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4화 (400/930)

옥진호 장로가 나간 후 곧이어 옥화무제가 들어왔다. 그녀는 옥이 구르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맹주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무량수불, 무슨 말씀을……. 여러 가지로 바쁠 텐데, 이렇듯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구려. 자, 이쪽으로 앉으시게나.”

“예.”

옥화무제는 자리에 앉아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오늘 찾아뵌 것은, 긴히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량수불…, 무슨 일이기에 직접 오셨는가? 나쁜 소식이 아니면 좋으련만…….”

옥화무제는 잠시 맹주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쁜 소식입니다. 마교의 군사였던 마뇌(魔腦) 설무지가 두 달 전에 병사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맹주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무량수불, 뛰어난 인물이 세상을 등진 것은 분명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마교의 두뇌가 죽었다는 것이 어찌 나쁜 소식일 수가 있는지 노부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드오.”

“왜냐하면 그는 마교의 중원 진출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맹주도 깨닫는 바가 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침중한 안색을 띠었다.

“그가 죽었으니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무림의 정세는 크게 바뀔 것입니다. 어쩌면 벌써 누군가가 실권을 쥐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죠. 만약 호전적인 인물이 마뇌의 뒤를 잇게 된다면 무림은 피에 잠기게 될 거에요. 그래서 오늘은 그에 대한 대비도 조금은 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몇 가지 의논드리려고 찾아뵌 것입니다.”

잠시 맹주의 안색을 살피던 옥화무제는 요 근래에 무영문이 수집한 정보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내는 호숫가에 서서 하염없이 수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홍택호(洪澤湖)는 너무나도 큰 호수라서 그런지 꼭 바다처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물론 바다의 파도에 비한다면 그 규모가 작았지만, 도무지 호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가슴이 탁 트이도록 드넓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내의 가슴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투명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어? 또 만났네요.”

그 순간 사내의 안색이 팍 일그러졌다. 주점에서 홍택호까지 걸어오는 동안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이 뒤따라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홍택호 일대 또한 동정호에 못지않은 유명한 장소였기에 우연히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사내는 자신의 옆에 푹 박혀 있던 거대한 도를 한 손으로 쑥 잡아 뽑은 후, 다시금 등에 걸쳐 멨다. 그는 상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따라오며, 소년의 맑은 음성이 이어졌다.

“이봐요, 인사를 했으면 최소한 대꾸는 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

“혼자 여행한다면 말벗이 필요하지 않아요?”

“…….”

사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대답은 기대도 안 한다는 듯 소년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여기 경치 참 좋네요. 이렇게 넓은 호수는 처음 봐요. 바다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넓죠?”

소년의 말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사내의 인내심도 천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이 사내의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소년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갑자기 뒤로 획 돌아서며 소년을 노려봤다. 인상을 쓰지 않더라도 사내의 얼굴은 매서운 뭔가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텁수룩한 수염에다가 다부진 턱선, 게다가 무공을 얼마나 연마했는지 태양혈이 불끈 솟아올라 있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소년은 찔끔한 듯한 기색이었지만 곧이어 지지 않겠다는 듯 밝은 어조로 말을 걸었다.

“오늘 밤은 어디서 잘 거죠? 기왕이면 경치가 좋은 곳이었으면 좋겠는데요.”

“너 오늘 죽고 싶어서 작정했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나 여행이나 같이 하자는 건데 말이에요.”

“이런 젠장! 나는 지금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단 말이다. 그리고 너 같은 꼬맹이를 데리고 여행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 알겠나?”

사내가 뒤돌아서서 다시금 걸어가기 시작하자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뒤따라왔다.

“그러면 잠시 생각하실 여유를 드릴게요. 그런 다음 오늘 저녁에 술이나 한잔 나누면서 얘기를 하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술이 최고가 아니겠어요?”

“이런 썅!”

사내는 확 뒤돌아서며 소년이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갈겨 버렸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흑마가 비명을 지를 여유도 없이 철퍼덕 뻗어 버렸다. 소년이 주저앉는 말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 뒤편에서 말을 타고 따르고 있던 무사들이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재빨리 말 등을 박차고 올라 몸을 날렸다.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는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몸놀림으로 날아오르더니 소년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의 수련 상태를 말해 주듯 매끄러운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소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사내를 향해 덮쳐 갔다.

갑작스런 무사의 공격을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사내는 등 뒤의 도를 슬쩍 뽑아 들었다. 물론 도를 완전히 뽑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며 아직 등에 메여 있는 도를 이용해 적의 공격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캉―!

사내의 도를 검으로 찍고 그 반동을 이용해서 한 바퀴 몸을 날린 후 착지한 무사가 재빨리 돌진하며 두 번째 공격을 가하고 있을 때였다.

“그만!”

횡으로 그어지던 무사의 육중한 검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췄다. 놀라운 숙련도였다. 소년은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소년을 품에서 내려놓은 무사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갑작스런 일이라서 손을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흑아(黑娥)를 해친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무사의 어투는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웠지만, 그의 눈은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상관이 큰일을 겪을 뻔한 것이다. 소년의 발이 쓰러지는 말의 몸통에 깔렸다면 틀림없이 부러졌을 것이다.

설혹 그런 화를 피한다고 해도, 그 높이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쳤을 때의 충격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사는 그런 위험한 일을 행한 상대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상관은 귀하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무사에게 지시를 내리기 전에 먼저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에 받은 충격을 말해 주듯 소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에는 등에 메고 있던 그 거대한 도가 매우 가벼운 소검이나 되는 듯 가볍게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또 다른 무사가 사내의 뒤편으로 보였다.

