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6화 (402/930)

내 이름은 진팔이다

음식이 차려진 후, 사내가 막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상대가 입을 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아직 형장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듣지 못했네요.”

사내는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잠시 늦추며,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려고?”

뭔가 기분이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사내를 보며 소년은 오히려 빙긋 미소 지었다. 조금씩 서로의 대화가 엇갈리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소년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만나 식사를 함께한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 형장의 이름조차 모른대서야 어디 말이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내 이름을 몰라도 서로 대화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는데, 굳이 이름을 알 필요는 없지 않나?”

이름을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자, 소년은 체념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 보면 그의 어조에는 심술이 가득함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좋습니다. 형장께서 알려 주기 싫으시다면 할 수 없죠. 지금은 그냥 모르는 상태로 지낼 수밖에요. 형장의 이름을 알아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뭐 굳이 아침부터 말다툼을 해서 상쾌한 기분을 망칠 이유가 있겠어요?”

이름을 알아낸다는 말에 사내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소년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무림에 수많은 문파가 있다고 들었지만, 첫째와 둘째가 권력 다툼을 하는 문파는 흔하지 않겠죠? 거기에다가 그 둘의 나이 차이가 15년이나 되는데도 둘째의 무공이 높은 문파는 더욱 드물겠죠. 그리고 그 때문에 둘째가 권력 다툼이 싫다고 야반도주까지 했다면 하나나 둘밖에 없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사내는 잡아먹을 듯 소년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강인한 인상을 지닌 사내가 그렇게 하자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가 따로 없는 듯싶었다. 하지만 소년은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대꾸했다. 아마도 그는 저쪽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죠.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장이 속한 문파에 대해서 악소문이 좀 퍼질 우려가 있긴 하겠지만, 뭐 큰일이야 나겠어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알리는 것뿐인데 말이죠.”

“죽고 싶냐?”

“그러니까 제가 그런 수고를 하지 않도록 지금 형장의 이름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잠시 잡아먹을 듯 소년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술김이라고는 하지만 저 소년에게 떠든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진팔이다.”

순간 소년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억지로 안면 근육을 굳히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 그대로 밖으로 다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도 촌스러운 이름일 수가? 그것도 저렇게 야성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노련해 보이는 무림고수의 이름이 말이다. 소년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하여 다시 되물었다.

“예?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진팔의 안색은 팍 찌그러들었다. 하지만 진팔은 씹어 먹듯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뱉어 냈다.

“진·팔이란 말이다.”

그 말에 소년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여태껏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한껏 무게를 잡고 있던 무인이, 이렇듯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소년은 진팔을 좀 더 골려 줄 요량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호오! 진 형의 형제가 여덟이나 되는지 미처 몰랐군요.”

무식한 하층민들의 경우 자식들의 이름을 짓기 귀찮아서 혹은 알고 있는 글자가 별로 없어서 자식들의 이름을 낳은 순서대로 일, 이, 삼 등의 숫자를 붙여 짓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내는 무림의 한 문파를 이끌어 갈 후계자인 만큼 결코 그 부모가 이름을 짓기 귀찮거나 혹은 무식해서 진팔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리 없었다.

그 말에 진팔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투덜거렸다.

“내 이름은 여덟 팔(八) 자가 아니라 깨뜨릴 팔(捌) 자란 말이다. 내가 이래서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는데…….”

“아, 실례. 소제가 본의 아니게 진·팔 형의 아픈 데를 건드렸군요. 하지만 음이 똑같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누구나 오해할 수 있는 그런 단어를 쓴 것이 잘못이죠.”

“그래, 이름을 알았으면 이제 된 건가?”

“물론이죠. 그런데 진 형께서는 소제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전에 알려 드렸는데 말이죠.”

“그, 글쎄…….”

“아하! 소제의 미천한 이름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까?”

상대가 비비 꼬인 어조로 이죽거리자, 사내는 약간 당황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닐세. 내가 기억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게나.”

“좋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알려 드리죠. 제 이름은 조령입니다. 여자 이름 같지만 뭐, 어머니께서 지어 주신 것이니 어쩔 수 없죠. 그건 그렇고 전에 말씀드린 것 말인데요, 같이 길동무나 하자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사내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듣고 투덜거렸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길동무는 필요 없다고 말이야.”

“아아, 그렇게 반대만 하실 게 아니라구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제 얘기를 들어 보니 속에 끓는 것도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구요.”

진팔은 차갑게 응대했다.

“어떻게?”

“아무래도 속에 울분이 쌓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가게 되거든요. 술을 드실 때마다 그런 것을 옆 사람에게 떠들어 댄다면 큰일 나겠죠? 중원 전체에 진 형의 사문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질 수도 있잖아요. 차라리 그럴 바에는 저한테만 술주정을 하시는 게 어때요?”

그러면서 조령은 자신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는 보기보다 상당히 입이 무거운 편이거든요.”

이런 뻔뻔한… 어쩌구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진팔은 초인적인 의지력을 동원하여 참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이마에는 굵은 힘줄까지 솟아올라 있었다.

이 꼬맹이를 죽도록 두들겨 팬 다음 ‘그딴 소리하면 파묻어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면 끝이겠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여자 애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손대기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울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쨌건 참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젠장,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나는 너의 그 입을 못 믿겠어.”

“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저는 그럼 진 형의 기대에 힘입어 진 형네 문파의 모든 것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수밖에요. 진 형께서 소제를 그렇게 입이 가벼운 인물로 치부하시는데, 그 기대에 호응해 드리는 것도 재미있겠군요. 안 그래요?”

그와 동시에 뿌드드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팔이 무의식중에 얼마나 주먹을 힘껏 쥐었는지 관절들이 아우성을 질러 댔기 때문이다.

“너, 죽을래?”

