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活人劍(활인검)」
내실의 벽 한쪽에는 커다란 족자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려한 필치로 「活人劍」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묵향의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크하하하하핫!”
갑자기 묵향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중원의 글자를 쓴다는 것은 곧 중원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기쁨에 들뜬 묵향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자, 제어되지 못한 공력이 사사키의 도장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사사키의 도장이 요동쳤다. 도장의 생도들은 귀를 틀어막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단 두 명.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사사키는 오랜 수련을 쌓은 무인답게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참아 내고 있었다. 묵향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강한 불신이 어려 있었다. 저것이 도대체 인간이란 말인가?
사사키에 비해 아르티어스는 멀뚱히 묵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이 녀석이 미쳤나? 도대체 아들놈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기 힘든 아르티어스 어르신이었다.
묵향의 웃음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웃음을 멈춘 묵향은 고개를 획 돌려 아르티어스를 노려봤다. 불타오르는 듯한 묵향의 시선에 아르티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도대체 왜?’
아르티어스를 한참 노려보던 묵향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죠?”
아르티어스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을 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아르티어스의 눈에 한자가 쓰인 족자가 보였다.
‘이런 젠장! 저것 때문이었군.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다 영주에게 부탁해서 없애 버렸는데, 설마 여기에도 있었을 줄이야…….’
아르티어스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왜 나를 속였던 거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아들을 보며, 난감하기만 하던 아르티어스.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던 그에게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끝내 주는 생각이 말이다. 아르티어스는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쉰 후 진지하게 말했다.
“휴∼! 내가 너를 속이고 싶어서 속였던 것은 아니다.”
“그럼 뭐예요?”
“그게 말이지. 여기서 말하는 대국(大國)이라는 게 바로 네가 가고 싶어 하는 송나라란다. 그런데 그곳과 여기는 아주 넓고 험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바다라는 말에 묵향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그런데 알다시피 너는 뱃멀미가 심하잖니. 그래서 네가 너무 상심해할까 봐 숨기고 있었던 거란다.”
그 말에 묵향은 풀이 죽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죠?”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대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맹세만 해라. 그럼 내가 곧장 그곳까지 빠르면서도 편안하게 실어다 주마. 물론 아주 빠르게 말이다. 어때?”
“이런 제기랄!”
숙소로 돌아온 후에도 묵향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찾은 것이다. 묵향은 숙소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때는 완연한 봄이었다. 숙소 앞 작은 정원에는 이름 모를 화초들이 저마다 소담한 꽃을 피워 내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에 심어진 작은 벚나무에서는 몇 개 남지 않은 하얀 꽃잎들이 눈처럼 떨어져, 바닥에 점점이 흰 점을 수놓고 있었다.
묵향의 가슴은 두근거렸지만, 그의 차가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바다……. 그놈의 바다가 문제였다. 묵향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흰 점이 군데군데 찍혀 있기는 했지만, 하늘은 파랗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고생했던 그 망할 놈의 바다처럼.
“젠장, 날씨 한번 더럽게 좋구먼.”
무심결에 묵향은 그 말을 중원의 언어로 내뱉었다. 아마도 중원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때 자신의 곁에 서 있던 하녀가 살짝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을 묵향은 놓치지 않았다.
마사코 또한 여태껏 자신의 상전들이 단 한 번도 중원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무심결에 그에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곧장 마사코에게 날아왔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계집이 송나라 말을 알고 있었잖아.”
마사코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대답했다. 그녀의 억양은 중원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간드러지는 것이었다.
“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물어보시지 않으셨기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이 맞기는 했다. 뭔가 속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랬지. 그건 내 실수였어.”
마사코는 변명을 늘어놨다.
“영주님께서는 중원에서 오신 분들이라고 그쪽 말을 할 줄 아는 저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이상한 나라의 말을 쓰시는지라, 혹여 대국 말을 모르시는 줄 알고…….”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묵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맞아, 듣고 보니 그렇군.”
잠시 뭔가 골똘히 생각한 다음, 묵향은 그녀에게 말했다.
“대국은 어느 쪽에 있느냐?”
“제가 듣기로는 서쪽으로 오랫동안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여기서 북쪽으로 항해해서 고려에 도착한 다음 거기서 육로나 해로로 갑니다.”
“그랬군, 그랬어. 처음부터 잘못 온 거였어…….”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묵향은 문득 마사코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국으로 가는 배는 어디서 탈 수 있지?”