사내는 잠시 소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속 귀찮게 굴면 기절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겠다.”

그런 다음 사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도를 등에 걸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소년은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창백해진 입술을 꼭 깨물고 서 있었다. 그 두 사람 사이로 살며시 미풍이 불어왔다.

그놈의 술 때문에

사내는 널찍한 객점의 정원 한켠에 앉아 멍하니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이런 식으로 현실 도피를 하지 않고서는 갑갑해져 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현재 자신의 처지나 문파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것은 분명한 일. 하다못해 달이라도 보고 있으면 그런 시름이 줄어들기에 정원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호오! 여기서 또 뵙는군요.”

밝고 상쾌한 음성이었지만, 사내의 귀에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내의 안색이 일순간 확 찌그러졌다.

사내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획 돌리니, 그곳에는 낮에 봤던 그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앞에는 단출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저 뒤편에는 두 명의 무사가 싸늘한 눈초리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는 도대체 나하고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렇게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히는 거냐?”

사내의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소년의 대답은 능청스럽기 그지없었다.

“누가 따라다닌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저 호객꾼의 소개로 전망 좋고 깨끗하며 더욱이 가격까지 싼 객점이 있다고 해서 들어왔을 뿐입니다. 설마, 형장께서 이 객점을 아예 전세 놓은 것은 아니시겠죠? 호객꾼에게서 그런 말은 못 들었거든요.”

일리 있는 대답이었다. 사내가 선뜻 뭐라고 대꾸하기가 어려워 가만히 있는 동안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방 안에 있다가 하도 달이 밝아서 술 한 상 차려 들고 달구경 나온 참입니다. 설마 제가 달구경하는 게 형장에게 폐가 된다고 주장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이런 젠장.’

뭐라고 대꾸는 못 하고 욕설을 속으로 씹어 삼키고 있는데, 소년은 사내를 잠시 바라보더니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형장도 뭔가 가슴속에 묻어 놓은 응어리가 있는 모양인데, 같이 술이나 한잔하면서 푸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달도 밝고, 소박하지만 술이 있고, 또 하소연을 들어 줄 귀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사양하지 마시고…….”

하지만 사내는 더 이상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어?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벌써 형장과는 오늘 세 번이나 만나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면 보통 인연이 아니지요. 어쩌면 형장과 나는 전생에 형제였을지도 모를 일 아니오. 안 그래요? 그런 깊은 인연이 있을진대, 달을 벗 삼아 박주라도 함께 나누며 우애를 돈독하게 다지는 것이…….”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사내는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획 돌려 소년에게 으르렁거렸다.

“으으…, 이런 빌어먹을! 잘 들어, 꼬맹아. 나는 지금 여러 가지 일로 머릿속이 복잡하단 말이다. 너하고 놀 시간 따위는 단 일각도 없어. 알겠어?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란 말이다. 다음에 또다시 친한 척하며 내 시간을 방해하면 아예 그 아가리를 찢어 주마.”

발걸음을 쿵쿵 울리며 멀어져 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생긋 미소를 보냈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뭐, 계속 돌을 던지다 보면 수면에 파문이 일기 시작하겠지. 특히나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더 잘된 거 아니겠어?”

사내가 사라진 후, 무사들이 슬그머니 소년에게 다가왔다.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겉옷을 소년의 등에 살며시 걸쳐 주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아니, 달빛도 밝은데 잠시 더 있겠어.”

“예, 그런데 저놈은 왜 따라가시려는 겁니까?”

무사의 말에 소년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꿈꾸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나는 무림이라는 것을 보고 싶어. 그들이 왜 그렇게 자유스러운 것인지 말이야.”

소년의 말에 무사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살짝 뒤로 물러섰다. 무사는 휘황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달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자유가 문제였군. 그놈의 자유가…….”

본의 아니게 정원에서 나온 사내가 갈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은 후, 등에 메고 있던 거도(巨刀)를 침상 옆에 세워 뒀다. 그런 다음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침실 천장의 단조로운 무늬뿐…….

곧이어 여러 가지 잡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갑갑해져 오는 가슴. 이래서 정원에 나갔던 것인데…….

장로들은 정통성을 주장하며 형이 가문을 이끌기를 원했다. 형은 무공 실력도 뛰어날뿐더러 가문을 이끌어 가는 능력 또한 출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문을 이끌어 나갈 차기 문주로서 정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전(秘傳) 중의 비전으로서 문주에게만 전승된다는 회류도법(回流刀法)의 후 4식까지 전수받았다. 게다가 형과의 나이 차이는 거의 15년. 형은 한 문파를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딴것은 다 형이 뛰어난데도, 무공 하나만큼은 동생 쪽이 앞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15년이나 나이 차가 나는 동생이, 그것도 가문 최강의 도법을 전수받은 형보다 무공이 앞선다는 개 같은 사태가 말이다.

그 때문에 젊은 문도들은 사내가 차기 문주가 될 것을 원했다.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끝내 가문은 두 토막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젠장!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솔직히 하소연을 들어 줄 귀는 달갑지 않지만, 술에 대한 제안은 솔깃했는데 말이야.”

중얼거리던 사내는 한편으로 지금 따라붙고 있는 소년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능청스러운 듯하면서도 정중했고, 또 소년과 이리저리 감정싸움을 하다 보니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가문의 문제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냥 못 이기는 척하고 함께 여행할까? 아니야. 귀찮기만 할 뿐이지.”

사내는 침상 옆에 놔뒀던 도를 집어 들며 신경질적으로 일어섰다.

“에잇! 젠장, 괜히 술 생각나게 만들어 가지고……. 아직 문을 연 객잔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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