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6화-18권 (422/930)

이건 악몽이야

화산 중턱에 위치한 한 작은 정자.

화산의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지만, 어두운 밤이어서 그런지 정자 주위는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만약 낮이었다면 주변의 경관은 물론이고 화산파의 모든 건물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총총히 빛나는 별들만이 밤하늘에 떠 있는 게 보일 뿐이다. 낮이라면 몰라도 이 늦은 밤에 이곳에 올라올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지금 이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정자는 등잔조차 켜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사내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들과 같은 심후한 내공의 고수들에게 짙은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사내는 화산파의 장문인 현천검제(玄天劍帝)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멍한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선이 조금 굵긴 했지만 그렇게 미남도 아니었고, 또 특이한 인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평범한 얼굴. 하지만 저 얼굴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좀 전에 사형을 만났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장문인실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의 짧은 여유는 현천검제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곱씹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건 악몽이야.’

현천검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사형이 맞으신 겁니까?”

그렇게 묻는 현천검제의 표정은 곤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고 있는 당사자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묵향의 사부 유백은 대단히 뛰어난 살수였고, 또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많은 제자를 키웠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살수였다. 그렇다 보니 그가 아무리 뛰어난 제자를 키워 놨다고 해도 결국은 임무 수행 중에 사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뛰어난 자객에게는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임무가 주어졌고, 실패할 확률 또한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서 그의 제자는 단 두 명만 살아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묵향 자신과…….

하나밖에 없는 사제를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고, 또 어쩌다가 이따위 질문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인지…….

묵향의 머릿속에 과거 사제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던 일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희미한 추억(?)이었다. 사실 그런 일은 피해자야 이를 갈며 분노에 몸을 떨겠지만 가해자는 그런 적이 있었나, 하며 잘 기억도 하질 못하는 법이다. 설사 기억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때의 실수였지 하며 웃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만났을 때의 악몽 때문에 사제가 지금 자신과의 만남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묵향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단지 뭔가 불만이 있는 듯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한 번씩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묵향의 뇌리에 ‘세불양립(勢不兩立)’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오, 바로 그거였군. 쪼잔한 녀석. 역시 도사는 너무 소심하단 말씀이야.’

“왜, 내가 나타난 게 그렇게 곤란하냐?”

묵향의 빈정거림에 현천검제는 난처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그런 질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으셔서……. 사형의 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니 묻는 말입니다.”

“쯧, 그게 아니겠지. 정파의 거두라 할 수 있는 화산파의 장문인에게 무림의 공적이라 할 수 있는 대 마두가 갑자기 사형이랍시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곤란하겠지. 하긴, 생각해 보면 자네는 사부님의 정식 제자도 아닌데, 나를 사형이라 부르기도 뭣할 테고, 나도 자네에게 사형 소리를 듣는 게 썩 기분 좋은 것도 아니고 말일세.”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묵향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자신은 파멸이었다. 그 생각까지 하자 현천검제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호칭 문제야 그렇다치고,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현천검제의 어조에는 약간의 불쾌감마저 묻어 있었다. 그의 눈은 이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는 데도 이용되고 있었다.

과거 묵향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 정도의 수많은 화산파 제자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지금은 그때와 처지가 달랐다. 대 화산파의 장문인, 이것이 현재 그의 위치였다.

그 모습에 묵향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자네가 마교 교주하고 만난다는 소문이라도 퍼질까 봐 두려운 모양이지?”

당연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가 장문인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무림에서의 명예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것이다. 아니, 똥물을 뒤집어쓴다고 해야 맞을지도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정파의 배반자로 몰려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 말에 현천검제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화경에 다다른 그의 오감(五感)은 주위에 인기척이 없음을 알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단 주위에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후, 그는 강공으로 나왔다.

“그래서 저를 협박하시려고 오신 겁니까?”

상대의 얄팍한 위협 따위는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현경의 고수라고 하지만 자신 또한 화경의 고수가 아닌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절대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현천검제였다. 무의식중에 그의 손은 허리에 매어진 보검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었다.

그런 현천검제가 가소롭다는 듯 묵향이 이죽거렸다.

“호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살인멸구라도 하겠다는 모습이군.”

“설마요. 현경의 고수를 앞에 두고 그런 재롱을 떨 담량은 없습니다.”

