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0화 (406/930)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묵향은 일단 무한(武漢)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교로 가기 위해서는 송의 수도가 위치하고 있는 중경(中京), 그러니까 개봉을 통과하는 쪽이 도로의 여건도 좋을뿐더러 거리도 짧다. 하지만 그쪽 길은 서주(徐州), 정주(鄭州), 낙양(洛陽) 등 대도시들이 많기에, 안 그래도 구경하기 좋아하는 아르티어스와 함께 가기에는 별로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무한까지 배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일단 배를 타기만 하면 빠르면서도 쾌적하게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티어스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장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뱃멀미가 묵향의 발목을 잡았다. 그 때문에 구경할 게 별로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골라서 행로를 잡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한참 길을 가고 있는데, 앞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호기심이 인 아르티어스는 말에 박차를 가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묵향 일행이 가 보니, 그곳에는 20여 명의 검객이 세 명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그들 중 남루한 옷을 입은 장한의 무공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 혼자서 거의 대부분의 적을 상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는 천천히 그를 몰아붙이며 힘을 빼고 있었다.

이른바 다수로서 소수의 고수를 상대할 때 가장 유효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차륜전(車輪戰)이었다. 앞에서 힘껏 싸운 자들은 뒤로 빠지고, 뒤에서 힘을 비축한 자들은 앞으로 나서서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시간 공격을 당하면, 결국은 내력이 고갈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항복해라.”

진팔은 피에 젖은 몸을 힘겹게 추스르며 악을 썼다.

“남궁세가의 개들아, 이러고도 네놈들이 정파임을 자부하느냐?”

물론 이 말은 창궁18수에게 한 말이 아니라, 저쪽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세 명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인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보고 들은 일을 저잣거리에 퍼뜨려 주기만 한다면 이 곤경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있을 듯싶었던 것이다.

또다시 창궁18수의 연합 공격이 가해졌다. 쌍방 간에 치열한 격투가 벌어졌지만, 아무래도 창궁18수 쪽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들을 생포하려는 마음이 강한지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 오지 않고 있었기에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균형은 머지않아 무너졌다. 진팔의 뒤를 맡아 주고 있던 흉터 있는 무사의 오른팔이 피보라를 일으키며 잘려 나갔다. 무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멍한 시선으로 잘려 나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발치에 나뒹굴고 있는 그의 손. 그 손은 아직도 묵직한 검을 꽉 쥐고 있었다.

창궁18수들 중 한 명이 돌진해 와 그 무사를 막 베려고 할 때, 진팔이 도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항복하겠소.”

진팔은 최후의 희망을 걸고 있는 행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지금 있었던 일을 주위에 소문만 내준다면, 남궁세가의 마수에서 풀려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세 명의 행인 하나하나에게 소망을 담아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그는 말 위에 앉아서 따분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청년을 보자마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 일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창궁18수 중에서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장인 듯한 인물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만큼 한계 상황에서 보여 준 진팔의 실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런 녀석이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모르겠군. 놈의 동행이 없었다면 잡기 힘들었을 거야……”

그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이들을 본가로 끌고 가라.”

“옛.”

지시를 받은 자는 흠칫 굳은 채 묵향에게로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진팔을 거칠게 밀며 재촉했다. 방금 전까지 진팔의 엄청난 무위에 가슴 졸였던 것이 그의 화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봐, 빨리빨리 걸어. 젠장! 쓸데없이 탈출을 해서 일거리를 만들고 있어.”

수장의 명령은 계속되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천천히 되짚어 가며 증거들을 없앤다. 단 하나라도 흔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옛.”

그들은 시체를 등에 업기도 하고, 여기저기 무공을 사용한 흔적들을 없애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몇 개인가 땅에 떨어져 있는 병장기를 회수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주변의 상황이 정리된 후, 수장은 창궁18수 중의 한 명을 호명했다.

“장진(張瑨)!”

“옛!”

수장은 묵향 쪽을 턱짓으로 가리킨 후 차가운 어조로 지시했다.

“결코 증거가 남아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묵향 일행의 앞에 선 후, 스르릉 검을 뽑으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들에게 죄가 없으나, 이 현장을 본 것은 재수가 없었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해 주시구려.”

이렇게 말을 하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을 타고 있으니 재빨리 도망치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 이들의 복장을 보고 남궁세가의 인물인 것을 알고 있는 자라면 도주를 포기하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장진의 예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우선 나이든 노인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별 떨거지가 다 까부는군.”

그러더니 젊은이에게 턱짓으로 자신을 쓱 가리키며 말했다.

“얘야, 처리하거라.”

그 말에 젊은 쪽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뭐라구요? 아버지가 하세요.”

“아냐, 네가 꼭 해야만 해.”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왜냐하면 나는 그 동남동녀들의 정혈을 빨아들인다는 흡성대법이 과연 어떤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거든. 이 아비를 생각해서 구경 좀 시켜 주라. 나도 나중에 좀 써먹게 말이야.”

그 말에 젊은 쪽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이런, 젠장! 그거 순 엉터리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기 시작하자, 황당해진 것은 검을 뽑아 들고 서 있는 장진이었다. 처음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줄기줄기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듯 무시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더럽게 시끄러운 놈들이군. 오냐! 네놈들의 모가지가 떨어져나간 후에도 그놈의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그는 경쾌한 속도로 몸을 날렸다.

