묵향에게 던져 주며 분노에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계집이라고 봐 주지 않을 테니 각오해라.”
그런 다음 묵향의 앞에 목검을 들고 서서 낮은 어조로 분노를 억누른 채 말했다. 어찌 되었건 공식 시합에는 예법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치솟는 분노 때문인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나는 사사키 겐지 선생님의 수제자 유스케라고 하오. 아직 수련하는 중이지만, 스승에 대한 무례는 참을 수 없기에 그대에게 승부를 청하는 바이오.”
묵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죽거렸다.
“새꺄! 알아듣지도 못할 욕 그만하고 빨리 덤벼! 반쯤 죽여 줄 테니까.”
곧이어 벌어진 대결에 사메지마는 경악감을 감출 수 없었다. 복수를 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유스케는 제대로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묵향의 목검에 머리통을 정통으로 맞고 뻗어 버린 것이다. 이미 뻗어 버린 상대를 묵향은 무자비하게도 목검으로 녹신녹신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메지마는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상대가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다니, 저 소년의 잔인한 행동은 사메지마가 알고 있는 무사도(武士道)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사메지마의 뇌리에 묵향은 아주 잔인한 소년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퍽! 퍽! 퍽!
“새꺄! 주제 파악을 해야지. 그 실력으로 내 앞에서 까불어? 오늘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잠시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하고 있던 사메지마는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아르티어스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아루테에스 상, 아드님을 좀 말려주십시오. 저러다가 사람 잡겠습니다.”
박력 있게 패고 있는 묵향의 모습을 좋아라 보고 있던 아르티어스는 마지못해 묵향에게 말했다.
“얘야, 좀 봐줘라. 그 녀석이 상처를 크게 입으면 내가 영주를 볼 낯이 없잖냐?”
그 말에 묵향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가 손에 힘을 주어 모질게 한 대 더 두들겨 팬 후, 목검을 던져 버리고는 손을 탈탈 털면서 말했다.
“언제 아빠가 그런 걱정한 적 있어요? 에잇, 젠장.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해서 왔다가 기분만 잡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