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흡성대법이야? 이게 뭐가 극악하다는 거야. 그냥 동전 몇 개 날린 것뿐이잖앗!”
기대감이 깨진 아르티어스가 괴성을 질러 대건 말건, 묵향은 무시하고 말을 천천히 몰아 앞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추정되는 나이에 비했을 때, 제법 쓸 만한 경지에 오른 녀석이야. 생긴 것도 마음에 드는군. 모름지기 무인의 모습이 저 정도는…….”
진팔 일행에게 다가서던 묵향의 눈빛이 묘하게 번쩍였다. 진팔의 체내에 쌓인 공력의 근원을 읽었기 때문이다.
“태허무령심법?”
묵향은 진팔의 앞에 서서 그를 노려봤다. 진팔의 일행은 방금 전에 벌어졌던 사태에 거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여기까지 쫓겨 오며 창궁18수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뼈저릴 정도로 느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을 단 한순간에 전멸시키다니,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묵향은 잡아먹을 듯 진팔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아는 한 태허무령심법은 이미 무림에서 잊혀진 심법이었다. 그리고 묵향이 그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게다가 그 사람들에게 몸으로 직접 체득하도록 해 줬지, 절대로 내공의 구결 따위를 알려 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누군가에게 심법을 전수해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녀석은 그것을 배웠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익히고 있는 심법을 누구한테 배웠지?”
아직까지도 얼이 빠져 있는 진팔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묵향은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어∼쭈. 내 말을 무시해? 이게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상대의 기세가 험악해지자 조령이 재빨리 진팔의 앞을 가로막으며 애원했다.
“저, 대협. 그러니까…, 그냥 말로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폭력은 절대로 사절입니다.”
묵향은 가소롭다는 듯 조령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이죽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사절할 만도 하겠군.”
묵향의 말대로 조령의 꼴 또한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자신의 피, 남의 피 가릴 것 없이 서로 엉겨 붙어 검붉은 얼룩을 형성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차림새, 거기에다가 군데군데 찢어진 옷. 그녀가 방금 전까지 얼마나 막심한 고생을 했는지 간단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켜라. 너 같은 꼬맹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원래 막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어느 정도 만만한 상대라야 화가 나는 법이다. 묵향의 매서운 눈초리가 가해지자, 조령은 자신도 모르게 말 잘 듣는 멍멍이처럼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상대의 눈빛을 본 순간, 치가 떨릴 듯한 미지의 공포가 엄습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비켜서자, 그 공포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묵향이 그녀에게 가하고 있던 압력을 거둬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끽 소리도 못하고 물러났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녀는 한심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작태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조령은 오히려 그 분노를 진팔에게로 돌렸다.
그녀는 진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봐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저 사람이 그렇게 겁나는 거예요? 여태까지 강호의 고수랍시고 행세를 했잖아요. 고수 값을 좀 해 보라구욧!”
조령이 옆에서 호통을 치자, 진팔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의 공포심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 자신이 천지문의 제자였기에 얻어들을 수 있는 정보였다. 바로, 마교와 유일하게 협정을 맺고 있는 천지문의.
상대는 이미 20여 년 전에 무림 최강이라는 공포스러운 칭호를 부여받았었던 인물이다. 그런 괴물의 신경을 건드려서 득이 될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묵향은 짜증 어린 어조로 말했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그 심법을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느냐고 묻고 있잖아. 만약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본좌는 거짓말하는 놈을 용서해 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거든.”
과연 그럴 것임에 틀림없었다. 저 많은 사람들을 눈 깜짝하지 않고 죽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도 저들과 무슨 원수를 진 것도 아니고 말 몇 마디 마음에 안 들게 했다고 저 모양을 만든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이 교차되며, 진팔은 평생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살 길이었으니까.
진팔은 넓죽 엎드려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며 정중하게 외쳤다.
“천마신교의 지존이시여.”
그 말에 조령은 깜짝 놀랐다는 듯 진팔을 바라봤다. 여태껏 그와 함께 다니면서 대화를 할 때 이토록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존’이라니……. 그렇다면 저 사람이 마교의 교주라는 말인가? 조령의 시선은 급히 묵향에게로 되돌려졌다.
진팔의 말을 듣고 묵향은 깜짝 놀란 듯했지만, 곧이어 기특하다는 듯 싱글거리며 말했다.
“너, 혹시 사파냐? 어느 문파야. 허, 그것 참. 쫄따구 교육을 아주 제대로 시켰구먼. 나를 알아보다니 말이야.”
“사파는 아닙니다.”
묵향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냐?”
“천지문을 잊으셨습니까?”
“엇! 천지문이라고?”
“그때 제게 그 망할 놈의 심법을 강제로 가르쳐 주셨죠. 제가 그것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지 당신은 알기나 하십니까? 왜 바라지도 않은 그런 일을 해서 저를 괴롭히시는 겁니까? 물론, 교주님 같으신 분들은 장난 삼아 돌을 던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돌에 맞은 사람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은 있으신 겁니까?”
말을 하다 보니 울분이 치솟아서 진팔은 마지막에는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무림에서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따져 봐야 목숨만 잃기 십상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당한 일이 너무도 억울했기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묵향의 안색은 핼쑥해졌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 꼬마가 저렇게 성장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묵향은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 꼬마였냐? 이런, 내 정신 좀 보게나. 내가 가르쳐 주고도 잊어버렸다니,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묵향은 뒤쪽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 중인 아르티어스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빨리 이리 와 봐요.”
묵향의 말에 진팔 일행은 화들짝 놀랐다. 도대체 마교 교주가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자가 있단 말인가?