캉!

“허억!”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들 중의 하나였다. 아무리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가문의 비전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렇듯 무력하게 튕겨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가 그의 애검은 흡사 강철이라도 두들긴 듯 부러져 있었다. 그가 때린 것이 상대의 병장기도 아니고 머리통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뒤로 비칠비칠 물러서며 경악한 듯 부르짖었다.

“이, 이게 뭐야?”

이 상황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수장이 주위에 흩어져 있는 창궁18수들을 재빨리 불러 모았다. 저들이 주고받던 대화 중에 ‘흡성대법’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청년의 대꾸로 보아 마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저런 해괴한 사술(邪術)을 익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교도임이 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모습이 수상쩍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만 없었다면, 평범한 젊은이로 치부할 정도로, 그 어떤 무공을 익힌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반로환동(反老換童)한 마물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사술을 이용해서 그렇게 보이도록 위장하는 것인가?’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졌다. 상대의 내력을 알 수 없기에 그의 어조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본인은 남궁세가에 적을 두고 있는 천풍검(天風劍) 곡추(曲抽)라고 하오. 귀하의 성함을 말해 주시오.”

“내 이름을 알 자격이나 있을까나?”

묵향의 삐딱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곡추의 안색은 노기로 인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구 성질을 부릴 만큼 만만한 대상도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뭔가 믿는 게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나올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귀하는 마교(魔敎)에 소속되어 있소?”

그 말에 묵향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이 세상에 마교(魔敎)라는 단체가 어디 있다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교라고 떠들어 대는 거지?”

“그럼 뭐요? 소속을 밝히시오.”

“이 몸은 마교(魔敎)가 아니라 천마신교(天摩神敎)에 적을 두고 계신 분이시다. 어때? 불만 있냐?”

마교도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칭할 때 마교(魔敎)라고 하지 않는다. 천마신교(天摩神敎)라고 칭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 진짜 마교도임이 분명했다. 곡추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단일 문파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문파가 마교였다. 사파니 뭐니 하며 멸시하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막강한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전에 상대방이 쓴 괴이한 사술(邪術)까지 본 후가 아닌가?

그리고 곡추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강력한 무공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교도와 노닥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 일대는 남궁세가의 영역임을 귀하도 잘 알 것이오. 하지만 이번만은 못 본 것으로 해 줄 테니 빨리 가시오.”

곡추는 남궁세가의 체면을 슬쩍 세우면서, 상대에게 피해 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역효과였다.

“뭣이? 이번만은 못 본 것으로 해 주겠다고?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제발 가 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은데, 그따위로 말해? 그래, 못 가겠다면 어쩔 건데?”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런 젠장, 그렇게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곡추는 무심결에 욕설을 내뱉은 후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소창궁무애검진(小蒼穹無涯劍陳)을 펼쳐라.”

곡추의 명령에 따라 검수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검진을 펼쳤다. 검진이 발동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기에 마사코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이런 식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당해 봤던 것이다.

그리고 저쪽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 있는 진팔 일행도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 상태로 도망가 봐야 결과는 뻔했다. 그들로서는 저쪽에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창궁18수를 물리쳐 주기만을 간절히 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아르티어스는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창궁무애검진은 대창궁무애검진과 함께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최고의 검진이다. 그 둘은 하나의 뿌리에 근간을 두고 있기에 비슷한 점도 많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그 자유성에 있었다.

소창궁무애검진은 소수의 강력한 고수에 의해 발동됨으로 인해, 그 공격과 수비에 있어 개인에게 훨씬 더 많은 자유를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변화의 폭이 훨씬 더 심했고,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진법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사방에서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에도 묵향의 안색은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주변을 여유롭게 둘러본 후, 품속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말안장에 묶어 놓은 검까지 끄집어내기는 귀찮았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수라면 진법과 마주쳤을 때 생문(生門)과 사문(死門) 등 그 진의 특성을 집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문은 그 진법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이다. 그곳을 공격해야만 진법을 깨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멋모르고 사문을 공격한다면 진법을 펼치고 있는 자들보다 몇 곱절 강한 실력을 지닌 고수라 해도 그곳에 뼈를 묻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이야기였고, 묵향의 경우 그들과 실력 차이가 나도 너무 나는 상황이었다.

묵향의 손에서 동전들이 차례차례 던져지기 시작했다.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남궁세가가 자랑하던 검객들이 피를 뿜으며 바닥에 길게 드러눕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여기저기서 당황한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이유를 알아채기도 전에 다섯 명이 피를 흘리며 드러누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의 10여 명의 동료가 쓰러진 후에야, 그들은 동료들을 해치고 있는 자가 누군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만큼 묵향의 공격이 은밀했던 탓이다.

이제 검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살려면 도망치든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곡추는 살아남은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나를 따르라!”

곡추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기 위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검수들의 행동은 양분되었다. 다섯 명이 곡추를 따라 돌진했지만, 나머지 둘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면 간혹 배신자가 나오는 법이지. 그런데 하나는 모르겠지만 둘은 좀 많군…….”

묵향의 손에서 여덟 개의 동전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돌진해 들어오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묵향의 지척에도 이르지 못하고 한꺼번에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도망치던 둘의 신세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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