“대국으로 가시게 말입니까?”
“물론이지.”
마사코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배는 후쿠오카로 가면 타실 수 있을 겁니다. 무역은 그곳에서만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국으로 바로 가는 배는 없고, 고려로 가는 배라면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려라…….”
마사코는 묵향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그건 왜 묻느냐?”
수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던지고 있는 묵향을 향해, 마사코는 변명을 늘어놨다. 그녀는 대국과의 밀무역을 위해 영주가 키운 가신들 중의 하나였다. 대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온 지금 그녀는 그것을 놓칠 수 없었다. 일단 그 이후의 상황은 대국에 도착한 후에 천천히 궁리를 해 보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저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뭐? 네가 왜 따라오겠다는 거냐?”
“저는 영주님께서 주인님께 하사하신 몸종이니까요.”
“자신의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아무리 영주의 명령이 그렇다고 해도 굳이 나를 따라나설 필요는 없다. 영주한테는 내가 잘 말해 주겠다.”
말을 하는 묵향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사코를 설득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사코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가고 싶습니다.”
묵향은 잠시 하나코를 지그시 바라봤다.
‘왜 따라오겠다는 것일까? 가 봐야 뭐 좋은 일이 있다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따라온다면 그것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어를 할 줄 아는 자는 쉽게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왜국어를 할 줄 아는 자는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 만큼 왜국어와 한어를 함께 구사할 수 있는 그녀라면 아주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정 따라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옥화 봉공 매향옥
당당한 체구의 중년 사내가 다가오자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황급히 예를 올렸다. 그런 무사들을 힐끗 바라보며 여유로운 어조로 중년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맹주님께서는 계시느냐?”
“옛, 기별을 넣어드리겠습니다.”
무사들 중의 한 명이 문 쪽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맹주님, 매화문검(梅花雯劍) 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라고 해라.”
“옛.”
무사들은 문을 활짝 연 후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드시지요.”
문이 열리자 드러나는 대전은 너무나도 넓고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금과 은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용과 봉의 형상이 대전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뭔가 허전한 듯한 공간에는 어김없이 고금 명필들의 글이나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대전의 한쪽에는 높직한 단상에 호화로운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는 이 무림맹에서 오직 한 사람, 맹주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맹주는 거기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실내로 들어서고 있는 매화문검 장로를 향해 위엄 있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맹주는 포권을 올리는 장로의 손을 포근히 감싸 쥐며 말했다.
“무량수불, 원로(元老)에 묘강 땅까지 들어가서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가. 자 이쪽에 앉게나.”
맹주라는 지위로 봤을 때, 이것은 과분할 정도의 환대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매화문검 장로라는 사내는 그 정도의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가 바로 실종된 전대 맹주의 아들인 옥진호(玉振湖)였기 때문이다.
맹주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옥진호 장로는 공손하게 말했다.
“맹주님의 과분하신 환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량수불, 과분하다니 당치도 않소이다. 혈교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그토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맹주님의 치하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옥진호 장로는 저 멀리 묘강에서 있었던 격전에 대해 간략하게 보고를 올렸다. 물론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맹주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작전을 지휘했던 옥진호 장로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맹주라는 직책상 옥진호 장로가 보내온 보고서는 물론이고, 감찰이나 첩자들이 보내오는 각종 정보를 종합적으로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혈교 토벌의 최고 책임자였던 옥진호 장로가 한참 최종 보고 겸 자신의 공적에 대해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밖에서 경비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옥화 봉공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에 보고를 올리고 있던 옥진호 장로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옥화 봉공. 바로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을 일컫는 명칭이 아닌가?
전대 맹주인 무극검황(無極劍皇) 옥청학(玉靑鶴)이 실종되자 무림맹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무림맹을 이끌어 나가는 수장이 실종되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새로운 맹주를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옥청학이 심어 놓은 무림맹의 장로들은 그 시기를 계속 뒤로 미루고 있었다. 무공이 높은 옥청학인 만큼 혹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맹주의 실종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서둘러 폐관 수련에 들어간 옥청학의 아들 옥진호가 화경을 깨닫게 되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이다. 장로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몇 년 동안이나 계속 시간을 끌었다.
맹주의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저마다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선, 무당파의 은거고수인 태극검제(太極劍帝) 청영(淸瑩)과 곤륜의 은거고수 곤륜무제(崑崙武帝) 진량(陳亮), 그리고 서문세가의 가주인 수라도제(修羅刀帝) 서문길제(西門吉制)가 거론되었다.
