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침입자
“어? 이게 무슨 소리야?”
깊은 밤중에 묵향은 문득 잠에서 깼다. 주위를 둘레둘레 둘러봤지만, 결코 어디에도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묵향이 배정받은 방은 성내의 깊숙한 곳이었기에 달빛마저 스며들지 못했다. 하지만 복도에는 언제나 작은 등잔들이 밝혀져 있었다.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그 정도 불빛만으로도 묵향 같은 고수는 바닥에 떨어진 바늘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았다.
옆을 둘러 봤지만 아르티어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묵향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심 중얼거렸다.
“참, 영주가 방을 하나 더 줬었지.”
아르티어스는 아마도 옆방에서 퍼져 자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옆방에서 슬그머니 움직이고 있는 존재가 아르티어스일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뭐가 답답해서 저렇게 기척마저 죽인 채 살금살금 움직인단 말인가? 묵향의 손은 거의 본능적으로 머리맡으로 올라가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검이 없었지.”
투덜거리던 묵향은 이부자리를 박차고 옆방으로 뛰어들었다. 창호지문이 박살 나는 순간, 묵향은 경악한 듯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손에는 처음 보는 괴상한 표창 같은 것과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괴한은 그것을 써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묵향에게 목을 틀어잡히고 말았다. 거의 순간적인 접촉으로 상대의 혈도를 제압한 상태였기에 그의 양손은 무기를 쥔 채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젠장! 말을 알아야 심문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하지.”
묵향은 다리로 툭툭 아르티어스의 이부자리를 건드리며 말했다.
“아빠, 빨리 일어나 봐요.”
하지만 그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젠장, 또 어디로 간 거야?”
욕지거리를 내뱉는 순간, 괴한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는 듯하더니 흰자위를 드러내며 축 처져 버렸다. 묵향은 이미 그 괴한이 절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괴한의 등에는 표창 한 개가 박혀 있었다. 묵향은 시체를 내던진 후, 옆방을 구분하고 있는 창호지 문을 박살 내며 돌진해 들어갔다.
“또 한 명 더 있었냐?”
바로 그 옆방에는 다섯 명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부자리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내가 아무리 술에 취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방심했어. 주변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이때 어둠 속 저편에서 아주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 피리 소리에 화답하듯 몇 번인가 피리 소리가 울렸다.
묵향은 상대가 도망치며 흘리는 미세한 흔적을 따라 엄청난 속도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묵향의 발에 따끔하는 것이 있었다.
“으갸갸! 이게 뭐야?”
밑을 바라보니 꽤 넓은 거리를 두고 철질려(鐵?藜 : 마름쇠)가 뿌려져 있었다.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네 개의 발을 가진 철질려는 안 그래도 눈에 잘 띄지 않는데, 거기에다가 시커먼 칠까지 칠해져 있었다.
묵향은 발바닥을 뚫고 들어온 철질려를 인상을 찌푸리며 뽑아냈다. 내공을 이용하여 독을 밀어내자 철질려가 뽑혀 나온 작은 상처에서 시커먼 피가 몇 방울인가 흘러나왔다.
“이런 젠장! 별 추잡스러운 짓을 다 하는군. 이제 걸리기만 해 봐라. 아예 죽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오게 해 주지.”
묵향이 다시 몸을 날렸을 때, 그의 발은 땅바닥에 아예 닿지도 않았다. 초상비(草上飛)보다도 한 단계 높다는 능공허도(能空虛徒)의 신법이었다.
