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문을 열어 놓은 객잔이 있었다. 사내는 실내로 들어서자 주위를 쭉 둘러봤다. 저쪽에 세 명의 장한들이 담소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아직까지 문을 닫지 않은 듯했다.
그들은 사내를 힐끗 바라본 후, 별로 신경 쓸 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두런거리기 시작했다.
“에잇, 젠장. 이렇게 술값이 비싸서야 어디 마음껏 술을 사 먹겠나?”
“그렇게 아쉬우면 밀주라도 담가서 먹지 그러나?”
“그렇지만 집에서 담글 수 있는 술은 뻔하지 않나? 백주나 죽엽청 같은 걸 마시려면 객잔에 오는 수밖에.”
그러자 장한 중 한 명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마누라는 술값이 오르니까 좋아하더군. 전처럼 술을 많이 안 마신다고 말이야.”
“술이야 그렇다 쳐도, 나중에 다른 것도 값이 오르는 거 아냐?”
마누라 얘기를 하던 장한은 금세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말일세. 북쪽에서는 야만족들이 쳐들어온다고 하고…, 흉흉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떠도니…….”
졸린 듯한 눈을 하고 점소이가 다가와서 사내에게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사내는 점소이에게 가장 싼 술을 시켰다. 술이 나오자 사내는 그것이 매우 비싼 금존청이기나 한 듯 향기까지 음미해 가며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쩝, 술맛 한번 기가 막히군.”
오랜만에 마셔 보는 술이었다. 꼬마 녀석이 충돌질만 하지 않았다면 결코 마시지 않았을 술이다. 가문을 뛰쳐나와 떠도는 신세다 보니 주머니 사정이 그리 여유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울적한 기분에 한 잔 한 잔 아껴 가며 마신 술이었지만 어느새 탁자 위에는 빈 술병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싸구려 술이라도 마시면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취기가 올라오자 지금껏 그를 괴롭히던 가문의 문제도 조금은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듯했다.
“어? 술이 없네.”
술병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술잔에 떨어뜨렸다. 그런 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다른 빈 병들까지 박박 긁어서 술잔에 담았다. 세 병. 그의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마실 수 있는 한계였다. 남은 술을 입속에 털어 넣고 일어서려는데 탁하는 소리가 울리며 새로운 술병이 탁자 위에 놓여졌다.
“술은 혼자 마시는 것보다 둘이 마시는 게 더 맛있죠.”
약간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사내를 향해 생긋 미소 지으며 소년이 의자에 앉았다. 그는 능청스런 표정으로 사내의 빈 술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자아, 한잔 쭉 하시죠. 기왕에 술을 드실 거였으면 저하고 함께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사내는 잠시 술잔에 가득 차 있는 술을 바라봤다. 향긋한 주향이 사내의 코를 자극했다. 방금 전까지 마시던 술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술이었다. 기왕에 얼큰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다가온 소년의 유혹은 너무나도 뿌리치기 힘든 것이었다.
망설이던 사내는 주저주저 술잔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일단 술잔을 들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 화통하게 입속에 털어 넣었다.
“크으! 기가 막히군.”
“호오! 역시 무림인이라서 그런지 술도 화통하게 드시는군요. 보고 있는 제 속까지 다 시원해지는 듯하네요. 자 한 잔 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으면서도 사내는 얼떨결에 다시금 술잔을 내밀었다. 썩 마음에 내키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은 놈은 아니었다.
둘은 말없이 한 잔 두 잔 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빈 병이 몇 개 더 늘어났을 때, 사내는 소년에게 오랜 지기를 다시 만난 듯 혀 꼬부라진 소리로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 내고 있었다.
확실히 술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치고 있는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사내가 그 말을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내는 지금 가슴속에 쌓인 얘기를 조용히 들어 줄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아래쪽에 있는 애들은 내가 무공이 높으니 당연히 내가 문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하지만 나하고 동문이나 그 위쪽에서는 그걸 탐탁치 않게 여기지. 마공을 연성했다나? 그딴 식으로 나를 헐뜯으면서 말이야.”
사내는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말을 이었다.
“나는 문파에 들어오는 수입이 얼마인지, 그런 사소한 것들은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단 말이다. 그리고 형을 밀어 내고 문주가 되면 뭐 해? 형은 물론이고 사저(師姐)를 뵐 면목도 없을 것 아냐? 그리고 독립해 나간 대사형은 또 어떻고? 양쪽에서 나만 아주 죽일 놈을 만들겠다는 말이잖아.”
“그럼요. 형장의 판단은 정확하신 겁니다. 문주가 되어 봐야 골치만 아프죠.”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고. 하지만 내 말을 아무도 안 믿어 주는 거야.”