아르티어스가 마지못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묵향은 다짜고짜로 말했다.
“저기 있는 저 팔 있죠? 저 녀석한테 붙여 주세요. 그리고 상처 치료도 좀 해 주고 말이에요.”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내가 해 줘야 하는데?”
“아들의 부탁이니까요. 만약 들어줄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실 거라면, 호된 경험을 하시게 될지도 몰라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며 투덜거렸다.
“쩝…! 팔 하나 없어도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는데, 귀찮게스리…….”
아르티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무사와 시녀의 시체 옆에 놓여 있는 팔을 주워 들었다.
“야, 너 이리와 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아르티어스가 부르자 그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던 무사는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무사에게 있어서 팔을 잃는다는 것은 거의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치료하라고 하니까 귀찮다느니 뭐라느니 하며 이죽거리고 있으니, 무사의 성질이 팍팍 치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조령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한 듯 무사에게 명령했다. 사실 통째로 잘려져 나간 팔을 다시 붙인다는 것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불구자가 된 자신의 수하를 놀리고 있다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따위 팔 없어도 상관없잖아. 가지 마!”
하지만 무사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더러워도, 치사해도, 팔을 붙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마교의 교주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실비실 아르티어스에게로 다가갔다.
“이 자식이! 오라면 빨랑빨랑 와야 할 거 아냐! 너, 다리까지 병신이 되고 싶어! 엉?”
아르티어스는 잘린 팔을 원래 있던 자리에 붙인 다음 주문을 외웠다. 푸르스름한 광채가 상처에서 흘러나왔다가 사라졌을 때, 무사의 눈은 화등잔만 해져 있었다. 자신의 팔이 원상태로 되돌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사는 이리저리 오른팔을 움직여 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더니 갑자기 쓰러지듯 아르티어스를 향해 부복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오른팔을 되돌려 준 상대가 아닌가? 만약 자신에게 주군이 없었다면 평생 상대의 종이 되겠다는 의식까지도 치렀을 것이다. 그만큼 무인인 그에게 있어서 오른팔은 소중한 것이었다.
그 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괴이한 사술을 익혀 잘려진 자신의 팔을 붙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풍문은 간혹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남의 팔을 붙이다니…, 도대체가 전설로라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괴이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티어스가 진팔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을 때, 묵향이 슬그머니 다가와 은근슬쩍 진팔에게 말을 걸었다. 그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친절을 베푼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한 포석이었다. 묵향은 천지문에 있는 수양딸의 안부가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이다.
“진양 문주는 잘 있냐?”
진팔은 아르티어스의 행동에 경악한 상태였기에 묵향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질문한 인물이 누군가? 없는 기억이라도 짜내야 했다.
“예…? 예. 지금은 은퇴하셔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다.”
“호, 너무 빨리 은퇴했군. 그 망할 놈의 할망구는 아직까지도 일선에서 뛰는 모양이던데. 그래, 천지문에 별일은 없느냐?”
그래도 협정을 맺은 문파라고 신경을 조금은 써 주는군. 하지만 천지문의 문주가 바뀐 게 얼마나 오래전의 일인데, 그런 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마교는 천지문 따위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라고 진팔은 생각했다.
“아직 이렇다 할 큰일은 없습니다.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지만요.”
“하하핫, 앞으로 벌어질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필요하겠느냐. 그건 그렇고, 진양 문주가 키운 제자들이 몇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변을 당한 사람은 없냐?”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나 당황하면서도, 진팔은 아는 대로 성심껏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런데 대사형과 둘째 사형은 따로 문파를 세워 독립하셨기에, 그 속사정까지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잘해 나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없단 말이지. 허허헛.”
진팔의 말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자신의 수양딸은 천지문에서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뜨리던 묵향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가 오래전 자신을 헤치기 위해 들어왔던 자객 흑월야사(黑月夜死) 전룡(全龍)에게 자신의 수양딸을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임무는 3개월을 기한으로 한 것이었다.
“설마, 흑월야사(黑月夜死)가 내가 없는 동안 계속……?”
“네……?”
“아, 아니야. 너는 알 필요 없는 일이다.”
수양딸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자, 묵향은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이 녀석은 딸과 같은 문파에 소속된 제자가 아닌가? 묵향은 진팔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본 후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옷이 이게 뭐냐? 대 천지문의 제자가 그런 꼴을 하고 다니면 안 되지.”
묵향은 품속에서 집히는 대로 전표 몇 장을 끄집어내어 진팔에게 줬다.
저 옛날, 이 인물에게 걸려 끔찍한 경험을 한 진팔이다. 그는 주는 대로 받았다. 안 받는다고 한다면 기필코 받게 만들고야 만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고나서 보니 전표의 액수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헉! 은자 1백 냥?’
“저…, 이건…….”
“왜? 너무 적냐?”
다시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는 묵향을 향해, 진팔은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니요. 은자 1백 냥이라니! 이건…, 너무 많습니다.”
“아냐, 그따위 푼돈 가지고 신경 쓰지 말거라. 그건 그렇고, 저 소저하고는 일행인 모양이지? 소개나 시켜 주거라.”
원래가 주인이 예뻐 보이면, 그가 기르는 개가 설혹 잡견이라 해도 예쁘게 보이는 법이다.
“예, 제 동료인 조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쪽은 그녀의 호위 무사입니다. 그리고 저쪽은…….”
진팔은 더 이상 소개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시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신기한 듯 마교의 교주와 진팔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조령은 그제야 수하들이 죽었음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부하들의 주검에 비틀비틀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이 이번 유람(遊覽)을 결심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꼴을 당했을 리 없는 그들이었다. 조령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