묵향이 문을 부수며 달려가기 시작하자, 각 방에서 자고 있던 무사들이 무슨 일인가하여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일부는 “닌자”라고 떠들어 대며 묵향을 따라 달려갔다. 그들이 묵향을 닌자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닌자가 달아나는 것을 보고 따라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묵향처럼 허공을 밟고 달려가는 재주가 없었다. 사방에서 뛰어나온 무사들은 닌자가 뿌려 놓은 암기를 밟고 죽어 나자빠졌다.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길을 차단하며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처음 마름쇠를 뿌린 다음부터 오히려 창호지문이 박살 나는 소리는 더욱 빠르게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괴한은 처음에는 반항할까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동료가 순식간에 제압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오히려 적에게 사로잡힐 가능성이 훨씬 컸다. 상대는 정말이지 꿈에서조차 만나기 싫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병법자였던 것이다.
괴한은 곧장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괴한의 손은 아무런 떨림도 없이 스스로의 목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갔다.
묵향은 자신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의 시체 한 구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무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 뭐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여기저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묵향은 자신의 목 깊숙이 단검을 찔러 넣고 죽어 있는 괴한의 시체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쌓은 자객이었다. 아무리 묵향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거의 지척에까지 다가왔던 자였다. 그런 뛰어난 자객의 종말치고는 너무 허무한 감이 있었다.
이때 주위를 둘러보던 무사들 중에서 제법 비싸 보이는 고급 옷감으로 옷을 해 입은 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묵향에게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무사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훑어보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은 뻔한 것이었다. 묵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괜찮아, 새꺄.”
묵향은 털레털레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투덜거렸다.
“그런데 아빠는 어디로 갔지? 젠장, 저놈들이 혹시 아빠를 잡아 간 게 아닐까? 설마 아직까지도 겁이 나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천천히 방으로 돌아가는 묵향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깔려 있었다.
영주의 부름을 받은 사메지마는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급하게 준비를 갖춰 성의 2층에 마련되어 있는 알현실로 허둥지등 달려왔다. 그는 알현실로 올라오는 도중에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알현실로 올라가는 도중에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쓴 닌자의 시체 몇 구를 치우는 무사를 보며 사메지마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달이 뜨지 않는 날을 택해,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감행된 닌자들의 기습 공격. 그나마 미리 경계 태세를 강화해 뒀던 것이 다행이었다. 사메지마는 알현실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어딘가로 걸어가는 요시나가를 발견했다. 사메지마는 얼른 그를 불러 세웠다.
“요시나가 상.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 사메지마 상이셨군요. 한밤중에 닌자들의 기습 공격이 있었습니다. 겨우 막아 내기는 했지만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피해가 만만치 않다는 말에 사메지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피해가 심각한가요?”
“거의 1백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정말이지, 목숨을 버리고 달려드는 닌자들의 공격은 무섭군요.”
병사들의 희생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크자 사메지마는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부상자는?”
“부상자는 거의 없습니다. 닌자들의 무기에 독이 발려 있었기에 약간의 상처라도 치명상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 사방을 수색하면서 혹시 닌자들이 뿌려놓은 마름쇠 같은 것이 남아 있나 확인하는 중입니다. 단 한 개라도 놓친다면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요시나가 상. 그럼 수고하십시오.”
“예, 사메지마 상.”
영주는 알현실 상석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 위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영주도 자다가 일어나서 그런지, 취침용 옷을 입고 있었다. 사메지마는 깊숙이 절을 한 후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자네도 오면서 닌자들의 기습 공격이 있었단 말은 들었겠지?”
“옛.”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닌자의 공격은 두 방향으로 행해졌네. 한 패거리는 나를 목표로, 또 다른 한 패거리는 이방인들을 향해서 말일세.”
영주의 말에 사메지마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이방인들에게도 공격이 가해졌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닌자는 나를 목표로 세 명, 이방인을 목표로 두 명이 침입했어. 물론 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처치한 숫자가 그렇다는 말일세. 하지만 단 한 명도 사로잡지 못했기에 배후를 캘 도리가 없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사메지마는 곧 입을 열었다.
“주군, 만약 그들의 공격이 주군과 이방인을 향한 것이었음이 확실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많은 가정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옛. 그들이 주군을 해칠 의도였음이 확실하다면 그 범인은 영지 주위에 있는 영주들이 행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돌아가신다면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니까 말입니다.”