말은 겸손하게 하고 있었지만, 현천검제의 눈을 보면 전혀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묵향은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곧 힘을 풀었다. 성질 같아서는 몇 대 패고 대화를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녀석은 사부께서 남긴 유일한 사제가 아닌가.

‘좀 싸가지가 없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만났으니 내가 참아야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기분이 언짢았기에 묵향의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제법 대가리가 컸다 이거로군. 예전에 처음 만났을 때, 엉엉 울면서 제발 살려 달라고 할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씀이야.”

수양이 깊기로 소문난 현천검제였지만 그 말에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안색이 새하얗게 변하며 화를 벌컥 냈다.

“누가 빌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과거의 기억을 날조하지 마십시오!”

흥분한 현천검제를 보면서 묵향은 약간 눈을 크게 뜨며 대꾸했다.

“그랬었나?”

“물론이죠.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살려 달라고 빈 기억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말에 언뜻 떠오른 게 있었는지 묵향은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호오, 그래? 도를 닦은 자네가 하는 말이니 믿어 주지.”

여기까지 말한 묵향은 더욱 미소를 짙게 지으며 이죽거렸다.

“그럼 제발 죽여 달라고 빌었던 것을 내가 착각했던 모양이군.”

그때의 악몽이 지금까지도 눈에 선한지 현천검제는 입을 꽉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에 가득 찬 마음을 대변이라도 해 주는 듯 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런 상대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향은 능청스런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자, 예전의 일이야 그렇다 치고, 자네 이따위 허접한 문파에서 고리타분하게 살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내 수하들 중 예전에 정파랍시고 깝죽거렸던 놈들도 꽤 있거든. 지금은 아주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역시, 뱀 대가리보다는 용꼬리가 훨씬 멋있지 않나? 번쩍번쩍하니 때깔도 좋고 말이야. 그러니…….”

묵향의 딴청에 드디어 현천검제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는지 화를 버럭 내며 외쳤다.

“지금 그따위 농담이나 하시려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도대체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묵향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지.”

현천검제는 냉담하게 외쳤다.

“그놈의 용꼬리 얘기하러 오신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전 뱀 대가리로 만족하니까요.”

“그게 아닐세. 이제 농담은 그만 두고 좀 진지해져 보세나.”

‘젠장,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다가 갑자기 무게를 잡기는…….’

현천검제는 울화를 억누르며 묵향을 노려봤지만, 묵향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느긋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화산파가 누군가하고 시비가 붙었을 텐데?”

현천검제는 그제야 안심한 듯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사제가 화산 장문인이 된 것을 이용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아, 겨우 그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무리 천마신교가 10만 사파를 이끈다고 하지만, 사파의 작은 한 문파와 화산파의 다툼에 교주께서 직접 나서시다니…, 놀랍기 그지없군요.”

묵향은 짐짓 인상을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놈들이 본교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밀접한 관계가 있거든.”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교에서 분타를 건설하는 데 그 떨거지들을 동원했기 때문이지.”

그제야 전후 사정이 어느 정도 이해되는지 현천검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까?”

“자네 쪽에서 억류하고 있는 본교의 일꾼들을 돌려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작업을 하는 데 그놈들이 꼭 필요하거든. 그리고 그곳이 비록 화산파의 세력권이긴 하지만 거리가 꽤 떨어져 있으니 이 일은 그냥 묵인해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단독으로는 결정하기 힘든 일입니다. 모든 권력이 교주에게 집중되어 있는 천마신교에 적을 두고 계신 분께서는 이해하시기 힘드시겠지만, 그런 중대한 사안을 화산파에서는 장문인 혼자 처리할 수 없습니다.”

순간 묵향의 눈이 흉폭하게 번쩍였다.

“정녕, 피를 보고 싶다는 말이냐?”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화산파를 쓸어버리고 여기에 본교의 분타를 만들 수도 있음이야. 그걸 잊지 말라구. 알겠어?”

묵향의 말에 현천검제는 눈을 실쭉하게 뜨고 맞받았다. 그도 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협박? 협박이 아니라 진실을 얘기해 주고 있는 거야. 장문인이 네 녀석만 아니었어도…, 젠장!”

그 말을 들은 현천검제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의 눈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오호라, 바로 그것 때문이었군요. 웬일로 갑자기 저를 찾아오셨나 싶었지요. 게다가 만나자마자 칼부림까지 한 이유가 뭔지 아주 궁금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목적은 저를 죽이려고 오신 거였군요.”