“자자, 진정하시고 한 잔 더 하시죠.”
사내는 술을 입속에 털어 넣은 후 떠들어 댔다.
“크으, 나를 문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고 난 후, 그 좋던 형과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어. 나는 형을 참 좋아했었는데 말이야. 젠장, 형도 그래. 그딴 소리가 나돈다고 나를 멀리할 이유는 없잖아.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했었는데,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안면을 싹 바꾸다니 말이야. 빌어먹을!”
또다시 한 잔을 더 마신 후 사내는 투덜거렸다.
“물론 형도 처음에는 그 말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어. 하지만 형수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지. 하여튼 속 좁은 계집들이란……. 나는 문주가 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구. 문주가 돼 봐야 귀찮기만 하지. 나는 그냥 문주의 동생으로 만족했는데 말이야.”
“아무렴요. 문주보다는 문주의 동생이 훨씬 낫죠. 골치 안 아프죠, 든든한 형이 있어 좋죠, 형한테서 돈 좀 얻어서 유람이나 다니고, 얼마나 좋아요.”
“내 말이 그 말이야.”
한동안 열변을 토해 대던 사내는 이윽고 말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탁자 위에 엎어져 버렸다.
소년은 사내의 행동을 매우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사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표정 관리를 열심히 하면서 말이다. 사내는 술주정을 하듯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그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인 모양이다.
문주가 되기 싫다는 것.
소년은 사내가 쓰러지고 난 후 방긋 미소 지으며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무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기는 했지만, 사내가 하는 말의 가장 큰 핵심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문주라는 게 뭐지? 그게 뭔데 저 사람이 말하듯 그걸 위해서 치열한 암투가 오가는 거야?”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문주라는 것은 문파의 주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 중원 무림은 수많은 문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문파들끼리 서로 세력 다툼을 하며 형성되는 것이 무림이라는 가상의 지역이지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소년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호오, 그렇다면 넓은 땅에 흩어져 있는 여러 부족과도 같은 것이겠군.”
“바로 그렇습니다. 문주라는 것은 부족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문파라는 것이 작게는 수십, 크게는 수만의 문도를 거느린다고 합니다.”
부하의 말에 소년은 놀란 듯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그 규모가 더욱 대단했던 것이다.
“수만씩이나?”
“예, 하지만 그 정도로 큰 문파는 몇 개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가 좀 적다고 해도 문파가 지닌 힘은 엄청날 것이 분명합니다. 노사께서 거느리고 계신 직속 무사들의 경우를 봐도, 그 수는 매우 적지만 그 힘은 공포스러울 정도가 아닙니까?”
“그렇지. 노사가 아버님께 아주 큰 힘이 되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그렇다면 고도로 무술을 연마한 무사 수만 명을 거느린 자라면 그 힘은 웬만한 부족장보다 월등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만한 단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문주가 되기 위해 사활을 거는 것이겠지요.”
무사의 대답을 들은 소년은 더욱 흥미가 당긴다는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술에 취해 엎어져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흥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엄청난 힘과 돈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싫다고 달아난 사내인 것을 보면 말이다.
“봐,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었잖아. 안 그래?”
하지만 무사는 그 말에 맞장구를 칠 의향이 없는 듯 말꼬리를 살짝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저자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당연하잖아. 숙소에 데려다 줘.”
“예.”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쓱 눈짓을 하자, 또 다른 무사가 엎어져 있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무사는 사내를 어깨에 들쳐 메며 옆에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저것을 들고 따라오너라.”
“예.”
시녀는 사내의 자리 옆에 놓여 있던 거도를 집어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을 썼지만, 거도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시녀가 좀 더 힘을 쓰자 간신히 조금 들렸지만 곧이어 시녀는 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빠지고 말았다. 캉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사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눈치 채고 재빨리 시녀에게로 다가왔다. 무사는 힘을 주어 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처음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무거웠는지 나지막한 감탄을 뇌까렸다.
“이걸 들고 휘두른단 말인가?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니고 있었군.”
그러자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흥미를 보였다. 그는 무사로부터 도를 넘겨받은 후, 무게를 가늠해보며 감탄성을 토했다.
“호오, 70근(약 26킬로그램)은 족히 나가겠군. 이걸 가지고 자네의 공격을 막아 냈다는 말인가?”
무사는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쟈타르 님, 설마 무림인들이 모두 이자처럼 대단한 실력자들인 것은 아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마마의 이번 여행은 너무 위험합니다.”
쟈타르라 불린 무사는 갑자기 사방을 두리번거린 후, 매섭게 무사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말조심해라. 여기는 중원이다. 그리고 너는 마마의 명령에만 따르면 된다.”