영주는 자신의 생각도 그러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럴듯하군. 그리고?”
“옛.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주군을 해칠 만한 영주는 두 명으로 압축됩니다. 겐페이의 미나모토 대영주와 요시노의 이시와라 대영주지요. 하지만 저는 미나모토 대영주가 범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지와라 영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멍하니 있다 미간에 주름살을 만들며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 이유는?”
“이시와라 대영주의 경우, 영주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시와라 대영주는 주군께서 미나모토 대영주의 명령을 건성으로 듣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것입니다. 이시와라 대영주도 이곳에 간자들을 심어 놨을 테니까요. 그리고 좀 더 나가서 주군께서 계심으로 인해 뒤를 확실하게 믿기 힘든 미나모토 대영주가 이시와라 대영주와 정면 대결을 할 수 없다는 점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지 않을까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미나모토 대영주는 영주님께서 돌아가신다면 대단한 득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영주님께서 돌아가신다면 미나모토 대영주는 압력을 가해, 자신들이 볼모로 잡고 있는 요시스네 도련님을 후계자로 내세울 것이 확실합니다. 주군께서 만약 돌아가신다면 영지 내의 모든 무사들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릴 테고, 미나모토 대영주는 손쉽게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식적으로 선포된 주군의 후계자는 요시스네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후지와라 영주는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지 사메지마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거칠게 대꾸했다.
“그래, 일이 그 지경까지 된다면 미야모토가 그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겠지.”
“바로 그것입니다. 요시스네 도련님의 부인은 미나모토 대영주의 여식이 아닙니까? 미나모토 대영주는 장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요시스네 도련님께 사사건건 간섭해 올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리고 어쩌면, 요시스네 도련님까지 암살해 버린 후에 도련님의 아들, 그러니까 대영주의 외손자를 영주직에 올리겠죠. 그런 후에 자신의 딸을 섭정으로 올려놓으면 완전히 후지와라 가는 미나모토 대영주의 손아귀에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흐음, 그럴 테지.”
후지와라 영주가 자신의 의견에 찬성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사메지마는 더욱 힘을 내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범인을 미나모토 대영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외국인들에 대한 공격은 어떻게 생각하나?”
“어쩌면 미나모토 대영주도 외국인의 존재를 간자를 통해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이쪽에서 밀무역이라도 하려는 생각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암살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납치를 하려고 했거나…….”
“납치? 그렇지. 아루테에스라는 이방인은 지금도 그 술집에 있나?”
갑자기 아르티어스가 사라졌기에 당황한 것은 묵향뿐만이 아니었다. 마사코는 즉시 그 사실을 사메지마에게 보고했고, 사메지마는 그에 대한 조처를 재빨리 취했던 것이다.
“옛! 적당하게 사람을 붙여 뒀으니 그자의 신변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루테에스라는 이방인이 이번 닌자 침입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아닐까요? 그가 사라진 것과 닌자의 침입이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가 성내의 사정이라든지 뭐 여러 가지 정보를 닌자에게 흘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자네가 너무 앞서 나가는 게 아닐까? 그가 닌자에게 정보를 흘렸다면 왜 닌자들이 그 다쿠라는 이방인을 공격했다는 말인가? 닌자 둘이 그 소년 때문에 죽었어. 만약 이방인이 첩자라면 닌자들은 모든 세력을 나에게 집중했을 걸세. 그 말은 다쿠라는 소년이 닌자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는 증거가 될 테지. 안 그런가?”
“옛, 제가 생각이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사메지마는 이쯤에서 물러섰다. 이방인이 외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은 영주에게 이방인이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달했고, 영주도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닐까?
“주군, 이번 닌자의 습격을 통해 닌자들의 무서움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닌자들을 제압하는 데는 닌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주군. 닌자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사메지마의 말에 영주는 얼굴을 굳히며 노성을 터뜨렸다.