묵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현천검제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따지고 들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것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태극혜검법(太極慧劍法)까지 익히신다고 아주 고생하셨겠군요. 그래, 어설프게 배운 태극혜검법으로는 저를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테니, 이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팬 후에 최후의 일검은 태극혜검으로 할 예정이닷!”

순간 묵향의 검이 절반 정도 쑥 뽑혔다. 설마 사형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현천검제는 바짝 긴장하며 마주 검을 뽑아 들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묵향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곧바로 검을 다시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거친 숨을 뿜어내던 묵향은 이윽고 마음을 정리한 듯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선택은 네 자유다. 대신 한 달간의 말미를 주겠다. 그 안에 그놈들을 석방한다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현천검제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묵향이 자신을 위해서 상당히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교가 지닌 무력을 총동원한다면 화산파는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쑥대밭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무림맹이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화산파가 멸문당한 후가 될 것이다. 무림맹의 정예들이 준비를 갖추고 화산까지 출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설사 무림맹 전체라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들 묵향이었다. 그런데도 말을 빙빙 돌리다 결국 한 달이라는 말미를 준 것은 자신을 생각해서 배려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노련한 현천검제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인지 현천검제의 말투도 처음과는 달리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사형께서 하신 제안,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고려해 보겠습니다.”

일단 여기에 온 목적은 달성했다고 여겼는지, 묵향은 어둠의 장막을 쓰고 있는 화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묵향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이로군.”

‘분명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터전을 잡고 싶어 하실 만한 곳이야. 하지만 사부님이 과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으셨을까? 사실 그분이 원하셨던 곳은 십만대산이었을 게 분명해. 모든 마도인(摩道人)들의 고향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사부는 왜 십만대산을 떠나 중원을 떠도셨던 것일까? 이 못난 제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묵향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교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묵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 없었던 현천검제는 조용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화산은 정말 아름답지요. 이곳에 있다 보면 계절마다 바뀌는 화산의 아름다움에 제가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쁨을 맛볼 수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현천검제의 시야에 들어온 묵향의 뒷모습은 화산을 내려다보며 절경에 취해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유난히도 그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고 느꼈을 때,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사부께서 세상을 등진 곳이기도 했다.

현천검제는 멀리 보이는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저 나무 아래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저곳에 묻어 드렸는데 잠시 가 보시겠습니까?”

일순간 묵향의 몸이 격동으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잠시 후 묵향은 공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살아 계실 때 제대로 못 해드렸거늘, 이제 산소에 찾아뵈면 무엇 하겠느냐. 사부께서는 계시지 않고 백골만이 묻혀 있을 텐데…….”

묵향은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내뱉듯 말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슬픈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묵향을 보며 현천검제는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얼마나 스승을 사랑했는지 그 감정이 전해져 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사부와의 인연이 박하여 사형만큼이나 오랜 시간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가끔씩 그분과의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인자하게, 하지만 필요할 때는 매섭게 자신을 가르치던 그분의 모습. 문득 현천검제는 잠시라도 좋으니 그런 사부가 이곳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제자들이 이렇게 성장한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사형, 술 한잔 안 하시겠습니까?”

“술?”

“예, 간혹 들르는 좋은 객잔이 있습니다.”

“허헛, 별일이군. 화산파는 도가 계열이라고 들었거늘, 자네도 술을 하는가?”

“화산은 무당이나 청성, 점창 등과는 달리 아주 자유로운 편입니다. 너무 도에 얽매이다 보면 오히려 그것이 발목을 잡아 도를 깨닫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자네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하군. 무공도 너무 익히려고 발악을 하다 보면 오히려 더욱 익혀지지 않는 구석이 있지. 좋아, 술이나 한잔하세. 오랜만에 사제를 만났는데 술이 없다면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묵향은 몇 걸음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만 두는 것이 좋겠어. 혹여 나를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자네한테 해가 될 걸세.”

자신을 배려하는 묵향의 말에 사형의 정이 따뜻하게 묻어 있는 듯하여 현천검제는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본문에 난입하실 때는 그런 생각 안 하셨습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사형께서는 워낙 오랫동안 칩거하신 뒤라 알아볼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 예로 화산에 수많은 식객이 있었음에도, 그 누구 하나 사형을 알아본 사람이 없었지 않습니까? 제가 가끔씩 가는 객잔이 있는데, 이 시간이면 손님이 거의 없어 여유롭게 한잔하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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