하지만 그런 위협은 애당초 먹혀 들어가지도 않았다. 조령은 진팔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진 형께서 바라시는 게 뭡니까? 제 입은 못 믿겠다면서, 설마 조용히 있으라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아주 커다란 모순이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 말에 진팔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말발에서 밀리다 보니 성질이 마구마구 솟구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망할! 그래! 네 입은 아주 무겁다. 나는 너를 믿어! 결코 그딴 소리를 소문내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마. 이제 됐냐?”

“물론이죠. 이런 믿음직한 동행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진 형의 복이 아니겠어요? 자, 그럼 어디로 여행하실 건지 말씀해 주세요. 계획을 세워 보기로 하죠.”

“왜 내가 너하고 여행을 해야 하는데?”

황당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묻는 진팔에 비해, 조령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진팔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쪽은 조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진 형께서는 입이 무거운 동반자를 필요로 하시니까요. 그래야 술주정도 받아 줄 거고, 이리저리 말벗도 되어 줄 것 아닙니까? 만약 저를 거부하시는 이유가 제 입이 너무 가벼울지도 모른다는 오해 때문이라면, 진 형을 위해 그 오해를 진실로 만들어 드릴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진팔의 안색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왠지 정감이 가더라니

마사코는 두려움에 질려 아르티어스의 뒤편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아무리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주인과 함께 다니는 아르티어스라는 이방인을 거의 입만 살아 있는 덜떨어진 인간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말만 많았지 실제 행동이 필요할 때는 거의 모든 것을 주인에게 팔밀이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에서야 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덩치의 황금빛 괴물. 머리와 꼬리는 전설상에 나오는 용과 닮았지만, 어마어마한 몸통에 커다란 날개까지 돋아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자신의 등에 주인과 그녀를 태우고 이곳 대국까지 단숨에 날아온 것이다.

정신이 핑핑 돌 정도의 엄청난 속도, 그리고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육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도대체 이것은 꿈인 것일까?’

주인은 항상 이곳 대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그리고 대국이 바로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주인은 바다에 자주 나갔다. 그는 하염없이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에게 주어진 일이 없었기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주인은 바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 사마와의 대화를 통해, 그 원인이 뱃멀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그녀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꿈에도 가고 싶어 하시는 고향 땅에 뱃멀미 때문에 못 가시다니, 얼마나 불쌍하신 분이란 말인가? 그분의 강인함을 생각한다면 웃음이 터져 나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바다를 건너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는데,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깨비라도 나타나듯 회색 물체가 퍽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은 회색의 이상하게 생긴 옷을 입고 있는 주인이었다.

‘나는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후지와라 가의 사무라이야. 어떻게 이렇게 깜짝깜짝 잘 놀란다는 말이야? 저 주인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런 횟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그건 나의 모자람을 드러내는 거야. 더 침착하자. 너는 해낼 수 있어, 마사코. 그리고 꼭 해야만 해. 벌써부터 이러면 어떻게 주군께서 내린 명령을 완수할 수 있겠니.’

마사코는 시선을 주인에게로 돌렸다.

짙은 눈썹, 각이 진 턱선,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강인한 인상이었다. 물론 몸매가 나약하고 가늘게 보였기에 그 인상은 크게 완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 모습을 봤을 때, 마사코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금발의 그 아름답던 주인이, 여기에 도착한 후 갑자기 그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런 다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마사코를 멀뚱하게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내 모습은 원래 이래. 잊어버리지 말도록!”

너무 당황해서 그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주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녀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그건 벗어 버리고 이 옷을 입어라.”

마사코는 아르티어스와 묵향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벗어 버렸다. 그런 다음 바닥에 떨어져 있는 허름한 옷으로 재빨리 갈아입었다. 갈아입으라고 명령을 받았으면 장소가 어디건 곧바로 실행해야만 했다. 그녀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성장했으니까 말이다.

몇 가지 사소한 장식물 따위를 달 때는 그것을 어디다 다는지 헷갈리기 십상이겠지만, 다행이 주인이 던져 준 옷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마사코는 옷을 다 갈아입은 후,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뭐 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빨리 변하시라구요.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너무 티가 나서 안 된다니까요.”

곧이어 아르티어스의 몸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그 빛이 사라진 순간, 아르티어스는 없어지고 한족의 옷을 입고 있는 웬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 왼쪽 눈을 중심으로 훑고 지나간 긴 검상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검은 수염을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때? 멋있지?”

사부 유백의 모습을 또다시 보게 된 것이다. 묵향은 처음에는 매우 놀란 듯하더니 갑자기 왼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놀람은 한 번으로 족하다. 아르티엔에게 느껴지던 정감……. 그리고 그를 잃었을 때의 슬픔.

이제 더 이상은 당하고 싶지 않았다.

“죽고 싶어요?”

무시무시한 살기. 하지만 아르티어스는 그 엄청난 살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묵향의 슬픔을 느꼈다. 슬쩍 장난 삼아 해 봤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이렇게 나오자 아르티어스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티어스는 멋쩍은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쳇, 아버지는 통했는데, 나는 안 되는 모양이군.”

또다시 아르티어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쭈글쭈글한 피부에 허연 수염이 덮여 있는 촌로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묵향이 아랫마을로 옷을 훔치러 내려간 사이, 이곳에서 기다리다 그 노인을 봤던 모양이었다.

묵향은 애써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이제 가죠.”

아르티어스는 묵향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아들의 깊은 슬픔을 느꼈다.

‘생각보다는 정이 많은 놈이란 말씀이야. 저런 놈들이 이용당하기 딱 좋지. 위대하신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객사하기 딱 좋았을 거야. 아무렴, 흐흐흐흐…….’

묵향은 번화한 거리로 들어서자 전장(錢場 : 은행과 유사함)부터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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