“닥쳐라.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가? 내가 닌자를 얼마나 혐오하는 줄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하는가? 닌자를 쓰는 것은 사내로서 가장 추잡스러운 짓이야. 내 주위의 경호를 두 배로 늘려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알겠느냐? 다시는 닌자 따위 입에도 올리지 말도록 해라.”
“옛, 주군. 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나머지는 내일 날이 밝은 후에 하기로 하지.”
“옛, 주군.”
사메지마는 경호병들이 보내는 지지를 받으며 천천히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경호병들도 영주가 닌자를 키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아주 변칙적인 공격법을 몸에 익힌 닌자를 정규적인 수련을 쌓은 무사들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심복인 사메지마가 물러가고 난 다음, 영주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메지마의 말을 듣고 보니 모든 일은 10년 전부터 시작된 듯했다. 후지와라 영주는 그때가 갑자기 생각났다.
미나모토 대영주는 10년 전, 이웃 영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이번에 해적 침입 사건으로 떠들썩한 고다이 영지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고다이 영지를 완전 병합하는 것은 그 당시 막 대규모 전쟁을 끝낸 직후인 미야모토 대영주의 힘만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미나모토 대영주는 자신의 사촌동생을 고다이 영지의 영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일단 고다이 영지를 자신의 편으로 확보하고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미나모토 대영주의 힘은 그전보다 더욱 막강해졌다. 고다이 영지가 안정되자 그다음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곳이 후지와라 영주가 다스리는 미우다 영지였다.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힘을 비축하고 있기는 했지만,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없었던 미나모토 대영주는 수많은 궁리를 해 보다가 후지와라 영주에게 공식적으로 중개인을 파견했다. 후지와라 영주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제의를 받은 후지와라 영주는 이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제안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이유가 미나모토 대영주의 딸이 이미 결혼했고, 아이까지 둘이나 낳은 유부녀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청혼이 성립되는 대로 미나모토 대영주는 자신의 딸을 이혼시킬 것이니 말이다.
후지와라 영주가 당황한 것은 그 청혼에 숨겨져 있는 교묘한 함정 때문이었다. 만약 청혼을 거절한다면? 아마 그것을 명분으로 미나모토 대영주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또, 청혼을 허락한다면? 그렇다면 후지와라 영주는 미나모토 대영주의 사위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사위가 장인 말을 안 듣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건 사위가 힘이 있을 때 얘기지, 현재처럼 군사력이 세 배 정도 차이가 날 때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주위의 평판도 말 안 듣는 사위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닌가? 그 결혼을 성사시키기만 하면, 미나모토 대영주는 후지와라 영주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지위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후지와라 영주는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미야모토 대영주와 결혼하는 대상을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아들로 바꿔 버렸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후지와라 영주가 미야모토 대영주의 딸과 결혼하는 아들을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선언하겠다는 제안을 하자 그는 딸과의 결혼을 허락했다.
미나모토 대영주의 딸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즉시 이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나모토 대영주의 가신이었던 사위는 이혼 명령과 함께 셋푸쿠를 하라는 지시가 함께 떨어지지 않은 것을 부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부인을 즉각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성대한 결혼식이 치러졌다.
결혼식이 끝난 뒤, 대영주의 딸과 결혼한 후지와라 영주의 첫째 아들은 부인과 함께 미나모토 대영주에게로 보내졌다. 시집간 딸이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이유를 붙여서 말이다. 사실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일 뿐, 후지와라가의 후계자를 볼모로 잡아 둔 것이었다.
이로서 후지와라 영주는 미나모토 대영주의 간섭을 일단 배제할 수 있었다. 서로의 아들과 딸이 결혼한 사돈지간이 되었기에, 아무래도 드러내놓고 사사건건 간섭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나모토 대영주는 자신의 외손자가 영주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는 지루했던 모양이다. 닌자들을 보낸 것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