“옛, 명심하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사내는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이 탈이었다.
“젠장. 어윽! 머리야.”
투덜거리는 순간,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그는 소년과 술을 마셨다. 물론 원해서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이 적당히 술을 권하면서 기가 막히게 그의 가려운 곳을 살살 긁어 주며 맞장구를 쳐 주니 술자리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 어슴푸레하게 이어지는 기억…….
“허억!”
사내는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사문의 치부(恥部)를 외부인에게 토설하다니. 헙!”
사내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큰 소리로 떠들었다고 느끼고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다음 재빨리 문가로 다가가 주위에 누군가 없는지 살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내공을 운용하여 주위를 샅샅이 살폈는데, 일단 사내의 능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는 그 어떤 침입자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몸 상태로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온몸에 술기운이 가득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대놓고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이 주위에서 호법을 서 줄 때이거나, 혹은 주위에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내로서는 급했다. 빨리 술기운을 체내에서 몰아내고 살짝 도망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사내는 내공을 운용하여 조금씩 술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술기운을 몸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중독된 상태에서 독을 체외로 배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고차원의 내공 운용술이었다. 그것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수련한 것이 아니라면, 순식간에 술기운을 체외로 방출하는 것은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는 전설적인 고수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장시간이 경과된 후, 사내는 어느 정도 술기운을 몸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다 뽑아낸 것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얼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처음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보다는 월등하게 상태가 좋아졌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침상 옆에는 자신의 애도(愛刀)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막 도를 집어 들려는 순간, 사내의 감각이 누군가가 접근 중이라는 것을 알려 왔다. 사내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가장하며 침상에 주저앉는 순간 밖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물론이오. 그런데 아직 이른 시각인데 무슨 일이오?”
“그럼, 잠시 실례하겠소.”
문이 열리면서 뺨에 흉터가 있는 무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사는 밖에 누군가가 없는지 슬며시 살핀 후, 사내에게 말했다.
“길게 말하지는 않겠소. 도련님은 대갓집에서 곱게 자라신 분이라, 세상 물정에 어둡소.”
“그건 한눈에 알아봤소. 그래서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이지. 그런데 요즘은 여자 애보고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무사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평정심을 찾으며 되물었다.
“언제 그 사실을 눈치 채셨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내놈이 그렇게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는 풍성한 옷으로 몸매를 가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직 변성기에 이르지 않은 아담한 체형을 지닌 미소년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상대는 꽤나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무사는 생각했다.
“뭐, 좋소. 알아봤다니 말이 쉽겠군. 형장도 어느 정도 눈치 챘겠지만, 그분께서는 아주 신분이 높으신 분이시오.”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상대가 트집 잡자, 무사는 ‘그분’이라는 단어로 바꿨다.
“그래서? 나를 보고 그 대갓집 꼬맹이 신발이라도 핥아 주라는 말인가?”
“천만에. 나도 무인이오. 무인에게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썩지는 않았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분이 여자의 신분으로, 남장을 하고 중원을 떠돌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을 조금이나마 고려해 주었으면 하는 거요.”
‘내가 떠돌게 만들었나? 왜 나한테 지랄이야…….’
사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무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어제 술에 취해서 술주정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형장이 아니라 그분이었을지도 모르오. 형장을 옆에서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내 나름대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하는 거요.”
단 한 번도 무사가 이렇게 길게 자신에게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 무사의 말이 길어지자 사내는 곧 상대가 한인(漢人)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맹이의 매끄러운 발음과 달리 무사의 억양은 뭔가 어눌한 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애써 그에 대한 호기심을 억눌렀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禍)를 부른다고 여태껏 배워 왔기 때문이다.
“말이 너무 길어졌군.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상대가 문을 나선 후, 사내는 자신의 짐을 챙기며 중얼거렸다.
“세상 구경을 하러 나온 할 짓 없는 변방 호족의 자제인 모양이군. 어디 무림이라는 곳을 신물 나게 구경해 봐라. 재미있는지……. 나는 이제 떠나 볼까?”
짐을 싸들고 문가로 다가서는 순간, 사내는 또 다른 사람의 기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접근해 오는 상대…….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짐을 내려놓고 침상 위에 앉았다. 곧이어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어나셨소?”
걸쭉한 사내의 목소리였지만, 뭔가를 조심하는 듯 목소리는 한껏 낮춘 상태였다. 그것을 듣는 순간 사내의 뇌리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그 꼬맹이의 부하들이 차례대로 모두 다 방문하는 것은 아니겠지하는 생각 말이다.
결국 사내는 도망치지 못했다. 그놈의 부하들이 순서대로 방문하며 훼방을 놓은 탓이었다. 그의 방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람은 꼬마였다. 젠장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