모두 다 명문의 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의 한 명이 맹주가 된다면, 옥청학 맹주의 입김으로 인해 공동파가 독식하고 있던 무림맹 수뇌부 자리는 대폭 물갈이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게다가 특히나 수라도제의 경우 명문이라고는 하지만 방계인 5대세가의 가주였다. 지금까지 무림맹주는 최고의 명문이라 자부하는 9파에서만 배출되었다. 아무리 세력이 강성하다고 하지만 서문세가 따위에게 맹주의 자리를 양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옥화무제(玉花武帝) 매향옥(梅香玉)은 후보들 중에서 가장 약한 세력권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장로들이 원하는 최적의 맹주감이었다. 지닌 세력이 별 볼일 없으니 적당히 뒤에서 요리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겠는가? 또 무영문에는 무림맹의 정예들을 이끌 만한 막강한 고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맹주가 된다면 현재의 수뇌부들이 자리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게 될 공산이 컸다.
하지만 무림맹의 장로들은 그렇게 드러난 겉모습만 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별의별 욕을 다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 뛰어난 여걸이었다. 강호에서 ‘범죄의 온상’ 정도로 치부되던 무영문을 당당한 1류문파로 재탄생시켰다. 이것만 해도 아무나 이룩하기 힘든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시간을 쪼개어 무공연마에도 힘썼다. 물론, 무영문이 정보 단체인 만큼 우수한 비급을 획득한 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비급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화경의 대열에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약간이라도 대가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이 점을 놓치지 않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바로 그런 이유로 장로원은 처음부터 그녀를 맹주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무공을 고려하여 후보자 명단에만 올려놨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론된 후보가 매화문검 옥진호였다. 명문인 공동파의 후예일 뿐 아니라 실종된 옥청학의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무림맹 수뇌부로서는 그가 맹주가 되기를 가장 원했다.
하지만 옥진호에게는 무공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의 약점이 있었다. 무림맹주가 되려면 최소한 그 무위가 화경은 되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그때 마교를 장악하고 있던 교주는 흑살마제(黑殺魔帝) 장인걸(張仁傑)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묵향이었다. 극마도 아닌 탈마의 경지에 다다른 자가 교주가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어찌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옥진호가 옥화무제에 대해 편치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식적인 경합을 벌여 맹주 후보에서 탈락했다면 그녀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그녀가 옥진호가 맹주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맹주 선출을 질질 끌고 있던 장로회에 맹주가 사망했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확실한 물증까지 가지고 말이다. 그 물증이라는 것은 그녀가 묵향으로부터 건네받은 맹주의 신물(信物) 빙백수룡검(氷白水龍劍)이었다.
그 시점에서 옥진호는 맹주 후보에서 탈락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화경에도 들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날 한순간 화경에 들 수도 있었기에 마냥 기다리고 있던 장로원도 더 이상 기다릴 명분이 사라졌다. 이제 바야흐로 네 명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맹주가 되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장로원과 뒷거래를 시작했다. 맹주 후보에서 자진 사퇴하고, 또 신물인 빙백수룡검을 줄 테니 봉공의 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봉공’은 모든 무림의 원로들이 받기를 바라 마지않는 가장 영광스러운 명예직이었다. 현재 단 두 명밖에 없는 봉공은 무림맹주에 버금갈 정도의 권위와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명예직인 만큼 실질적인 힘은 없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장로원에서는 선뜻 그것을 승낙했다.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너무나도 거절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장로원의 우려와 달리 옥화무제가 원했던 것은 힘이 아니었다. 저 음지에서부터 커 나온 무영문이 양지에 우뚝 서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옥화무제가 맹주직이라는 권력을 버림으로 해서,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무영문은 정파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으로 세인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다.
“옥화 봉공께서 오셨으니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미 보고서들을 통해 상세한 것은 아실 테니 더 이상 보고드릴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맹주는 옥진호 장로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지 선뜻 허락했다. 하지만 맹주의 대답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듬뿍 배여 있었다.
“허어, 이거 그러고 보니 먼 길을 원정하고 돌아온 사람을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구먼. 무량수불…, 먼 여정에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다음에 시간나면 묘강 땅에서의 무용담이라도 들려주게나.”
옥진호는 맹주의 따뜻한 배려에 감격했다.
“마음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